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27)화 (127/130)

127화

‘강해질 거야. 강해져서 마물들 다 공부하고 다닐 거야.’

손자병법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니키엘은 마물에 대한 연구가 자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고통받는 이들은 늘 있어 왔으니, 연구를 하다 보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당연히 생길 것이다. 자신이 이제 와 율란처럼 강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마음먹으니 야키프의 생김새라든지 요프닉스의 행동들에 대해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니키엘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루시안은 쉴드를 더 두껍게 치고 있었고, 율란은 거대한 새의 등 위에 올라탔다 요프닉스에게 뛰어내리며 칼을 박아넣고 있었다. 레이먼은 흐트러진 기사들의 대열을 정리하며 혹여나 부상자가 나오지 않게끔, 정확한 지시를 내리며 마물들을 처치하도록 했다.

니키엘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훨씬 더 수월하게 마물을 처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왕지사 짐이 되어 버린 후라면 이제부터라도 도움이 되면 된다. 민폐 끼치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보면, 세계는 그대로 좁아지는 법이었다.

니키엘은 심기일전하여 간혹 제게로 달려드는 야키프를 베어 내고는 그들의 약점이 무엇인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칼로도 베어 내기 어려운 껍질의 약점은 무엇일까. 니키엘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어 칼끝으로 야키프의 사체를 지그시 눌러 보았다. 그러자 찍, 하고 기름이 튀어 올랐다.

놀란 니키엘이 루시안에게 바로 소리쳤다.

“불! 불을 쓰시오! 야키프의 약점은 불이야!”

그 말을 들은 루시안이 커다란 화염구를 공중으로 쏘아 냈다. 야키프가 불에 닿아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기름진 가죽이 오그라들어 작은 공처럼 변한 뒤 죽어 버렸다. 정답이었던 것이다.

루시안이 마법사단을 향해 크게 명령했다.

“화염구를 쏘라!”

마법국의 국장이 만든 화염구가 이끌어 낸 결과를 목격한 마법사단이 일제히 공중을 향해 커다란 화염구를 만들어 날려 보냈다. 공중에서 내려오던 야키프 떼가 그대로 불에 닿아 끽소리도 하지 못한 채 오그라들어 바닥 위로 툭툭 떨어졌다. 운 좋게 살아남은 놈은 그대로 기사단들에 의해 처치되었다.

한 건 해결했다는 생각으로 니키엘은 고개를 돌려 아직까지 거대한 요프닉스와 싸우고 있는 율란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새의 발톱에 눈이 파인 요프닉스는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문득 니키엘은 부상당한 요프닉스가 부리 아래 달린 혹을 계속해서 숨기려는 행동을 한다는 걸 발견했다. 이윽고, 그곳을 뚫어져라 살피다 무언가를 발견한 니키엘이 율란을 향해 소리쳤다.

“율란! 그것의 부리 혹과 턱이 이어지는 부분에 숨구멍이 있어!”

율란은 망설임 없이 요프닉스의 부리를 잡은 채 철봉에 매달리듯 뛰어내려 혹을 발로 걷고는 턱과 이어진 부분에 동그랗게 뚫려 있는 숨구멍에 검기가 일렁거리는 검을 푹 찔러 헤집었다.

끼에엑-! 끼이익-!

듣기 싫은 비명 소리가 숲을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요프닉스가 쿵 소리를 내며 주저앉더니 그대로 목이 휙 뒤로 꺾여 쓰러졌다. 드디어 끈질겼던 거대 마물이 죽은 것이다.

니키엘은 헉, 숨을 들이 삼켰다. 조용하던 좌중이 갑자기 함성을 지르며 니키엘을 돌아보았다. 기사들이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니키엘을 바라보더니, 이내 들고 있던 검으로 제 방패를 툭툭 내리쳤다. 박수를 치듯이 말이다. 궁수부대는 비어 있는 활의 시위를 튕기며 하프처럼 소리를 냈고, 마법사단은 공중 위로 작은 폭죽 같은 것을 쏘아 올렸다.

무구에서 만들어지는 온갖 소리를 듣고 있던 니키엘의 두 뺨이 붉어졌다. 별일 하지도 않았는데 칭찬받았기 때문이다. 의외로 내향인이었던 니키엘은 스스로가 작정하고 나서는 것은 괜찮아도, 뜻하지 않은 이런 식의 주목은 익숙하지 않았다. 커다란 공훈을 세운 것도 아니니 말이다.

부끄러워 레이먼 뒤로 살짝 숨자, 그가 망토로 니키엘을 가려 주며 웃었다.

“쑥스러워 마십시오, 전하. 덕분에 기사들도 크게 다치지 않고 끝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이런 건 영….”

거기까지 말하던 니키엘이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거대한 새가 있는 쪽이었다. 니키엘이 그대로 진저를 재촉해 그쪽으로 향했다. 수많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그를 위해 길을 터 주었다.

니키엘이 요프닉스의 사체 곁에 도착했을 때였다. 율란이 상처 입은 채 웅크리고 있는 작은 검독수리를 안고 있었다. 니키엘이 알던 바로 그 아기 새였다.

