#006
2. 방독면, 염가 판매, 69달러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일투성이다.
서준은 자신을 연쇄 살인마처럼 바라보는 배은망덕한 보비와 눈을 마주치며 생각했다.
‘이 시간이면 식인 괴수가 날뛸 시간 아니었나?’
높이 뜬 달을 보며 시간을 가늠하고자 했지만 영 어려웠다.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팻말에 긁힌 팔에서 흐르던 피는 이제 멈췄지만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여전히 쓰라렸다.
“살인자! 살,”
“보비, 입 좀 다물어 주지 않을래?”
“흐읍….”
서준은 도끼를 이용해 정중하게 부탁했다. 미지근한 날이 가슴팍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자 과연 보비도 서준의 간청을 들어줄 마음이 샘솟은 모양이다. 그는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한참을 뛰어 두근거리는 심장이 진정되길 기다린 후 보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보비는 거의 두 눈을 뒤집고 혼절할 지경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서준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보비를 살펴보았다. 보비의 몸뚱이는 어디 한군데 떨어져 나간 부분 없이 멀쩡했다.
이상했다. 지금쯤이면 한창 어설프게 생긴 식인 괴수가 날뛰어야 할 시간 아니던가? 비록 손목시계마저 망가지는 바람에 정확한 시각을 알지 못했지만 늦은 밤중이란 건 확실했다.
‘이상한 일투성이야.’
서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낏자루를 꽉 잡았다. 덕분에 보비의 숨이 멎을 지경이었지만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어째서 식인 괴수는 잠잠하며, 왜 가스마스크는 벌써 튀어나와 캠프장이 아닌 편의점에서 습격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보비는 한밤중에 홀로 무슨 얼빠진 짓을 하는 걸까? 하나같이 의문투성이였다.
차라리 보비가 식인 괴수의 안락한 위장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편이 덜 놀라웠다. 서준은 혀를 차며 일어난 보비의 머리통을 팽이처럼 회전시켰다. 들개처럼 땅을 파다가 갑자기 사람을 살인마로 모는 꼴이라니! 고작 피가 묻은 도끼를 들었을 뿐인데 모함당해 속이 분하고 답답해졌다.
서준은 잠시나마 보비가 거짓말쟁이인 채로 생명을 끝내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는 보비를 더욱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게 어떨까 고민했다.
물론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살인자가 될 수는 없다든가, 보비의 생명일지라도 소중해 지켜 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지금도 그의 뒤로 가스마스크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이란 놈은 어설픈 인간관계도 제법 매끄럽게 만드는 법이다. 서준은 도끼의 윗부분으로 어지러워하는 보비의 가슴을 툭 쳤다. 가냘픈 신음이 꽉 멘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
“흐으으….”
“보비, 살고 싶다면 조용히 해.”
“흐으, 읍….”
가스마스크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랐다. 서준은 보비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 금쪽같은 충고를 건넸다.
진심을 다한 조언이 마음에 닿았는지 보비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퍽 얌전해진 모습에 서준의 마음도 한결 보드라워졌다. 그는 칭찬하고자 보비의 정수리를 도끼의 날 반대편으로 톡 치려다가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이크.’
서준이 든 도끼는 소방용으로 색이 시뻘건 것이 자못 위협적이었다. 실제로 다용도로 사용이 가능한 이 소방 도끼는 날 반대편이 뾰족하게 서 있었다. 하마터면 보비의 정수리를 쪼개 버릴 뻔한 서준은 딴청을 피우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보비가 소리친 게 좀 걸리는데.’
보비는 원체 목소리가 깨진 사기그릇처럼 쨍한 면이 있었다. 잠자던 새도 깨울 만치 날카로운 보비의 비명을 가스마스크가 듣지 못하기를 바라는 건 제가 생각해도 요행을 바라는 짓이었다.
우연에 기대어서는 생명을 지키지 못한다. 서준은 불운으로 가득한 공포 영화 속 세상에서 목숨줄을 부지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
“자, 보비. 네 친구들에게 안내해.”
“나, 난 그런 짓을….”
서준은 보비가 입을 다물기 전 요정 대모의 마법 봉처럼 새빨간 도끼를 휘둘렀다. 그러자 보비의 눈동자가 요술에 걸린 듯 몽롱해졌다.
“당연히, 당연히 할 수 있고말고!”
“좋은 마음가짐이야.”
서준은 보비의 손에 랜턴을 쥐여 준 다음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불은 꺼. 그리고 주변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넌 조용히 움직여야 해. 알았지?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도 내지 마.”
“으으으…. 알았어, 알았으니까….”
가스마스크에게 발각당할 것을 우려하여 랜턴의 불을 끄게 시키자 보비가 다시 울먹거렸다. 서준은 도통 보비의 섬세하고도 변화무쌍한 속내를 이해하지 못해 그저 등이나 발로 찼다. 그리하여 서준은 간간이 훌쩍거리지만 기본적으로 조용한 동행을 얻었다.
“흑, 흐윽….”
간헐적으로 떨리는 등을 바라보며 서준은 말없이 걸었다. 까닭 모를 일들만 연달아 일어난 탓에 짙은 피로가 손과 발에 무겁게 매달렸다.
