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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5)화 (5/156)

#005

“기껏 여자애들하고 같이 왔는데 왜 따로 자는 거야?”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산장 안을 울렸다. 투덜거리는 보비의 말에 머리를 깔끔하게 깎은 윌리엄의 눈이 매섭게 올라갔다. 양초의 불이 흔들릴 때마다 불그스름한 빛이 번져 그의 팔뚝이 한층 더 단단해 보였다. 보비는 금방 태도를 바꾸어 요한에게 말을 걸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닐걸! 요한도 그렇게 생각하지?”

요한은 키도 크고 잘생겼지만 태도가 털털하고 친근한 구석이 있었다. 과연 보비의 바람대로 1층 침대에 누워 레몬을 허공에 던졌다 받기를 반복하던 요한이 입을 열었다.

“뭐가 문제야, 보비? 오늘 즐겁게 놀았잖아.”

“문제라는 게 아니라, 너희는 걱정도 안 돼?”

보비의 볼멘소리에 나른하게 누워 있던 요한이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여유로운 움직임이었으며 그의 두툼한 흉곽은 얇은 셔츠 한 장으로는 숨겨지지 않았다. 요한은 언뜻 듣기로는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뭐가? 보비, 똑바로 말해야 우리가 알지.”

보비는 도드라지는 요한의 근육에서 눈길을 떼며 중얼거렸다.

“왜, 아까 호수에서 수영을 할 때. 에어리의 웃옷이 없어졌잖아. 그게 누구 짓이겠어? 내 생각에는 여기 관리인이 수상해. 그렇게 생겼잖아.”

에어리를 끌어들이는 말에 윌리엄의 안색이 대번에 굳었다. 원체 무뚝뚝한 인상이 더욱 돌덩이처럼 뻣뻣해졌다. 그의 두꺼운 눈썹이 독수리의 날개처럼 휘어지며 보비를 향했다.

“보비, 에어리의 옷은 호수에 떨어졌었어. 나중에 발견했을 텐데.”

동굴처럼 깊게 울리는 목소리에 보비가 되레 울컥해 짹짹거렸다.

“나도 알아. 하지만 애초에 옷이 왜 떨어졌던 건데? 그리고 에어리는 옷 위에 돌을 올려놨잖아. 그런데 바람에 날려 호수에 떨어졌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빌리!”

“윌리엄.”

“어?”

“난 윌리엄이야, 보비.”

윌리엄의 말에 보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무언가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오는 건 뜨거운 콧김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산장의 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다소 장난스러운 손길이었다.

“문 열렸어.”

요한이 턱을 괴고 소리치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촛불이 살랑 흔들렸다. 그리고 서서히 열린 문 사이로 작은 머리가 쏙 들어왔다.

“짠!”

에어리였다. 그녀는 양손에 맥주 캔을 들고 흔들며 활짝 웃었다. 에어리는 어딘가 어정쩡한 분위기에 덩달아 낯을 굳혔다.

“맥주와 미녀가 왔는데 이 방 상태가 왜 이래?”

“에어리, 안 들어가?”

에어리의 뒤에서 크리스티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어리는 친구를 위해 빠른 걸음으로 산장 안에 들어왔다.

말이 산장이지, 작은 목조 건물은 2층 침대가 두 개 들어선 것으로 이미 꽉 차 있었다. 사실상 산막이었다. 사람이 다섯이 되자 몹시 비좁았다.

에어리는 자연스럽게 윌리엄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았고 크리스티나도 요한이 누운 침대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녀는 요한의 덩치에 신경질을 내면서 툭 쳤다. 그리고 소원이 반쯤 이루어진 보비는 서둘러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윌리엄의 팔에 머리를 기댄 에어리가 맥주 캔을 나누어 주며 물었다.

“왜들 이래? 설마 마시멜로만 구워 먹고 끝낼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 응, 빌리?”

“에어리….”

윌리엄의 얼굴은 여전히 돌처럼 단단했지만 그의 얼굴이 붉은 건 촛불 탓이 아니었다. 에어리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리고 보비, 밖에서 다 들었어. 넌 어떻게 사람을 생긴 걸로 그렇게 차별하니? 곰보 자국 있다고 그런 말 하는 거 모를 줄 알아? 게다가 여기 식사까지 다 책임지는 분이잖아. 말하자면 우리의 내일 아침을 선사하는 요리사인 셈이지.”

“요리사는 무슨 요리사! 그냥 관리 일 하면서 겸사겸사 요리하는 거잖아. 실력도 아주 끔찍할걸? 두고 봐. 보나 마나 맛대가리 없는 오트밀 죽에 다 탄 토스트, 걸레를 빤 냄새가 나는 주스를 내올 테니! 내가 저녁 식사 차려 준다는 걸 괜히 거절한 줄 알아?”