“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니키엘이 진저의 등에서 내려 율란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율란이 쯧, 혀를 차며 니키엘의 품에 새를 안겨 주었다.

“차가 식을 정도의 시간 정도만 안고 계셔도 될 겁니다.”

그렇게 무뚝뚝하게 말한 뒤, 자신의 흑마를 끌고 와 말의 등 위에 올라탔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아프니 안아 주라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니키엘은 상처 난 새의 등을 바라보았다. 새는 율란의 품 안에서는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더니, 니키엘의 품으로 옮겨 가자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없는 병아리처럼 니키엘의 팔에 부리를 박고는 고개를 툭 떨궜다. 무척이나 안쓰러운 모양새였다.

“우리 아기 새….”

새가 화답하듯 삐로롱, 하고 우는 것 같았다. 레이먼이 그 꼴을 보다가 쯧, 혀를 차며 근처에 있던 루시안에게 말했다.

“저 새 새끼, 언제까지 병아리인 척할 거래.”

“…모르지요. 그러나 저렇게 사랑해 주시니 저였다면 영원히 자라지 않는 척할 겁니다.”

루시안의 그 말에, 너도 제정신 아니라는 듯 바라보던 레이먼이 고개를 절레 저었다. 저야말로 그런 행운이 온다면 놓치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아기 순록은 물론 아기 사슴인 척도 할 수 있다. 다 크기 전까지 생김새가 비슷하니 잘만 우겨 대면 짐승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것 같은 니키엘이 받아 줄지도 모른다.

그 감각이 얼마나 달콤하겠는가. 레이먼은 그런 대우를 받아 본 적이 없어 상상이 어려웠지만, 니키엘이 자신을 저렇게 단 한 번이라도 쓰다듬어 준다면 개국 때 지어졌다는 유서 깊은 볼트윅가의 수도 저택을 헐값에 팔아도 상관없을 것만 같았다.

***

마물의 습격을 당한 탓에 토벌대는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부상병들이 아예 없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인 점은, 마법사가 동원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이들은 없다는 것이었다.

치료 마법이 있기는 했지만, 마법사들 중에서도 치료 마법을 다룰 줄 아는 마법사는 귀했으며, 그 마나 소모량이 웬만한 공격 마법의 배 이상이었다. 그랬기에 중증의 환자가 아닌 이상 치료 마법은 아껴 두는 것이 군법이었다.

니키엘은 식량 부대가 식량을 내려 요리하기 시작하는 걸 바라보았다. 등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 가는 검독수리를 품에 껴안은 채 말이다.

니키엘은 율란을 찾고 있었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다행히 식량 부대를 통솔하고 있던 알레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보게, 얼라리.”

“예, 전하.”

알레윈은 니키엘을 향해 활짝 웃었다가,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검독수리가 까마귀도 아닌데 까악, 하고 자신을 향해 울어 대는 걸 잠시 바라보고는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러나 그는 곧 정중한 태도로 니키엘에게 하문할 것을 청했다.

“그게…. 대공이 안 보여서….”

다친 곳은 없나 묻고 싶었는데 아까 전, 율란은 제 품 안에 검독수리만 안긴 채로 어디론가 그냥 가 버렸다. 어떻게든 찾아내어 신성력이라도 주고 싶은데 당최 보이지가 않았다.

“아, 요프닉스의 피를 뒤집어쓰셔서 간단히 씻으러 가셨습니다. 마침 가까운 데서 물소리가 들린다고 하셔서요.”

“오, 그래? 거기가 어딘데?”

“그게 어디냐면은….”

알레윈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방향을 알려 주었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각하를 찾으러 가실 요량이면, 그 새는 제가 잠시 맡아 두겠습니다. 부상을 입은 듯한데 많이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오! 자네는 의외로 세심한 구석이 있더라고? 부탁하네!”

니키엘의 말에 알레윈은 좋은지 아닌지 약간 헷갈린다는 표정을 하더니 이내 니키엘의 품 안에서 새를 받아 들었다. 새는 장대하게 날갯짓을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다쳤는데 날갯짓하면 어떡해! 가만히 있어.”

그러나 니키엘로 하여금 잔소리를 들었다. 새가 어떻게 내게 화를 낼 수 있냐는 듯이 소심하게 삐로로 울었지만 니키엘은 알아듣지 못했다. 당연했다. 니키엘은 새가 아니니까.

그런 새를 꼭 끌어안은 채로 알레윈이 히죽히죽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제가 잘 보고 있겠습니다.”

“음, 부탁하네. 그보다, 웃는 얼굴이 영 산뜻하지가 못하니, 자네는 되도록 덜 웃도록 하게.”

니키엘이 충고랍시고 알레윈에게 말해 준 뒤 등을 돌렸다. 그렇게 되도록 덜 웃어야 하는 남자를 향해, 품 안에 있던 까마귀, 아니 검독수리가 꼴 좋다는 듯 깍깍 소리를 냈다. 알레윈이 새만 들리게 조용히 대꾸했다.

“웃지 마셔요, 후작님.”

새는 한동안 더 깍깍거렸고 알레윈은 거기에 대고 뭐라 뭐라 대꾸했지만, 이미 등을 돌린 니키엘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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