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4)화 (4/156)

#004

서준은 마음속으로 미리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가 톰팃톳에서 제일가는 점원이라 자부하지는 못해도 서준만큼 적당한 일꾼을 찾기가 수월하진 않으리라. 이 외진 곳에 있는 하몽 편의점에서 수년간 불평불만 없이 일했으니 아쉽기야 할 터였다.

게다가 서준은 남들이 여행이다 뭐다 하며 돌아다닐 때도 톰팃톳에 붙박이처럼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실상은 공포 영화의 억제력 탓에 빠져나가지 못한 탓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야말로 톰팃톳에 뼈를 묻을 각오라도 한 듯 비쳤다.

잠자코 제 행각을 되돌아보던 서준의 입술이 비죽 튀어나왔다. 그는 어이가 없어 속으로 투덜거렸다.

‘뭐야, 그럼 프레드는 내가 평생 편의점 직원으로 일할 줄 알았나? 이 더럽게 매출도 안 나오는 편의점에서?’

물론 소리 내서 말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이래 봬도 일단은 프레드가 월급 주는 사장님이 아니시던가. 서준은 자신의 트럭 기름값을 향해 부드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프레드, 저도 스무 살이 넘었잖아요.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순 없죠.”

그는 마무리하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스스로 제법 미국인다운 제스처를 취했다고 여긴 서준은 대걸레질을 재개했다. 걸레가 신발 코를 툭 건드리자 프레드가 화다닥 뒷걸음질 치며 대꾸했다. 그의 손이 조끼 끄트머리를 구기듯 잡았다.

“그건, 그렇죠.”

“여긴 일하기 좋은 곳이니까 새로운 직원도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정 사람이 급하면 저도 친구들한테 말해 볼게요.”

엉망으로 널브러진 바닥을 치우면서 하기에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 말이었다. 서준이 아무렇게나 늘어놓은 거짓부렁에 프레드가 다소 기죽은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알겠어요….”

볼일이 있다는 건 허언이 아니었다는 듯 우울한 낯짝의 프레드가 사라지고, 이글이글하게 열을 내뿜던 태양도 어느덧 산 너머로 가라앉았다.

하몽 캠프장과 가까운 길목에 자리한 하몽 편의점은 늘 그렇듯 조용했다. 사실상 크리스티나 일행을 비롯해 금·은·동 트리오의 방문이야말로 이변이나 다름없었다. 서준은 프레드의 일찍 들어가도 괜찮다는 말을 상기하며 심드렁한 낯으로 계산대를 정돈했다.

‘이놈의 편의점에 올 손님이 없다는 걸 사실 본인도 아는 거지.’

애당초 자리가 나빴다. 도심에서 떨어진 캠프장으로 들어가는 근처에 뜬금없이 선 편의점이라니. 인기 있는 캠프장이라면 좋은 선점이라 여길지도 모르나 하몽 캠프장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도 아니었다.

오히려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한 공기가 흘러 외지인은 고사하고 주민들조차 외면했다. 사실상 방치된 캠프장을 찾는 건 공포 영화의 숙명을 따르는 주연들과 하지 말라는 짓은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고약한 말썽꾸러기들이 전부인 셈이다.

재바른 손길로 오늘 하루의 매출을 계산하던 서준의 손이 우뚝 멈췄다. 금·은·동 트리오야 난동만 부리다 떠났으니 오늘 들어온 수입은 크리스티나 일행이 건넨 돈밖에 없었다.

서준은 요한이 내민 지폐를 검지로 문질렀다. 장갑을 벗은 손가락 끝에서 레몬 향이 났다. 계산대 위의 바구니에는 아직도 레몬이 가득했다.

낮에 요한이 한 것처럼 그가 레몬을 굴렸다. 손가락 사이로 단단한 촉감이 느껴졌다. 애당초 영화 속 인물들과 접촉이 꺼려져 끼기 시작한 장갑이었으므로 그도 맨손이 편했다. 장갑을 벗자 시원한 공기가 손등을 쓸었다. 벗은 장갑을 아무렇게나 내버려 둔 채 레몬을 잡았다. 새큼한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괜찮을까.

답을 아는 질문을 자신에게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서준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눈꺼풀이 바르르 떨리고 감은 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환시조차 없는 묵묵한 어둠이었다.

괜찮을 리가!

