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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영화 속 선지자로 환생했다 (3)화 (3/156)

#003

서준은 트럭을 타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는 자신을 상상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채신머리없는 표정이 걸렸다. 레몬 껍질을 문지르는 손이 더욱 빨라졌다. 그때 다시금 편의점의 문이 열렸다.

“진짜야! 내가 어제 군용 트럭을 봤다고! 제기랄, 정육점 브렌이랑, 어? 내가 가도에서 야밤의 춤을 추는데.”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편의점으로 들어선 청년은 경박한 허릿짓을 선보였다. 그는 턱이 길고 볼이 좁아 어딘가 좀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는데, 실제로 성격도 외모와 비슷했다. 이 쩨쩨한 성미를 받아 주는 건 엇비슷한 무리로, 하나같이 질이 안 좋았다.

천박한 언행과 함께 편의점에 들어온 브래스 스티브, 모범생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동생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리처드 실버, 마지막으로 염색한 금발 티가 나는 골든 케이시. 이 셋을 사람들은 금·은·동 트리오라 일컬었다.

물론 골든, 리처드, 브래스가 듣지 않는 곳에서 암암리에 부르는 별명이었다. 정수리의 색이 진하게 올라온 골든이 브래스의 부스스한 머리통을 세게 내리쳤다.

“이 촌구석에 군대가 오기는 왜 와? 오, 아니지. 아무렴. 오고말고. 우리의 위대한 예언자를 잡으러 왔겠구나?”

보비가 깐족거리며 신경을 살살 긁는 놈이라면, 골든은 보다 난폭했다. 그의 눈동자는 진한 갈색이었지만 햇살 아래에서는 종종 붉은빛으로 보였는데 마침 지금도 그랬다. 골든이 벌건 눈으로 서준의 옷깃을 잡아끌며 낄낄거렸다.

“점쟁아, 오늘 날씨는 어때? 아, 그래도 너무 자세한 예언은 하지 마. 그랬다가 정부가 잡아가서 널 해부할지도 모른다?”

숨통을 죄는 고통에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가 지금보다 어리고 전생의 기억과 현생의 지식을 미처 갈무리하지 못했을 무렵, 서준은 제 환시를 숨기는 데 미숙했다. 덕분에 그는 골든이 아버지의 지갑에서 훔친 돈으로 산 자전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행방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된 적이 있었다.

그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준은 부러진 코에서 올라오는 알싸한 고통을 느끼며 뒤늦게 깨달았다. 이후로 골든과 거리를 두려 노력했지만 어디 그게 혼자 애쓴다고 되던가?

그리하여 서준은 한동안 톰팃톳에서 가장 육중한 무게를 지닌 소년 스테판과 더불어 금·은·동 트리오의 과녁으로 자리를 잡았었다.

다행히 혈관에 피가 들쭉날쭉 끓는 한창때의 청소년기가 지나자 골든의 뇌에도 주름이란 것이 새겨졌다. 지금은 제법 점잖은 관계라고 부를 만했다. 그러나 골든의 심술은 무지개처럼 돌연 떠오르곤 했다.

서준은 텁텁한 입술에 침을 묻히며 골든의 손을 밀쳤다. 건장한 골든의 몸에 비하면 뼈밖에 없는 서준의 힘에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산이나 챙겨.”

나직한 말에는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오한에 뒤에서 연신 낄낄거리던 리처드와 브래스가 문득 편의점 바깥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

쨍하니 밝은 태양 곁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터무니없이 맑은 여름 하늘이었다.

“제기랄, 놀랐잖아!”

브래스가 골든의 옆으로 와 손을 홱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는 큼직한 손으로 하얀 피부에 손자국을 남기는 대신 진열대를 흔들어 물품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난동을 부렸다. 서준이 정리한 보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브래스의 흙 묻은 신발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작신작신 밟았다. 동시에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부었다.

“이 동양의 신비한 점쟁이 새끼! 서커스단에나 들어가지, 여긴 뭐 하러 있어? 아, 그렇지. 혹시 간첩 아니야? 이봐, 본색을 드러내라고.”

“맞아, 이 바나나처럼!”

리처드가 낄낄 웃으며 편의점 외부 매대에 있던 바나나를 가져와 손수 껍질을 깠다. 브래스는 과장스러운 태도로 바나나를 들어 올렸다.

“오, 이 새하얀 속살…. 마치 스테파니의 젖가슴처럼 뽀얗잖아!”

달달한 향을 풍기는 과육에 코를 파묻은 브래스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는 꿈꾸듯 몽롱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훌륭한 젖가슴이었지. 브렌보다 묵직했어. 반면 이 유인원은 빈약하기 짝이 없네. 그러게 골든이 선물한 토마토를 잘 먹었어야지.”

