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0. 불길한 경고
공화당 지지자만큼이나 새빨간 유니폼 조끼를 입은 청년이 음료 진열대 앞에서 턱을 쓰다듬었다. 그는 수염 한 올 나지 않은 매끈한 턱을 매만지며 침음을 흘렸다. 이 난잡하고 복잡스러운 진열 표를 어떻게 정돈해야 할까.
유통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우유는 앞줄에 두어야 마땅하나, 하필이면 패키지에 꼴도 보기 싫은 보비의 면상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낙농업계의 붉은 초신성, 페니 앤 파운드 목장의 우유는 톰팃톳을 주름잡았다. 당연히 하몽 편의점도 새빨간 풍선이 그려진 파운드 밀크를 들여놓았다. 파운드 밀크는 맛이 고소하고 진해 주민들에게 무척 인기가 많았다. 무엇보다 가격이 낮았다.
그런데 이 페니 앤 파운드 목장의 주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우유 홍보 모델을 모집했다. 서준으로서는 무척 불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필이면 보비가 당첨될 건 뭐란 말인가? 서준은 빨간 풍선을 들고 활짝 웃는 보비가 참으로 꼴도 보기 싫었다.
무릇 훌륭한 직원이라면 자신의 사심을 일과 엮어서는 안 될 일이었으나 바로 이곳, 미국 캘리포니아 구석에 박힌 작은 촌 동네 톰팃톳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편의점 점주인 프레드 프랭크조차 매점을 등한시하며 얼굴을 가끔 비추는 와중에 정직원조차 아닌 서준에게 대단한 애사심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는 빠르게 마음을 정했다. 좋아, 보비의 얼굴을 옆으로 돌리자.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보비 톰슨이 사라지자 보이는 것이라곤 작은 숫자가 빼곡히 적힌 지루한 영양 성분 분석표였다. 서준은 물기 어려 축축한 우유갑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손을 털었다.
오늘따라 한층 더 구질구질한 편의점에서 사소하게나마 느낀 긍정적인 변화였다. 비록 라텍스 장갑을 낀 손바닥에서 고무가 마찰하는 소리가 나 귀를 괴롭혔지만 이만하면 이득이다.
외진 길가에 덩그러니 선 편의점은 서준에게 제법 쏠쏠한 용돈을 안겨 주었다. 입이 삐뚤어져도 훌륭한 일자리라고 주장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루 평균 손님이 채 열 명도 되지 않아 한가한 것은 부정하지 못할 장점이었다.
서준은 오랫동안 쭈그리고 앉아 저리는 다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동자가 시곗바늘을 좇았다. 부옇게 흐린 문 위에는 둥근 벽시계가 걸려 있었는데, 약이 다해 멈춘 지 엿새가 지나갔다. 점장인 프레드가 고치라고 하기 전까지 회색 먼지가 끈적하게 달라붙은 시계를 만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므로 시계는 여전히 멈췄을 때와 마찬가지로 12시에서 3분이 남은 시각을 가리켰다. 그것은 공교롭게도 지금의 진짜 시간과 같았다. 서준은 왼쪽 손목의 디지털시계를 힐끔거렸다.
곧이다.
곧 그들이 온다.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서둘러 장갑을 벗어 땀이 고인 손바닥을 조끼에 문지르며 계산대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캠프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유일한 편의점을 그들이 지나칠 리 없었다. 서준은 그들의 다소 방만하고 부주의한 성미를 잘 알았다.
그리고 그가 확신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그는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곳에 올 것이다.
디지털시계의 숫자가 바뀌었다. 다시 장갑을 꼈다. 평소라면 갑갑한 기분이 들었겠으나 오늘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11시 58분. 서준의 눈이 깜빡이지도 않고 흠집이 난 시계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수십 초가 지나 11시 59분. 벌겋게 실핏줄이 뜬 눈동자가 굳게 닫힌 문을 향했다. 흐릿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마침내 태양이 표준 자오선을 지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손목시계가 일정한 알람음을 보내는 것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끄트머리가 마모된 문은 생김새와 달리 거친 소음을 일으키지 않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러게, 진작 마트에서 사자고 했잖아.”
