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니키엘은 알레윈이 안내한 곳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소드마스터이니 자체적으로 상처를 빠르게 치유할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제가 나서고 싶었다. 아까 전 마음먹은 바도 있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차츰 늘려 가고 싶었던 것이다.
이번 토벌에서는 신성력으로 수장들을 치료하여 치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들의 부담을 덜어 주고, 오늘처럼 마물들의 행동을 분석한 생태학을 연구하여 마물 소탕에 도움을 주면 될 것 같았다.
니키엘은 꽤 산뜻한 기분으로 검집을 휘둘러 제 허벅지까지 오는 수풀을 걷어 냈다. 알레윈이 가리킨 방향으로 쭉 걷다 보면 물소리가 들린다고 했으니 의심하지 않고 걷는 중이었다.
그렇게 검집으로 장애물을 대충 치우며 걷다 보니 정말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침 토벌단이 휴식을 취하기로 한 곳이 물과 가까워 다행이었다. 병사들이 식사를 만들고 휴식하는 것에 무리가 없을 듯하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져 가볍게 걷고 있는데, 니키엘의 배꼽 위까지 오는 수풀이 있었다. 그걸 그대로 손으로 헤쳐 가며 앞으로 걸어 나가던 참이었다. 니키엘의 시야로 계곡이 펼쳐졌다.
“오, 계곡이 여기에….”
그리고 예상치 못한 광경 역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
“…….”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어쩌면 호흡도 멈췄는지 모르겠다. 충격적인 광경 때문에 다른 반응을 하기 어려웠다.
헐벗은 채 물에 젖은 머리를 넘기고 있는 율란을 본 것이다. 니키엘은 놀라 헉, 숨을 삼켰다.
그는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다 말고 갑자기 등장한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다행인 점은, 수위가 낮은 편은 아닌지 찰랑거리는 물결이 율란의 장골 아래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니키엘을 바라보는 율란은 네가 왜 거기서 나오냐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니키엘은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선이 아래로, 또 아래로 향하는 걸 막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몸이 좋은 건 알았지만 상상 이상이었다. 굵은 봉처럼 매달려 있는 율란의 쇄골에 고여 있던 물이 그대로 미끄러져 두툼하게 융기된 가슴팍과 정확히 구획이 나뉘어져 있는 복근을 지나 배꼽 아래 거뭇하게 그림자가 진 듯한….
“…으악!”
“…놀라는 게 너무 느리다고 생각하진 않으십니까.”
율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니키엘의 비명에 화답했다. 니키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그의 시선은 율란의 조밀한 삼각근과 톱니바퀴처럼 튀어나온 전거근을 헤매고 있었으니까.
니키엘 역시 그런 자신의 반응이 이상하긴 했다. 그러나 시야를 통해 들어온 자극을 대뇌가 계속해서 수용 중이었다는 게 문제다. 망막에 맺히는 상으로 아예 사진까지 찍을 기세였다.
니키엘의 대뇌는 율란의 젖어 쓸어 올린 머리에 의해 드러난 반듯한 이마, 조각 같은 눈썹 뼈, 콧대에 매달린 물방울, 산맥처럼 파인 인중과 그이의 금욕적 성향을 띠는 성격에 맞지 않게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을 배회하는 것은 물론, 연마된 무기처럼 단단한 신체를 자극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이 수상한 심박수는 뭔데!’
니키엘은 자신의 심장이 맹렬하게 뛰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온몸이 쿵쾅거리는 심박음만 계속해서 재생 중이었다. 혈관이 팽창하여 얼굴에 홍조가 이는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왜!’
니키엘은 이제 정말 자신의 정신적 성적 취향과 신체적 성적 취향에 대해 확실히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그렇게 저 혼자만의 세계에 펼쳐진 번뇌의 바다에서 헤엄치느라 니키엘은 귓등까지 붉어진 율란을 깨닫지 못했다.
이윽고, 목소리가 낮게 잠긴 율란이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듯 말했다.
“…공짜로 계속 볼 생각인 듯하신데, 그러지 말고 들어오든가.”
“뭐, 뭐, 뭐-?!”
니키엘은 시정잡배와 다름없는 율란의 말투에 놀라 소리쳤다. 목덜미는 불긋하게 변한 주제에, 율란은 니키엘을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곤 대답했다.
“하도 뚫어지게 보시니 목욕 시중이라도 들어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의 전하시여.”
“말도 안 되는…! 다친 곳이 있으면 신성력으로 치료해 줄까 싶어 들른 것뿐이야! 도대체 성격이 왜 그렇게 삐뚤어진 거야!”
아예 펑 터질 것처럼 얼굴이 빨개진 니키엘이 꽥 소리를 지르고는 다시금 몸을 돌려 수풀을 걷어 낸 뒤, 재빠르게 가 버렸다. 그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며 막사 쪽으로 향하는 것이 생생하게 들렸다.
헬촹럼 물그뉵…? …들에게도 이런 적은 없었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고 있었다. 헬촹이 뭔지 몰라 그 의미 파악이 불가능했다.
가 버리는 니키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율란은 젖은 손으로 뜨거워진 귓등을 연신 문질렀다. 그가 하도 자신의 헐벗은 육체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치골 아랫부분에서 일어난 변을 들킬 뻔했기 때문이다.
“…꼴사납군.”