서준은 제 뒤통수로 날아오던 신선한 토마토 몇 알을 떠올렸다. 재깍 피해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아침부터 불쾌한 기분으로 종일 우울했을 터이다. 물론 그가 피한 덕에 보비가 정면으로 맞았지만 그것은 서준이 알 바 아니었다.

“그 돼지새끼의 비곗덩이 이야기는 그만해. 게이도 아니고…. 자전거 잃어버렸던 날 먹은 게 올라오겠어.”

골든이 속이 불편하다는 듯 헛구역질을 해 댔다. 서준은 제발 그가 얌전히 소화제나 사길 바랐다.

“가엾은 골든! 비위가 약해서 몸에 좋은 것만 먹는다니까. 그런데 이 편의점에는 기껏해야 멍청이 얼굴이 나온 우유밖에 없잖아. 손님 대접을 이따위로 해도 되는 거야? 네 미간을 맞혀 버리는 수가 있어? 어!”

욕설이 점차 편의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무래도 골든의 의붓어머니가 한국인인 걸 뒤늦게 생각해 낸 모양이었다.

총 쏘는 시늉을 하던 브래스가 보비의 얼굴이 프린트된 우유갑을 바닥으로 던졌다. 퍽, 터지며 흰 우유가 바닥 틈새로 서서히 스며들었다. 서준은 바닥 청소를 할 생각에 머리가 다 아팠다.

그가 음울한 시선으로 대걸레를 떠올릴 때였다. 편의점 입구에 긴 그림자가 늘어지고, 망연한 목소리가 고장 난 축음기처럼 볼품없이 흔들렸다.

“이, 이게 다 뭔가요?”

서준과 마찬가지로 새빨간 모자와 조끼를 껴입은 점장, 프레드 프랭크였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콧수염을 신경 써서 기른 모습은 마치 한 세기 이전의 익살꾼처럼 보였다.

프레드는 허우적거리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에는 점주이면서 편의점에 자주 오지도 않는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점장님….”

서준은 혀를 차며 프레드를 불렀으나 그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프레드는 떨리는 손으로 콧수염을 매만졌다.

“다, 당장 나가! 내, 내가 가꾼, 나만의 나무랄 데 없는 편의점에 무슨 짓을!”

솔직히 프레드는 편의점에서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서준에게 약간의 월급을 주는 게 전부였다. 서준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프레드의 절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평균 손님이 열 명도 안되는 편의점이면 시급 알바생에게도 나무랄 데 없는 편이지.’

서준은 안쓰러운 눈으로 프레드를 바라보았다. 하몽 편의점의 점주 프레드는 제법 몸집이 좋고 나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들거리는 목소리와 희뿌옇게 습기가 차는 안경, 고상하지 못한 생김새는 건달에게 무한한 활력을 돋우는 재료에 불과했다.

브래스는 한층 더 신이 나 프레드의 코앞에서 지껄였다. 그는 바나나를 바닥으로 내던져 발로 짓뭉개며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띠었다.

“오, 죄송합니다. 점장님. 하지만 내가 턱이 돌아가기 전까지는 도저히 이 편의점을 ‘훌륭하다’고는 도저히 말하지 못하겠네요.”

“미친놈아, 네가 이 편의점 보고 훌륭하다고 하면 내 동생은 외계인이다.”

리처드가 브래스의 조롱에 입을 보탰다. 점장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고 콧수염 끝이 파르르 떨렸다. 비웃음을 듣다못해 그가 단호하게 외쳤다.

“더, 더 난동을 부린다면 경찰을 부르겠네!”

점장의 으름장에 골든의 어깨가 바짝 섰다. 골든의 친부가 경찰이라는 사실을 프레드가 알건 모르건, 참으로 적절한 경고라 말할 수 있었다. 골든이 침을 퉤 뱉었다.

“…가자.”

골든의 명령에 따르면서도 리처드와 브래스는 마지막까지 야유를 날렸다. 끈질긴 브래스의 우롱을 한쪽 귀로 흘리며 서준은 고심했다.

‘저놈들, 대체 왜 왔던 거야?’

편의점이니 무언가 사려고 왔을 테지만 하필 직원과 손님의 관계가 매끄럽지 못한 결과였다.

“프레드, 괜찮아요?”

“킁, 흠….”

프레드는 콧수염에 콧물이 묻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코를 풀었다. 그는 코 묻은 손수건을 주머니에 쑤셔 박으며 벌겋게 달아오른 눈을 깜빡거렸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도 좋아요. 킁.”

“와, 정말요?”

“물론 저걸 다 치운 다음에.”

“…….”

편의점 바닥은 온갖 잡기와 우유, 뭉그러진 바나나가 흙발로 짓밟혀 엉망이었다. 화룡점정은 골든의 침이었다. 서준은 금·은·동 트리오가 남기고 간 참상과 훌쩍훌쩍 코를 킁킁거리는 점장을 보며 요란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방의 날은 기쁘기는커녕, 평소보다 피곤했다.