가장 먼저 들어온 사람은 누구보다 눈에 띄는 크리스티나였다. 색이 진한 금발이 등을 덮었고 머리에 느슨하게 걸친 파란 선글라스가 아직 십 대인 그녀를 한층 성숙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반면 오른쪽 뺨에 조금 흩어진 주근깨는 어린아이처럼 귀여웠다.
크리스티나의 불균형적인 외양은 서준에게 일종의 확신을 안겨 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불신을 종식했다. 크리스티나의 뛰어난 미모는 어딜 보아도 틀림없는 주인공감이었다.
곧이어 두 번째 등장인물이 나타났다.
“뭐 어때. 편의점 왔으니까 괜찮잖아. 그리고 맥주는 차가워야 제맛이지.”
타박을 가볍게 받아치며 개구지게 미소 짓는 크리스티나의 친구 에어리였다. 그녀가 웃자 쾌활한 목소리가 편의점 안을 가득 채웠다.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에어리는 하얀 탱크톱에 허벅지를 겨우 덮은 짧은 바지, 가벼운 원단으로 만든 시원스러운 여름 점퍼를 걸쳐 활동적인 인상을 풍겼다. 긴 청바지에 반소매 셔츠를 걸친 무던한 크리스티나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차림새였다.
에어리가 뒤를 돌아보며 밝게 웃었다.
“그나저나 여기 편의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요한. 여긴 솔직히 좀, 구석이잖아.”
요한의 이름이 들리자 서준이 남몰래 침을 삼켰다. 요한 젠틸, 194센티의 쿼터백. 작은 촌 동네 톰팃톳에서 그를 모르는 청년은 없었다. 물론, 아리따운 크리스티나 또한.
요한은 편의점을 들어오며 고개를 약간 숙였다. 그는 에어리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서준과 눈을 마주쳤다. 찰나에 불과했으나 참으로 반갑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 바다처럼 어두운 푸른색 눈동자는 서준의 바람대로 그를 외면하는 대신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오늘도 일하는 거야? 성실하네.”
요한의 목소리는 우렁우렁하니 컸다. 성량이 워낙 좋은 탓이리라. 덕분에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던 보비와 윌리엄, 먼저 편의점에 발을 들인 크리스티나와 에어리의 시선이 몽땅 서준을 향했다. 학교의 인기인들이 서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라보는 광경은 제법 끔찍했다.
참고로 서준은 그 인기인이라는 라벨 사이에서 보비를 제외하고 싶었으나 빌어먹을 파운드 밀크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파운드 밀크 덕분에 보비는 정말로 유명 인사 반열에 들어 버렸다. 서준은 앞으로 두 달은 파운드 밀크를 마시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반면 서준과 달리 냉장고를 비롯해 냉동고까지 파운드 밀크로 꽉 채웠을 보비 톰슨이 버릇없이 사람 코앞에서 손가락을 세웠다.
“뭐야, 너 여기서 일해?”
보비는 왜소한 어깨를 한껏 펼치고 목을 길게 뺐다. 아마 미래의 미식축구 선수인 윌리엄과 교내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요한 사이에서 가능한 한 풍채가 좋아 보이도록 고심한 모양이겠으나, 선천적인 뼈대와 살집의 영향으로 그의 자세는 목도리도마뱀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목도리도마뱀도 사람을 물 수는 있다. 서준은 제 낯짝이 부디 멀쩡하길 바라며 낮게 대꾸했다.
“어.”
“손님한테 뭐 하자는 말버릇이야? 아니, 아니지. 잘 어울린다.”