그들은 식인 괴수와 살인마에게 뒤쫓기며 끔찍한 시간을 보낸다. 식인 괴수에게 겨우 살아남은 친구가 살인마의 나이프에 사지가 끊어지는 광경을 보게 된다. 그 모든 정경을 서준은 이미 목격했다. 흑백 화면을 통해서 흩뿌려지던 가짜 피는 이제 생생한 냄새와 선명한 색으로 재현될 것이다. 바로 오늘, 멀지 않은 곳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뭉쳐진 지폐가 꼴사나웠다. 마치 알량한 걱정으로 양심을 확인하려 한 자신의 자화상 같은 꼴이었다.

서준은 혀를 차며 지폐를 바르게 폈다. 그는 제가 어떤 인간인지 잘 알았다. 위선적인 문장을 몇 개 주워섬긴다 한들, 서준은 전화를 걸어 그들에게 당장 캠프장을 벗어나라 외치지 않는다. 대신 바구니 속 레몬을 기념 삼아 챙겼다.

서준의 심성은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예언자란 무릇 불신을 친구삼기 마련이다.

편의점 바깥으로 나오자 후덥지근한 더위가 아직 공기 속을 무겁게 떠다녔다. 그러나 숲과 호수가 근처인 만큼 해가 진 후에는 놀라울 정도로 금방 날이 쌀쌀해졌다. 무더운 공기와 서늘한 바람이 혼재해 등에서는 땀이 나고 팔뚝에서는 오한이 돋는 이상한 공간이었다.

서준은 모자에 눌렸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뜨리며 편의점의 문을 닫았다. 쪼그려 앉았다가 일어난 서준의 오른쪽 어깨에는 묵직한 보스턴 백이 걸쳐져 있었다.

그간 편의점에 제 것처럼 두었던 짐을 빼자 가방 가득 찼다. 그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똑바로 세우는 대신 휘청휘청한 걸음으로 자전거를 향해 걸어갔다. 그놈의 선지자 노릇 하느라 굳이 집에서 먼 캠프장 언저리에서 일자리를 고르다 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덕분에 면허가 없는 서준은 열심히 두 다리를 혹사했다.

자전거에 달린 바구니를 향해 가방을 던지자 기껏 세워 둔 이동 수단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호기롭게 군 게 언제였냐는 듯 소중한 손길로 자전거를 붙잡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편의점 앞 도로에는 가로등이 드문드문하게 세워져 해가 지면 사위가 온통 깜깜해졌다. 그나마 있는 가로등도 고장이 나 불규칙적으로 빛이 들어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그 밑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바라보던 서준이 무심코 입을 벌렸다.

깜빡, 하고 어두워졌다. 깜빡, 하고 불이 들어왔다.

분명하지 않고 어렴풋하던 그림자가 선명해졌다. 처음에는 눈이 대단히 큰 사람, 혹은 안경을 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곤충의 것처럼 둥글게 빛을 반사하는 안구. 서준은 빠르게 인정했다. 착각이었다. 안구가 아니라 방독면의 안구 보호대였다.

가스마스크는 고개를 갸우뚱… 움직였다. 검은 우비를 뒤집어쓴 그의 오른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폭이 좁고 날이 긴 하몽 나이프였다.

목구멍이 바싹 메말라 헐떡거렸다. 서준은 딱딱하게 굳어 숨조차 마음껏 내쉬지 못했다. 그가 나이프의 종류를 알아본 건 캠프장이나 편의점 이름이 하몽이어서가 아니다.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에 등장하는 살인자가 사용하는 살육 도구이기 때문이다.

가스 마스크와 검은 우비, 하몽 나이프. 따로 떼어 본다면 평범한 저 옷차림은 그야말로 호수에 피를 뿌리는 살인마의 현신이었다.

뻣뻣하게 굳은 몸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서준은 눈에 강하게 힘을 주고 앞을 노려보았다. 눈을 비비고 먼 곳도 바라보고 별짓을 다 해도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는 빛 아래에 선 흉물은 틀림없는 연쇄 살인마 가스마스크의 형상이었다.

이건 사실 환시가 아닐까?

아니면 눈을 뜬 채로 헛것을 보는 중이거나…. 만약 그렇다면 서준은 믿지도 않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축축하게 젖어 드는 손바닥과 세게 깨물어 비릿한 맛이 나는 혀가 현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어두워진 하늘, 아직 열기가 고인 아스팔트 바닥, 차갑게 피부를 훑는 바람. 실존하는 감각이 서준을 매섭게 후려갈겼다.

현실 도피에서 실패한 서준은 원망 어린 눈빛으로 연쇄 살인마를 노려보았다.

‘미친 거 아니야? 저 자식은 왜 이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있어.’