율란은 한숨과 함께 욕을 짓씹으며 손바닥으로 물을 한 번 튀긴 다음, 그대로 그 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막 겨울로 들어서기 시작해 서리처럼 차가운 물이 좀 더 얼음장 같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아직도 니키엘의 시선이 온몸을 헤집는 기분이었다. 읏, 하는 신음을 간신히 잇새에서 눌러 죽인 율란이 계곡의 더 깊은 부분을 향해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오늘의 목욕은 쉽게 끝나지 않을 듯싶었다.
***
막사로 돌아온 니키엘은 붉어진 얼굴을 쉽게 가라앉힐 수 없었다. 오늘 아침에도 내내 멍했는데 또 이러니 미칠 지경이었다.
‘미쳤지, 내가. 이러다 진짜로 남자한테 장가가게 생겼네.’
시키면 갈 생각이긴 했지만, 그건 어쨌든 자신을 싫어하는 수장들 중 한 명을 골라 백년가약을 구라로 맺은 채 그냥 그이의 저주인지 뭔지를 해소해 주고 저는 한평생 조용히 마물 연구나 하다 이 세계에서 호상할 생각으로 한 결심이었다.
지난 죽음이 너무도 갑작스러웠으니 평생 놀아도 굶어 죽을 일은 없는 왕자 팔자를 이용하여 하고 싶은 연구나 하다가 초로에는 대학이나 열어 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니 자신과 혼인한 수장에게 저주를 해소해 주는 대신 급전 좀 당겨 달라 회유한 뒤, 투자로 돈을 불려 대학을 차릴 계획을 세워 두었는데 뒤늦게 복병이 나타난 기분이었다.
‘이런, 관세음보살님! 이 사태를 어쩌냔 말입니까! 이러다가 남자에 미쳐서 잠들어 있는 내 부인 겸 남편의 침실에 숨어들면 어떡하지, 그 쓰레기를?! 내가 그렇게까지 개새끼는 아니지만…. 자고로 아랫도리에 뭐 달린 놈들은 믿을 수가 없는 족속들이니…. 그래…. 지금이라도 이 문제만 일으키는 기관을 잘라야….’
그렇게 셀프 중성화 계획을 세우고 있던 니키엘은 폴이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전하…. 갑자기 나가시더니 얼굴은 왜 또 이렇게 붉게 물들이시고…. 열이라도 나시는 거 아닙니까?”
폴은 놀라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기 위해 팔을 올렸던 니키엘 역시 그런 폴과 눈을 마주쳤다. 주종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힌 지 수초가 흐르자, 니키엘의 심중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심박수도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 남자라고 다 좋은 건 아닌가 보네. 폴을 봤더니 놀랍도록 마음이 차분해졌어.’
자신이 남자에 미쳤을까 걱정되었던 니키엘은 팔을 내리고 평온한 얼굴로 웃을 수 있었다. 그런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폴이 한쪽 눈썹을 올린 채 말했다.
“…지금 갑자기 기분이 좀 나쁜데요?”
“네 착각이야. 그보다, 저녁 식사 메뉴는 뭐라고?”
니키엘은 자연스레 화제를 바꾸며 마법함에서 양피지를 꺼냈다. 오늘 있었던 습격에 대해 기록해 둘 작정이었다. 요프닉스와 야키프의 생김과 약점, 그들의 습성 등을 적어 나가며, 니키엘은 오늘도 책상 앞에 앉아 식사를 때웠다.
폴이 제발 식사 예법 좀 지키시라며 옆에서 안절부절못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앞으로도 이렇게 마음이 심란하게 들뜰 때면 폴이나 쳐다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뭐 얼라리나…. 생각해 보니 니키엘의 주변에는 마음의 안정을 얻게 해 줄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마음먹자 또 차분해지는 것이다. 애초에, 니키엘은 쉽게 화가 나거나 우울해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마음속 번뇌를 끊어 내기 위해 데드리프트를 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저답지 않았다. 니키엘은 한번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니키엘은 그렇게 그날 밤 내내 폴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앞으로의 행군이 남아 있는데 계속해서 이런 쓸데없는 고민을 할 바에는 아예 마음 정리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기계 같은 구석이 있는 니키엘의 성격은 자신의 고민을 버그 취급 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대로 버그를 남기고 기능을 돌리자니 계속해서 에러가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이나 얼라리에게는 이렇지 않았어.’
니키엘은 차분히 알고리즘을 생성했다. 아까의 두근거림이 진짜 니키엘의 신체에서 온 것은 아닌가 확실히 하는 과정 역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친다면 잘생긴 이를 볼 때마다 심박수가 높아져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수장들만큼 훤칠하진 않더라도 빠지는 것 없는 이들을 봤을 때에는 그렇게까지 반응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신성력이 니키엘의 심장을 다른 누구도 아닌 수장들에게만 요란스레 뛰게 하는 것이라는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했다.
‘아니…. 딱 한 사람 더….’
그렇다. 딱 한 사람 더 있었다. 바로 냇이었다. 니키엘의 심장은 냇에게도 요란하게 뛰지 않았던가.
‘대체 뭐지….’
니키엘의 고민은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되었고, 그렇게 밤이 깊어 감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잠들 수 없었다.
사춘기 때도 겪어 본 적 없는 희한한 고민이 니키엘을 덮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