“야아, 보비. 넌 우리가 먹을 식사에 뭘 그렇게 악담을 다 하냐? 그리고 저녁을 거절한 건 우리가 바비큐 준비를 해 와서 그런 거잖아.”

요한의 타박에 보비가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그는 심통 맞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다. 맥주를 마시던 크리스티나가 입가를 쓱 닦고는 입을 열었다.

“보비, 너 관리인이 한나 오 랜턴의 의식 장소를 찾으러 못 가게 막아서 그런 거지?”

크리스티나의 냉엄한 말투에 보비의 몸이 펄쩍 튀었다.

“아니야!”

보비가 빠르게 부정했지만 그의 새된 목소리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어리가 보비를 흘겨보며 코웃음 쳤다.

“보비, 너 설마 외계인을 부르는 신비한 의식을 보지 못했다고 그렇게 심술을 부리는 거였니?”

“누, 누가.”

이제 말까지 더듬는 보비의 의중을 좁은 산막에서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에어리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가볍게 몸을 흔들 때마다 갈색 머리카락이 윌리엄의 팔 근처를 간지럽혔다.

“맙소사! 보비, 넌 광대는 무섭다면서 외계인은 안 무서워?”

“웃지 마, 에어리! 광대 공포증은 많은 사람에게 유의미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외계인이 보낸 신호는 무수히 많았어. 정부가 그걸 숨기고 있을 뿐이야.”

“어…. 음. 너 진지하구나.”

에어리가 벌겋게 단 보비를 외면했다. 다 마신 맥주 캔을 한 손으로 와작 구기던 요한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나 오 랜턴이 의식을 치른 건 1960년대 아니었나? 그때 그린… 뭐, 마법진 같은 건 이미 진작에 다 날아갔을걸.”

“정확하게는 1964년도야. 그리고 마법진 같은 게 아니야. 우주의 존재와 통신한 거지.”

보비가 냉큼 정정했다. 에어리의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윌리엄이 말을 툭 던졌다.

“드라마 좀 작작 봐, 보비.”

“빌, 윌리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보비는 이두박근이 훌륭한 윌리엄에게 삿대질하려는 노력을 포기했다. 대신 그는 미지근해진 캔을 손에서 굴리며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드라마가 뭐 어때서? 게다가 리메이크한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정말 팬 보이가 따로 없다니까.”

구시렁거리는 보비를 바라보며 에어리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실소를 내뱉었다.

“아무렴 우리 엄마만 하겠어? 나를 봐. 답이 나오잖아.”

크리스티나의 푸념에 에어리가 긍정도 부정도 못 한 얼굴로 모호하게 웃었다. 그녀는 크리스티나 뒤에서 여전히 방만한 자세로 누워 있는 요한을 향해 눈을 찡긋 감았다.

물론 에어리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건 애인인 윌리엄이었지만, 그가 말재간에 재주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것도 에어리였다. 다행히 그녀의 기도가 하늘에 계신 분께는 닿지 않아도 땅에 발붙인 요한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요한이 캔이었던 납작한 알루미늄 딱지를 양초 옆으로 요령 좋게 던졌다. 순식간에 주목을 끌어모은 요한이 제 입꼬리를 툭 건드렸다.

“그런데, 내가 골든을 본 것 같거든?”

“골든? 골디, 실버, 브릭 그 패거리의 골든 말하는 거야?”

크리스티나가 몸을 떨며 질색했다. 그녀는 차라리 요한이 잘못 보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요한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골든의 그 대담한 옷차림을 잘못 보기는 힘들지.”

“세상에, 그럼 내 옷 건드린 거 걔들 아니야?”

에어리가 찝찝해하며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의심은 제법 타당했다. 금·은·동 트리오는 하나같이 소문이 나빴는데 특히 브래스는 여자와 관련된 지저분한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음.”

아랫입술을 핥은 윌리엄이 낮과는 달리 긴 셔츠를 입은 에어리의 어깨를 감쌌다.

“걱정하지 마, 에어리.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 줄게.”

“빌리….”

크리스티나가 콧등을 찌푸리며 요한에게 맥주를 한 캔 더 건넸다.

“우리 다음부터는 커플 데리고 놀지 말자. 저기만 딴 세상이야.”

순간 요한이 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산막 가장 안쪽의 침대에 구겨져 있던 그의 얼굴을 아무도 목격하지 못했다.

“후….”

양초의 불빛이 크리스티나의 금발을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산막의 작은 창을 응시했다. 숲의 밤은 새까매 나무의 윤곽만이 어스름하게 보였다.