크게 대거리를 하려던 보비가 여자아이들의 눈치를 보더니 방향을 선회했다. 그는 구태여 서준의 어깨를 툭 치기 위해 계산대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서준은 인상을 쓰며 보비의 손등을 쳐 냈다. 근육이 부족하기로는 둘 다 비슷했으나 체격은 서준 쪽이 월등히 컸으므로 보비가 금방 우는 소리를 냈다.
“아야! 손님한테 무슨 짓이야?”
“토마토 냄새가 나잖아. 너 어제부터 안 씻었지?”
“뭐, 무, 뭣!”
보비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바로 하루 전 그는 오늘처럼 서준을 골탕 먹이려고 다가오다가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참이었다. 졸지에 더러운 놈이 된 보비는 주변을 살피다가 애써 웃었다.
“난 누구와 달리 호수에 가서 놀 거거든. 어차피 물에 몸을 담글 거라 이 말이야. 그나저나 이 좋은 날에 일하는 모습, 좋네. 평생 여기서 일이나 하지 그래? 아니면 마침 네 하나뿐인 친구 스테판이 홈쇼핑 채널에 열을 올린다던데 차라리 그런 데 도전하든가. 어쨌든 우리처럼 즐겁게 노는 건 꿈도 못 꾸겠지만. 아, 티나! 캠프장에 가서 입을 수영복 챙겼지? 섹시한 걸로.”
“헛소리 그만해, 보비. 정 섹시한 수영복을 원하면 네가 입어. 그리고 너 정말 어제부터 안 씻었어?”
“우리한테 가까이 오지 마, 보비. 그리고 넌 뒷좌석, 아니지. 트렁크에 타.”
“비, 비꼰 거야. 크리스티나, 에어리!”
에어리가 중지를 세워 보비에게 흔들었다. 그러나 일주일은 내리 방방 날뛸 것처럼 굴던 보비는 곧 투정을 멈추고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뭘 생각하는지야 뻔했다. 힐끔힐끔 서준을 훔쳐보는 면상에서 숨기지 못한 흥분이 드러났다.
학교의 마돈나 크리스티나와 교내 치어리더 중 가장 섹시한 에어리, 앞날이 창창한 윌리엄과 모든 것이 완벽한 요한 사이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자부심이 줄줄 흘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지 못한 서준을 향한 비웃음이 보비의 얇게 치뜬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하지만 서준은 진심으로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미래가 아직도 눈에 선하므로.
얼간이를 위해 준비된 미래를 곱씹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성을 내 어쩌겠는가. 여자한테 치근거리는 머저리의 역할은 늘 그렇듯 길지 않았다.
보비의 태도에 질린 크리스티나와 에어리가 맥주와 과자를 한 아름 가져와 계산대에 올렸다. 아무래도 빨리 계산하고 얼간이를 챙겨 사라지려는 모양이었다.
“바비큐 꼬챙이는 챙겼어.”
“랜턴 건전지가 부족하지 않을까?”
“새거니까 이거면 충분해. 캠프장에도 비상용이 있을 거고.”
요한과 윌리엄이 떠드는 사이, 서준은 현란한 손길로 바코드를 찍었다. 보비가 은근슬쩍 밀어 둔 염병할 파운드 밀크도 계산했다.
“전부 56달러 31센트입니다.”
“준아, 추천하는 담배 있어?”
“…….”
요한의 친근한 부름에 다시금 편의점 내의 시선이 서준을 향했다. 장신의 남자는 계산대에 팔을 얹고 턱을 괬다.
거대한 몸뚱이를 볼품없이 구기고 있으니 꼴사나워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마치 무해한 강아지처럼 요령 있게 쭈그려 앉는 방법을 알았다. 서준은 피부가 따끔거리는 걸 무시하며 제일 맛없다고 소문난 담배를 한 갑 꺼냈다.
“11달러.”
요한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냈다. 옆에서 바가지 아니냐고 보비가 구시렁거렸으나 어디 가격을 서준이 매겼던가.
