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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30)화 (130/130)

130화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뭘 가져왔나 했더니 나무 열매인 게 웃겼기 때문이다. 레이먼은 이런 식으로 니키엘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선물을 안기는 재주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간 받은 게 너무 많다 싶었다.

“또 귀한 걸 가져오셨군. 아침은 나와 같이 드는 게 어때.”

“아….”

나뭇잎에 쌓인 서치베리를 소중히 든 덩치 큰 미남자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굳어 버린 것도 꽤 보는 맛이 있었다. 생각보다 숙맥인 듯해 다시금 피식 웃은 니키엘이 폴에게 자리를 하나 더 마련해 달라고 말했다.

니키엘이 그런 명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자리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던, 일 잘하는 시종인 폴 덕분에 레이먼은 금세 니키엘의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이것은 제가 얼른 접시에 담아 다시 내오겠습니다.”

폴이 레이먼에게서 서치베리를 받아 가려 하자 니키엘이 만류했다.

“됐어. 보아하니 레이먼이 직접 냇가에서 일일이 열매를 씻어 온 듯한데. 그렇지 않아?”

“…예, 맞습니다.”

귓등이 붉어진 채로 레이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폴이 슬쩍 웃음을 감추며 접시를 가져와 서치베리를 담기만 하자 간단히 준비한 아침이 꽤 훌륭한 식탁으로 변모했다.

레이먼은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더니 자두 알만 한 서치베리의 꼭지 부분을 딴 뒤, 열매에 둥글게 칼집을 내고는 아래와 위를 비틀어 뚜껑을 열듯 열매를 쪼갰다. 그런 다음 단도로 씨앗을 톡 쳐 빼내더니 과육만을 니키엘의 접시 위에 얹어 주었다. 수려한 외양과는 다르게 투박하고 굵은 손가락 위로 흑요석 같은 겉모양과 다르게 새빨간 열매의 과즙이 흘렀다. 레이먼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단정하게 말했다.

“이맘때 가장 맛있는 열매입니다.”

“아, 그러게. 레이먼이 이런 열매들은 빠삭하겠어.”

아무래도 채식만 하는 사람이니 이런 열매 류에는 통달했을 것이다.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주억거리자 레이먼이 좀 전보다 살짝 더 진한 웃음을 지었다. 매력적인 웃음이라 니키엘은 잠시 그의 입꼬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서풍신처럼 바람을 잘 피운다더니, 싸가지없게 굴 때는 몰랐는데 다정이 넘치네. 저러니 다들 빠지지.’

니키엘은 새로 발견한 사실이 흥미로워 픽 웃으면서 과육을 손으로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한 번 씹자마자 터지는 과즙에 니키엘은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

“입에 맞으십니까?”

레이먼이 웃으며 물었다. 그는 능숙하게 손질한 서치베리 과육을 니키엘의 앞접시에 수북이 쌓아 놓고 있었다. 니키엘은 레이먼에게도 먹으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안에 들어온 서치베리가 주는 기쁨에 상대에게 권하는 예의도 잊은 채로 씹기 바빴다.

톡톡 터지는 식감은 물론 씹을 때마다 터지는 과즙에 기뻐하며 하나에서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서치베리를 입에 넣는 바람에 손가락 끝이 붉게 물드는 것은 물론 입술도 빨갛게 변했다. 레이먼이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흠, 하고 목을 울리다가 폴을 향해 말했다.

“전하께서 쓰시는 영견을 가져오거라.”

“예, 각하.”

폴이 레이먼의 명에 깨끗한 영견을 가져오자 레이먼이 그를 받아 들어 니키엘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수발에 타인과의 접촉에 예민한 편인 니키엘조차 레이먼의 행동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서치베리를 집어 들 뿐이었다. 이에 지켜보던 폴의 눈썹만 하늘 위로 치솟고 있었다.

니키엘은 기억을 잃고 깨어난 뒤로 전처럼 패악을 부리는 일이 없었지만, 오히려 옆에서 챙겨 주는 이들의 손을 귀찮아하게 되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인데 부러 챙긴다며 간혹 표정을 굳힐 때도 있는데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폴은 놀랐지만 존귀하신 두 분의 일에 참견할 수 없어 입을 다물었다.

레이먼은 제 앞에 앉아 입술을 열심히 오물거리는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며 과도를 놀렸다.

잠이 살짝 덜 깬 듯 평소보다 부어 있는 얼굴이 자못 사랑스러웠다. 막사에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에도 제 역할을 다하겠다는 듯 반짝거리는 백금발 몇 올이 귀한 수정처럼 반듯하게 깎여 있는 이마 위로 내려와 있었는데, 그 때문에 간지러운지 니키엘은 연신 코를 찡긋거렸다. 그 표정이 니키엘의 날카로운 인상을 중화시켜 그를 봄의 숲을 헤매는 요정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지카리보다 살짝 작은 키라 한들 오시니스 남성의 평균 신장을 웃도는 니키엘이지만 무척 선이 가늘어 꼭 아주 얇은 펜 선으로 정성 들여 그린 그림 같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런 미인이 눈앞에서 제가 깎아 준 열매를 오물거리며 삼키고 있는 광경이라니.

레이먼은 자신이 뻔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꼭 하룻밤을 같이 보낸 뒤 밤사이 자신 때문에 고되었을 상대에게 열량이 높은 음식을 챙겨 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정말 그러했다면…. 다음 날 아침에 저리 평온히 계실 수 있는 선에서 멈출 자신은 있었고?’