그러나 어두워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여전히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크리스티나는 구름 한 점 없을 하늘을 상상하며 긴장했던 몸에서 힘을 풀었다.

“에어리, 왜 빌리하고 밤하늘 구경이라도 안 가고 여기에서 모이자고 한 거야? 너 오기 전에는 호숫가를 거닐면서 데이트할 거라고 나한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잖아. 뭐, 지금 보니까 가지 않은 게 다행이긴 하지만.”

“그랬어?”

윌리엄이 혹했는지 에어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에어리는 입술을 모아 쯧쯧 소리를 내며 검지를 흔들었다.

“오, 동정녀 크리스티-마리아야. 저 어두컴컴한 호수에 뭐가 있는 줄 아니?”

“글쎄, 식인 괴수라도 있나? 뭐…. 있어 봐야 골든이나 있겠지.”

술기운이 올랐는지 크리스티나의 피부에 옅은 분홍빛이 감돌았다. 특히 그녀의 오른쪽 뺨의 주근깨에 평소보다 더욱 진하게 색이 올랐다. 크리스티나의 대꾸에 에어리가 윌리엄의 팔을 붙잡고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아니야! 저 호수에는….”

“호수에는?”

꿀꺽, 보비가 목을 길게 빼고 에어리의 입술에 집중했다. 낮에 호수에서 물장구를 치느라 화장이 지워진 상태였지만 불빛이 그녀의 입술을 선명하게 칠해 윤곽이 뚜렷했다. 어둡게, 또는 붉게 빛나는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무시무시한 모기가 있어!”

천연덕스러운 에어리의 말에 하나같이 김이 샌 얼굴로 변했다. 보비만이 아니라 크리스티나도 코웃음을 쳤다.

“그게 뭐야.”

“말도 마.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모기한테 피가 쪽쪽 빨리는데 어떻게 그런 데서 로맨틱한 분위기를 잡니? 아까 수영할 때는 낮이어서 그나마 덜했지. 지금은 못 나가. 안 그래, 빌리?”

“난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빌리….”

다정한 한 쌍의 연인을 바라보며 크리스티나가 목이 졸린 듯 괴로워했다.

“또 저러지. 또!”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자신들의 산막으로 떠난 뒤 요한과 윌리엄, 보비도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비좁은 산막에는 밀랍이 녹은 냄새와 맥주의 고소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섞여 보비의 허파를 들뜨게 했다.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잠들지 못하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1964년, 한나 오 랜턴이 외계의 계시를 받았다 주장하며 캠프장에서 자살했다. 그녀와 남자 친구, 그리고 세 명의 친구까지 도합 다섯 명의 청년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의 죽음은 미국 전역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죽음의 이유도 이유지만, 그들의 시신이 참혹하게 훼손되었던 탓이다.

한나 오 랜턴과 그 친구들은 아주 다양한 상태였다. 꽉 쥐어짜 마른걸레처럼 물기가 없는가 하면 상반신과 하반신이 뜯겨 나가고 정수리부터 오른쪽 두개골이 완전히 으스러져 떨어진 것도 있었다. 무릎과 정강이뼈가 산산조각이 나 녹아내린 허벅지와 종아리가 둥글게 뭉쳐 굴러다녔다. 혹은 내장이 모조리 사라지고 뱃가죽이 터졌다. 기괴하고도 끔찍한 몰골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흔적 중 제대로 된 것은 잇자국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체를 훼손한 자국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동물의 치열과도 달랐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서로 살해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여론의 의혹에도 경찰은 부검 결과 한나 오 랜턴과 친구들의 직접적인 사인은 약물을 이용한 자살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믿지 않는 사람이 우후죽순 솟아났다. 장대한 음모론의 시작이었다. 이후 한나 오 랜턴은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친구들은 한나 오 랜턴을 무시했지만, 보비는 그녀가 남긴 수필이며 스케치, 책으로 출판된 전기를 전부 끌어모았다. 한나는 보비가 존경하는 동향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게다가 한나는 많은 창작자에게 영감을 남길 정도로 미술 능력이 뛰어났다.

하물며 그녀가 직접 남겼다는 우주 통신 기록이 캠프장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보비는 윌리엄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빛냈다. 별조차 빛나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 그를 한껏 고무시켰다.

보비는 힘껏 발소리를 죽여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시끄럽게 코골이를 하는 윌리엄이나 등을 돌린 채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는 요한이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가방에서 꺼낸 지도와 랜턴을 소중하게 껴안고 산막을 빠져나왔다. 오래도록 기름칠하지 않은 문이 삐걱거릴 때는 마음이 조마조마했지만 누군가 보비를 부르는 일은 없었다. 그는 괜스레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발을 재게 놀렸다.