편의점을 망치는 사악한 존재들이 떠난 후에도 점장 프레드는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그는 감정을 숨기는 데 미숙한 면모가 있었다. 허옇게 김이 서린 안경을 옷자락으로 문지르며 연신 투덜거렸다.

“저런 못되고, 천벌받을 녀석들 같으니. 서준, 앞으로도 같은 일이 벌어지면 경찰을 부르도록 해요!”

경찰이 이 외진 숲길까지 올 시간에 악동들은 온갖 난장을 피우고 유유히 떠날 것이다…. 그러나 서준은 언젠가 같은 안경잡이 동지로서 가졌던 동질감을 발휘해 부러 현실을 꼬집어 알려 주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콘택트렌즈라는 신문물을 접한지라, 이제 프레드에게 동료 의식이라는 안온한 인심이 한 치도 남지 않았다. 그는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가짐이 남다른 인간이었다.

하지만 서준의 각박한 심성 따위가 갈대처럼 흔들리건 말건, 그와 프레드의 관계는 그대로였다. 즉 프레드는 고용주이자 갑이었고, 서준은 노동자이자 을이었다.

을은 쓸쓸히 편의점 창고에 길게 누워 있는 대걸레를 가져왔다. 바삐 움직이는 서준의 근처에서 얼쩡거리던 프레드가 둥그런 안경을 쓰며 주절거렸다.

“나도 도와주고 싶지만, 오늘은 일이 있어요.”

“예에.”

아무렴, 어련하실까. 서준도 말뿐이라면 얼마든지 월급을 받지 않고 무상 노동 할 수 있는 인재였다. 말재간이 모자란 프레드가 변명하듯 몇 마디 더 내뱉었다.

“정말이에요. 형이 일손이 부족하다고 도와 달라는데 동생이 무슨 힘이 있겠어요?”

“저는 외동이라 잘 모르겠어요.”

청소를 도와주기는커녕 더럽혀진 바닥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한없이 방해만 되었다. 서준은 그가 얼른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프레드의 멋진 수염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프레드도 면허를 땄죠?”

“예? 킁, 면허야 당연하죠. 멀리 나가려면 차가 필수라고요.”

프레드가 편의점의 부연 문 바깥을 가리키며 목을 움직였다. 하긴, 차가 없으면 이 구석진 곳을 어떻게 오가겠는가. 누구처럼 연식 있는 자전거라도 굴리지 않는 한 자동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보통이었다. 당장 크리스티나의 일행만 해도 요한이 운전대를 잡았다.

서준은 그들이 타고 사라진 6인승 밴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저도 이번에 면허를 따려고요. 학원도 알아봤어요.”

“면허? 하긴, 서준도 그럴 나이군요.”

프레드가 이해한다는 얼굴로 서준의 흐릿하니 표정이 모호한 눈매나 제법 사내다워진 길쭉한 팔다리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한껏 점잔 빼는 투로 말했다.

“원한다면 공부를 도와줄까요? 난 꽤 여러 주를 돌아다녔답니다.”

“아, 괜찮아요. 필기는 틈틈이 공부했고. 게다가 제가 운전하고 싶은 건 트럭이거든요.”

“트럭?”

오래 묵은 꿈이 다소 엉뚱하게 들렸는지 프레드가 되물었다. 서준은 그저 곧 손에 거머쥘 자유가 눈꺼풀 안쪽에서 어른거렸다. 그래서일까, 서준은 부모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은밀한 계획을 털어놓았다.

“네. 면허를 따면 트럭을 타고 여행할 생각이에요.”

“여행?”

서준이 목을 움직여 긍정을 표현했다. 입 바깥으로 내보내자 어딘가 후련하면서도 뒤숭숭한 기분이 스멀스멀 발밑에서 올라왔다.

‘이런 게 어른이 된다는 걸까.’

전생의 나이까지 더하면 진작에 어른이 된 영혼이 가당찮은 생각을 하며 뺨을 긁적거렸다. 오금까지 기어오른 불안을 무시하며 서준이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이제 편의점 일도 그만두려고요. 이번 달 말까지만 나올게요.”

“아니, 그렇게 갑자기?”

프레드가 놀라 허둥거렸다. 그는 서준이 톰팃톳을 떠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한 얼굴이었다. 서준이 마저 바닥을 박박 닦는 와중에도 프레드는 마치 길 잃은 미아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건장한 중년 남성에게 어울리는 묘사는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이 그만큼 절박했다.

비릿한 우유 냄새에 코를 씰룩이던 서준이 걸레질을 멈추고 자루에 턱을 얹었다.

‘말 잘 듣는 노비는 이만 떠난다. 잘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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