서준은 잽싸게 영수증을 끊어 주었다. 그러고는 영수증과 레몬을 내밀었다. 요한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물었다.
“이게 뭐야?”
“이건 레몬이라고 하는 과일이야. 매우 시지.”
“그렇구나. 이건 레몬이라고 하는구나? 내가 모르던 걸 알려 줘서 고마워.”
시답잖은 대답이나 하던 요한이 제 손에는 과장 좀 보태어 개암처럼 작은 과일을 굴렸다. 그의 진득한 눈빛은 제법 부담스러웠다. 서준은 억지로 머리를 쥐어 짜냈다.
“담배 패키지 보이지? 그런 서비스야. 레몬과 함께합니다, 레몬 시가. 레몬 시가.”
“그렇구나.”
담배를 뜯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구겨 넣던 요한이 서준을 향해 말했다.
“준아, 우리 캠프장 가는데 같이 갈래? 여기 손님도 없잖아. 온종일 멍하니 서 있느니 우리랑 놀자.”
“뭐?”
사실 적시도 때론 죄가 되는 법이거늘 요한이 겁도 없이 현실을 꼬집었다. 요한의 제안에 놀란 건 서준만이 아니다. 크리스티나와 에어리, 윌리엄을 비롯해 보비가 펄쩍 뛰었다. 그는 새된 목소리로 요한을 말렸다.
“무슨 말이야, 요한! 저, 저 녀석은 룸펠슈틸츠헨 베이비도 아니라고!”
한마디로 동네 토박이가 아니라는 뜻이다. 서준은 보비를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의 눈빛과 다른 사람의 시선이 비슷해 크게 티 나지 않았다.
게다가 베이비라니! 서준도 이 나이에 ‘베이비’가 되고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크리스티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배려심을 비롯해 이것저것 부족한 보비를 대신해 사과했다.
“미안해, 준. 그리고 요한 말대로 우리랑 같이 놀지 않을래? 물론 네가 편의점 일을 쉴 수 있다면 말이야.”
크리스티나는 요한과 달리 편의점에 파리만 날리는데 거리낄 게 없잖으냐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준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는 요한의 얄미운 말도, 크리스티나의 다정한 제안도 거절했다.
“아니. 난 가지 않아.”
거절만 하지 않았다. 서준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희도 조심하는 게 좋아. 저 흐린 하늘에서 피가 내리고, 호수가 요동치면서 제물을 찾아 헤맬 거야. 갈고리에 꿰인 돼지가 겨우 도망친 곳에서 여러 발이 달린 축축한 것이 다가오면 노란 과실을 던지는 걸 추천해. 가장 좋은 건 하몽 캠프장에 가지 않는 거야. 생명의 찬란함, 고귀함, 찬연함을 구태여 깨닫기엔 젊은 나이잖아?”
서준의 길고 긴 대사가 끝나자 편의점을 찾은 손님들 얼굴이 하나같이 가관이었다.
“서준, 잠꼬대하는 거 아니지? 눈 좀 떠 봐.”
상냥한 크리스티나가 먼저 걱정을 했다.
“오늘 날씨 맑은데?”
에어리는 편의점 바깥을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거 봐, 이 새끼 이런 이상한 놈이라니까! 제가 사이비 초능력자인 줄 아는 자식!”
보비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성난 발걸음으로 친구들의 등을 떠밀었다. 처음에는 보비의 행동을 지적했던 크리스티나나 에어리도 짐을 챙겨 서둘러 편의점에서 나갔다.
요한만이 기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서준은 양 손바닥만 팔락거렸다. 얼른 꺼지라는 눈빛도 열심히 쏘아 보냈다. 서준은 결코 크리스티나의 일행에 속하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녀와 연관되다니 절대로 안 될 말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1999년 개봉해 극장에 채 일주일도 걸리지 못하고 망한 공포 영화, 《피 흘리는 호수의 살인마》 속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