랜턴을 틀고 지도를 꺼내 펼쳤다. 점점이 흩어진 산막과 캠프장의 주요 시설, 호수와 숲길이 그려진 지도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세 군데 있었다. 그것은 한나가 거행한 우주 통신이 이루어졌을 법한 장소로 보비가 미리 점찍어 둔 곳이었다.

우선 보비는 자신이 나온 산막과 가장 가까운 호수가 보이는 숲의 안쪽으로 향했다. 보비가 머리를 쓰지 않아도 과거 한나의 족적을 좇던 이들이 유추한 자료가 있었다.

다만 그들은 한나가 죽었을 당시에 경찰의 통제와 캠프장 주인의 거절로 인해 직접 들어오지 못했다. 자료는 그저 자료로 떠돌았다. 그리고 마침내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한나 오 랜턴의 이름이 희미하게 흐려진 지금, 보비가 하몽 캠프장에 발을 들였다.

비록 한나의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이름이 달랐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캠프장인 건 똑같았다. 보비로서는 뜻밖에 운이 좋았던 셈이다.

랜턴의 빛에 의지해 걷던 도중, 문득 보비가 실소를 터뜨렸다. 랜턴의 흔적을 랜턴으로 더듬다니. 골든 패거리가 갑작스레 나타날까 봐 두려웠던 마음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보비는 보무당당하게 숲으로 들어갔다.

“허억, 허억….”

해가 진 숲은 서늘했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보비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반쯤 기다시피 몸을 숙이고 흙바닥을 더듬었다.

“아!”

곧 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얼치기들의 자료는 정확했다! 보비가 랜턴과 지도를 땅에 내려 두고 손바닥으로 그것 위를 덮은 흙을 털었다. 점차 그것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것은 판판한 돌이었다.

한나 오 랜턴 특유의 파괴적인 글씨체가 새겨진 돌이 땅에 굳건하게 박혀 있었다.

보비의 얼굴에 땀과 함께 환희가 달라붙었다. 틀림없는 진짜였다. 입가가 헤실헤실 풀어졌다. 이것을 발표한다면 그는 진정 유명해지리라. 크리스티나와 어울리는 남자로 거듭나는 것이다.

“다들 날 무시하지만, 내가 이래 봬도 모델도 한 남자란 말이야. 어쩌면 필리 에프도 곧 나한테 친구 신청을 할지도 모른다고.”

비록 모델은 단발성에 불과했지만 이미 보비의 머릿속에 그러한 정보는 날아간 지 오래였다.

“내가 방송에 나가면 이제 톰팃톳에서 크리스티나와 어울리는 남자는 나밖에 없어. 요한도 룸펠슈틸츠헨 베이비지만, 내가 더 급이 높아지는 거야.”

보비의 눈동자가 욕심으로 얼룩졌다. 그는 랜턴으로 한나의 비석을 비춘 다음 양손으로 허겁지겁 돌을 파냈다. 손톱 사이에 흙이 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보비에게는 이 돌이 그의 신분을 상승시켜 줄 열쇠였다.

그때 비석 위로 지저분한 운동화가 턱 얹혔다. 오랫동안 숲을 헤매기라도 했는지 헤지고 더러운 신발이었다. 이 소중한 비석에 대체 무슨 짓일까? 보비가 분개해 랜턴을 들었다.

“누구야!”

그때 뚝, 하고 무언가 떨어졌다. 위를 향하던 시선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갔다.

“어.”

보비의 입술이 헤벌어졌다. 새빨간 핏방울이었다. 한나가 돌에 새긴 틈을 따라 붉은 피가 번졌다.

“어어….”

보비는 아주 느리게 턱을 올렸다. 아랫입술이 덜덜 떨렸다. 보기 싫었지만, 강력한 인력이 그를 움직였다.

피는 도끼의 날에서 떨어졌다….

하얗게 질린 낯은 밀랍으로 만든 인형보다 창백했다. 보비는 저 불길하리만치 새하얀 얼굴을 알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까마귀의 날개처럼 검게 윤기가 흐르고 작은 얼굴에 든 단정한 이목구비는 이렇다 할 표정이 없었다. 유리알처럼 무감정한 눈동자는 항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양 멍했다. 그러나 지금 서준의 시선이 똑바르게 보비를 향했다.

다시 도끼에서 뚝, 하고 피가 떨어졌다.

아찔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용케 기절하지 않은 보비는 태어난 이래 성대의 성능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그의 비명이 캠프장에 우렁차게 울렸다.

“살인마다! 살인마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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