레이먼이 자문과 자조를 동시에 반복하는 순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서치베리 한 알이 그대로 터져 버렸다. 무의식중에 주먹을 너무 꽉 쥔 듯했다. 서치베리에 빠져 과일을 집어 먹고 있던 니키엘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먼, 그렇게 꽉 쥐면 그 연약하고 부드러운 것이 터져 버리지 않나.”

“아…. 죄송합니다, 전하.”

레이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니키엘에게 사과했다. 연약하고 부드러운 것….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꽉 쥐었던 손을 펴 보니 과즙이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니키엘이 피식 웃으며, 아침이라 살짝 졸았던 거 아니냐며 농담을 건네려던 순간이었다.

레이먼이 새빨간 과즙에 젖은 손가락 사이를 내민 혀로 핥았다. 그와 마주 앉아 있던 니키엘의 시야에는 과즙이 질척하게 묻은 검지와 중지 사이를 핥고 있는, 서치베리의 과즙과 똑같이 붉은 혀가 정확히 보였다. 니키엘은 바지런히 움직이던 턱을 저도 모르게 멈춘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열매가…. 달군요.”

“어…? 아, 음…. 그러게. 무척 달고 맛있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은 것이 민망하여 헛기침을 두어 번 할 수밖에 없었다. 목덜미가 붉어지는 것 같아 손으로 문지르려는데, 레이먼이 그의 손을 잡아챘다.

“무슨….”

“손에 묻은 것이 목덜미에 옮겨 묻을까 봐 급히 만류했습니다.”

사심은 없는 접촉이라는 듯, 레이먼이 불시에 손을 잡았던 것처럼 빠르게 니키엘을 놔주었다. 니키엘의 귓등이 서치베리의 과즙처럼 붉어졌다. 니키엘은 이후, 아무런 말도 없이 전투적으로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 레이먼도 그런 니키엘에게 더 말 붙이지 않았고, 그저 남은 열매들을 손질해 놓아 주기 바빴다.

그렇게 같이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치베리 몇 알을 먹은 걸 제외하고는 다른 음식에는 손대지도 않은 레이먼이 내도록 니키엘의 식사 수발을 챙겼던 기묘한 아침이 끝났다.

평소보다 배가 훨씬 불러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니키엘이 가만히 테이블 위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아니, 나만 먹은 듯한데?”

레이먼이 웃으며 대답했다. 방금 전처럼 찐득거리는 구석 없이 상쾌하기만 한 미소였다.

“배는 저도 부릅니다. 그보다,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행군 준비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해서요.”

“어어! 바쁜 사람인데 여태껏 붙잡아서 미안해. 얼른 가 봐.”

니키엘이 놀라 레이먼에게 손을 흔들었다. 막사를 나가려던 레이먼이 그런 니키엘을 돌아보며 잠시간 말없이 서 있었다. 뭔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 보자, 레이먼이 살짝 묵례한 다음 막사를 나섰다. 그의 등을 멍하니 보고 있던 니키엘이 그제야 깨달은 듯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아침 식사에 시간을 너무 소비했잖아. 우리도 준비하자고.”

“짐은 다 싸 뒀습니다.”

“폴, 넌 정말 유능해…. 현대 한국에 태어났어도 성공할 사람이라고.”

폴이, ‘항쿡?’ 하며 되묻는 것에는 대답도 해 주지 않은 니키엘은 서둘러 이를 닦았다. 과즙이 워낙 붉어 치아까지 빨갛게 변색되는 건 아닌가 했는데 그건 또 아니라 다행이었다. 대신 과즙에 입술이 물들어 평소보다 빨갛게 변한 탓에 그게 영 신경이 쓰였다.

“이거…. 입술이 너무 붉지 않아? 꼭 쥐 잡아먹은 듯이….”

“서치베리 열매를 드셨다 하면 다들 이해하실 겁니다. 입술이 붉어지는 과일이라서요.”

폴이 짐을 정리하다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어쩐지 놀림감이 된 듯해 니키엘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라갔다.

“정말이야? 이상해 보이는 거 아니고?”

“아니요, 평소보다 피부가 고와 보이시는 것 외에는 하등 문제없습니다.”

피부가 고와 보인다고?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행군을 위해 차림을 정돈한 뒤, 막사를 나섰다. 폴이 종자들에게 막사를 철거해도 좋다고 말하는 사이, 니키엘은 말들을 매어 둔 곳으로 향했다.

백록 기사단이 그런 그를 주시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들은 덩치가 커다란 어른들답지 않게 구석에 숨어 수군덕거렸다.

“아까 볼트윅 각하께서 전하의 막사에서 나오셨잖아. 다들 봤지?”

“아침 일찍부터 말이야.”

그들은 심각한 얼굴로 투구를 맞대고 토론이라도 하듯 쑥덕댔다.

“게다가 저 입술을 봐. 서치베리를 드신 게 틀림없어.”

“그건 침대 위 연인들을 위한 과일이라고!”

서치베리는 열량이 높고 비타민이 풍부해 피로 회복에 좋았다. 레이먼은 서치베리에 그런 별명이 붙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의도보다는 아침 산책을 갔다 오는 길에 발견한 서치베리의 알이 무척 굵고 싱싱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그저 니키엘의 피로를 풀어 주고 싶어 따 왔을 뿐이었다.

제 가신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역시, 우리 각하셔. 다른 분들은 넋 놓은 아침에 전하를 공략하시다니.”

“암, 라시리스의 서풍신이라는 별칭이 그냥 붙은 건 아니지.”

백록 기사단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처럼 뿌듯한 얼굴을 한 채 아침부터 바지런히 제 할 일들을 하는 검은 가시 기사단들과 마법사단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뿌듯함이 섞인 비웃음을 본 나머지 기사단들의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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