원래 각본대로라면, 지금쯤 하몽 캠프장에서 즐겁게 노니는 주인공을 향해 음침하게 칼날을 빛내야 할 시점 아니던가? 하지만 가스마스크가 나이프를 번뜩이는 대상은 서준이었다. 그로서는 몹시 통탄한 일이었다.

운동화를 신은 뒤축으로 아스팔트 바닥을 긁듯이 몸을 움직이자 가스마스크의 목이 천천히 돌아가며 서준을 좇았다. 등에서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가스 마스크 속 얼굴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나 서준은 이미 저 속에 숨겨진 생김새를 알았다. 눈 아래부터 뺨 전체에 얽은 자국이 있는 얼굴을 알았다. 유리알처럼 무기질적인 눈빛이 자신을 향할 것을 알았다.

기억 속 희미한 얼룩처럼 남아 있던 살인마의 낯이 점차 선명해졌다. 사실상 서준이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에서 기억하는 둘뿐인 얼굴이었다.

서준은 가스마스크의 팔을 힐끔거렸다. 우비에 가려져 있지만 요리사답게 팔심이 대단할 터였다. 한마디로 서준이 흉기까지 꼬나든 연쇄 살인마와 싸워 이길 가능성은 턱없이 낮았다.

‘자전거는… 안 되겠군.’

가방을 던져둔 자전거는 평소 도둑맞을까 우려스러워 도난 방지용 강철 케이블을 걸어 두었다. 서준은 속으로 눈물 흘리며 자신의 성실한 성격을 질타했다. 어쩌자고 사람이 이렇게 꼬박꼬박 귀찮은 짓을 빼먹지도 않았을까. 케이블을 푸는 사이 하몽 나이프가 제 넓적다리를 썩둑 가를 게 뻔했다.

땀이 턱을 타고 뚝 떨어졌다. 그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가까운 캠프장으로 도망칠지, 아니면 먼 도로를 따라 마을로 질주할지.

결정을 내리는 시간은 빨랐다. 서준은 빈약한 제 몸뚱이의 수준을 꿰고 있었다. 그는 급하게 몸을 돌려 캠프장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부릅뜬 눈이 시리고 바닥을 박차는 신발 바닥이 뜨거웠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내달렸다.

“으아아아! 아악! 아아악!”

그러나 그도 끔찍하도록 한심한 비명이 제 목구멍을 타고 나오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혀를 깨물지 않는 게 용했다. 한적한 숲의 도로에는 달리는 차도 없었다. 심지어 새 울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뒤에서 따라오는 규칙적인 걸음만이 소리를 냈다.

“씨발!”

여유도 없으면서 고개를 돌린 서준은 빠르게 후회했다. 가스마스크는 일견 느린 듯 보였지만 무척 일정한 간격으로 뛰었다. 문제는 그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손에는 여전히 하몽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서준은 확고한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잡히면 죽는다. 살해당한다. 사지가 조각나 햄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공포가 그의 눈을 가렸다. 워낙 어두워 딴청 부리지 않아야 겨우 지날 수 있던 길이다. 하지만 서준은 방심했으며 덕분에 길목에 단단히 꽂힌 팻말에 몸을 부딪혔다.

“악!”

연신 뒤를 돌아보던 서준의 목구멍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화끈한 고통이 피부 위를 데웠다.

말뚝을 땅에 박아 넣은 팻말은 낡아 빠진 나무판 위에 철판을 덧대고 나사를 조여 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나사가 헐거워졌는데, 서준이 몸뚱이를 가져다 박으니 철판이 완전히 떨어지면서 그의 팔뚝에 긴 자상을 남겼다.

떨그렁, 하고 떨어진 철판이 제자리에서 두어 번 돌다 납작하게 누웠다.

“흐읏….”

서준은 통증에 몸부림칠 시간도 부족했다. 그는 벌건 핏물이 번지는 팔뚝을 부여잡고 야트막한 오르막을 향해 서둘러 뛰어갔다. 서준이 지나간 자리로 피가 떨어져 흔적을 남겼다.

곧 서준의 핏자국이 남은 자리에 가스마스크가 당도했다. 그는 서준이 사라진 어둠을 오래도록 지켜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철판을 들었다.

철판이 벗겨진 나무 팻말은 오랜 시간 풍화되어 붉은 페인트로 무언가 쓰였던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 가스마스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철판의 풀린 나사를 다시 조여 주었다. 곧 팻말에 철판이 겹쳐 고정되었다.

“하몽 캠프장으로 가는 길, 앞으로 오백 미터.”

가스마스크가 팻말을 읽었다. 그의 말은 갈수록 경쾌해졌고, 한적한 도로에 낄낄거리는 웃음이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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