하지만 여기서 쉬었다가는 인생이 그대로 끝나 버릴 것이다. 그는 눈에 힘을 주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유리가 깨진 디지털시계는 9시 20분에 멈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이때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정확하게는 모른다. 그러나 아직 7월 4일이 끝나기에는 멀었다는 사실만이 확실했다. 서준은 보비의 우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몽 캠프장에 도착하기까지 있었던 일을 천천히 반추했다….
***
생존이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적어도 서준은 자신이 그걸 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는 오만이었으며, 더 나아가 자만에 가까웠다.
팔꿈치로 흐르는 뜨거운 피에 서준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파상풍 주사를 맞았는지 기억을 열심히 뒤적거렸으나 복잡해진 머리는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파상풍 주사는 살아난 다음에 생각하자.’
가스마스크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파상풍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준은 더욱 어두워진 길을 되돌아보았다. 젖 먹던 힘까지 짜낸 끝에 그는 가스마스크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천만다행으로 가스마스크가 총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준이 마냥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포 영화에서 살인마가 총을 쓰지 않는다는 건 다시 말해 온갖 잔혹한 고문을 가하겠다는 뜻이었다. 가스마스크의 경우, 하몽 나이프를 이용해 서준을 정말 하몽으로 만들 작정이 틀림없었다. 피를 흘려 하얀 얼굴이 더욱 퍼렇게 질렸다.
‘이래서 연쇄 살인마가 싫어. 잡히면 개똥철학을 늘어놓겠지. 상도덕도 없는 새끼들 같으니….’
살해당하는 판국에 악당이 주절거리는 근거도 주장도 출처도 없는 논리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순간 죽음이 아닌 다른 공포가 서준의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미래를 바꿔야 한다는 다급함이 더욱 거세졌다.
서준은 숨을 헐떡이며 손목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마침 8시 30분이었다.
‘여덟 시쯤 편의점을 정리하고 나왔으니까 30분은 내도록 달린 셈이야.’
그는 욱신거리는 발바닥을 무시하며 얼얼하니 아픈 다리를 채찍질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스마스크가 다가올 터이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벌려야 했다.
하지만 평소 운동을 꾸준히 하지 않은 육체는 30분간 뜀박질을 한 것으로 진이 다 빠졌다. 서준은 막막한 기분을 억누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따끔한 통증이 부옇게 흐려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그는 멀쩡한 왼쪽 팔을 들어 이마를 문질렀다. 흐물흐물한 뇌로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서준에게 필요한 것은 또렷하고 맑은 의식이었다.
끊임없이 걸으며 그는 제게 무엇이 남았나 점검했다. 슬프게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맨몸뚱이와 손목시계, 그리고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든 주범인 레몬이 전부였다.
“긍정적,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서준은 자기 세뇌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곧 그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퇴근길에 습격당했다. 당연히 그의 짐은 가방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리고 가방은 자전거 바구니에 들어갔으며, 자전거는 아직도 편의점 앞에 얌전히 매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괴로워했다.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가장 손쉬운 수단인 휴대 전화가 그에게는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부디 가족이라도 자신의 부재를 알아차리면 좋으련만, 오늘은 재수가 옴 붙었는지 부부끼리 지인 댁에 놀러 가겠다고 말했던 것이 뒤늦게 떠올랐다. 또래와 어울리는 걸 극도로 꺼리던 서준과 달리 그의 부모는 성격이 활달하고 주변 사람과 사귀는 걸 즐겼다. 더군다나 서준은 여느 때와 달리 편의점에서 일찍 나왔으니 그의 고난을 시기적절하게 알아차리기란 요원했다.
울적한 손길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레몬을 쓰다듬었다. 이 레몬으로 시도 가능한 반격은 고작해야 안면에 즙을 뿌리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방독면에 가로막혀 실패할 것이 뻔했다.
‘빌어먹을 가스 마스크.’
가스 마스크의 두꺼운 안구 보호대에 이를 갈며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을 것이라곤 키만 크지 빈약한 몸뚱이가 전부라니 통탄할 따름이었다.
그는 어중어중 길을 더듬어 걸었다. 하몽 캠프장 근처 편의점에서 일했지만 눈길도 주지 않으려 노력한 덕에 지리를 하나도 몰랐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시울을 억누르며 서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어두운 숲이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가스마스크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새까만 숲길은 불안을 늘려만 갔다. 서준은 이미 독 안에 든 쥐 신세였다. 그러니 반드시 가야 했다.
비록 식인 괴수와 가스마스크가 비중을 양분하는 대단하신 캠프장이었지만 그곳에는 크리스티나가 있었다. 파이널 걸을 향한 믿음이 그의 등을 떠밀었다. 게다가 훌륭한 육체파 윌리엄이, 가장 위험한 곳에 미끼처럼 무방비하게 들어갈 보비가 있지 않던가.
그리고 요한이 있었다.
서준은 요한 젠틸이라는 남자를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아 왔다. 어린 요한은 때때로 얄밉고 짜증 났지만 대체로 믿음직스러운, 기묘한 소년이었다.
교제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친구라고 부르기도 먼 사이였다. 그러나 요한이 하몽 캠프장에 있다는 현실이 서준의 발에 힘을 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행히 께름한 감정은 피로 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열심히 달리던 서준은 자신이 감수성에 취했다는 사실에 진저리를 쳤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 감상에 빠지는 사치나 부리다니? 그는 느슨해진 정신머리를 바로잡았다.
‘194센티 쿼터백, 훌륭한 방패막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