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저, 저건….”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땅에 큰 그림자가 질 정도의 거대한 몸집으로 빠르게 강하하고 있는 마물은 성체의 날개가 웬만한 집 다섯 채만 하다는 요프닉스였기 때문이다.
요프닉스의 거대한 부리 밑에는 그보다 더 큰 혹이 달려 있었다. 꼭 펠리컨 같은 생김새였는데, 깃털 하나의 크기가 장대한 만큼 땅에 떨어진 요프닉스의 깃털로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농가도 있었다.
‘펠리컨을 닮은 만큼….’
마물의 크기에 놀란 니키엘은 요프닉스의 생김과 행동에 대해 빠짐없이 관찰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때 요프닉스가 그대로 날아와 거대한 부리를 쩍 벌려 기사들을 삼키려 했다.
‘펠리컨처럼 온갖 것을 입에 넣고 보는구나!’
기사들이 이리저리 피해 다니며 창을 추켜든 나머지 요프닉스가 부리로 삼킨 것은 나무 두 그루뿐이었다. 미네르비나가 무기를 빼어 들고 요프닉스를 경계했다. 기사들은 마치 비상 훈련이 있을 거라고 미리 고지받은 병사들처럼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재빠르게 대열을 정비했다. 검은 가시 기사단의 좌장군과 우장군, 백록 기사단의 좌장군이 빠르게 치고 나가 대열을 정비하고 식량 부대를 보호했다. 마법사들이 펼친 쉴드 때문에 요프닉스의 인간 사냥은 번번이 실패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땅에 내려앉은 요프닉스가 날개를 퍼덕거렸다.
“읏….”
“전하, 제 뒤에 꼭 붙어 계셔야 합니다! 진저는 온순하고 침착한 녀석이니 더 놀라지 않게 잘 보살펴 주시길 바랍니다!”
미네르비나가 당부하듯 외쳤다. 니키엘은 알았다고 대답했다. 이런 때 놀란 말이 대열을 무시하고 다른 방향을 향해 질주해 버리면, 니키엘은 순식간에 미아가 될 테니 말이다. 진저의 목덜미를 연신 쓰다듬으며 진정시킨 니키엘은 저를 보호하고자 애쓰는 미네르비나에게 폐가 되지 않을 만큼만 움직여 가며 요프닉스를 관찰하려 했다.
넓고 길쭉한 부리 안쪽에 붉은 점막으로 덮여 있는 주머니를 가진 요프닉스는 보통 때는 그 안에 여러 먹이를 저장하기도 했다. 당연히 부패가 쉬운 터라 부리를 벌릴 때마다 악취가 심했다.
니키엘은 마물들을 살피며 책만으로는 알지 못한 특징에 대해 속속들이 기억해 두려던 참이었다. 요프닉스라는 마물이 비행형 마물이라고는 하나, 완전히 새와 생김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대가리에 뿔이 달려 있는 것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끼에엑-! 요프닉스가 숲이 떠나가도록 울면서 다시 한번 더 날개를 펼쳤다. 거대한 바위처럼 두꺼운 가슴 근육을 불끈거리더니 그대로 발을 움직여 기사들을 밟아 죽이려 했다. 그럴 때마다 마법사들의 쉴드가 반쯤 모양을 잃고 스러졌다가 다시 제 모양을 찾고는 했다.
삐이익-!
그때였다. 니키엘의 머리 위로 또 한 번의 그림자가 졌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만일 또 다른 요프닉스가 더 공격을 감행한다면, 이제 막 원정을 떠나려는 토벌단에게 막대한 피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키엘이 고개를 들어 올려 본 것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생물이었다.
전설에나 나올 법한 거대한 검독수리였다. 니키엘은 그 새의 광활한 날개 아래 진 그림자를 보며 놀라 소리쳤다.
“저, 저 새는….”
크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특이하게 온통 검은 부리와 검은 깃털을 가진 저 검독수리가 니키엘이 아는 바로 그 새 같았다. 니키엘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새를 응시했다.
“어떻게….”
니키엘이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빠르게 하강한 새가 강철보다 단단한 발톱을 요프닉스의 날갯죽지에 박아 넣었다.
끼이익-! 요프닉스가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퍼덕거렸다. 또 한 번 강풍이 불어닥쳤다. 니키엘은 진저를 살짝 뒤로 물려 말에게 바람이 가지 않도록 한 뒤 마물과 거대한 새가 엉켜 싸우는 걸 바라보았다. 그사이 기사들이 후미를 정돈하고 있었다.
“전하,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다가온 레이먼이 물었다. 니키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눈은 새의 싸움에 집중하는 중이었다. 요프닉스가 날개를 아무리 퍼덕여도 견갑골에 박힌 검독수리의 발톱을 빼내기는 무리인 듯했다.
이제 요프닉스는 고개를 뒤로 물려 제 뿔을 검독수리에게 박아 넣으려 하고 있었다. 새는 그때마다 요프닉스의 눈알을 쪼아 댔다. 마물의 눈에서 피가 터지며 듣기 싫은 울음이 들렸다.
“곧 결판이 날 겁니다.”
레이먼이 싸움을 지켜보다 말했다. 니키엘은 레이먼이 그들의 싸움을 두고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이상했다. 꼭 검독수리가 싸우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본 사람 같지 않은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하늘을 향해 전개하라!”
갑작스레 루시안의 포효가 들렸다. 그가 하늘 위로 거대한 마법진을 펼쳤다. 그러자 꽃밭에 모든 꽃이 한꺼번에 개화하듯 투명하게 빛나는 마법진이 공중을 향해 펼쳐졌다.
쇄애액-!
무언가 하늘 위에서 쇄도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레이먼이 니키엘의 앞을 막더니 순식간에 발도하여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것을 검으로 갈라 냈다. 진저의 발치로 피가 튀었다. 놀란 진저가 살짝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뭐가 내려온 것인데?!”
니키엘이 놀라 물었다. 레이먼이 쯧, 혀를 차며 대꾸했다.
“야키프입니다.”
니키엘의 안색이 굳었다. 야키프라면 거머리형의 마물이었다. 지능도, 인지도 없어 보이는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처럼 내려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뒤, 피부에 달라붙어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피를 빨아 갔다. 욕심 많은 이 마물이 성인 남자의 피를 다 빨아낼 때까지는 채 수 분이 걸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하여 야키프란 마물은, 쇠공을 닮은 생김새에 외피 역시 단단하여 지능이 없는 것치고 처치하기가 쉽지 않았다.
“닿으면 즉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방비하십시오, 전하!”
레이먼이 소리쳤다. 니키엘은 칼을 빼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사람만 공격하는 이 마물이 진저에게 달라붙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검집에서 보검을 빼 든 니키엘이 허공 위를 살폈다. 루시안이 니키엘의 위치를 파악하고 쉴드를 이중으로 쳐 둔 덕분에 하늘에서 쏟아지던 야키프 몇 마리가 쇠공처럼 몸을 둥글게 만 상태로 쉴드에 닿아 그대로 튕겨 나가거나 운이 나쁘면 그대로 갈려 나갔다.
야키프의 피가 이리저리 튀어 숲이 금세 더러워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우박처럼 그저 그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야키프가 어디서 그렇게 쏟아지는지, 무엇 때문에 떨어져 내리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치리리-!
고통스러운 소리에 니키엘이 절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새가 거대하고 너른 날개를 펄럭거리며 울고 있었다. 발톱을 아직 요프닉스에게 박아 둔 검독수리의 등 뒤에 어림잡아 백 마리가 넘는 야키프가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저게 왜…. 야키프는 사람만 공격하는데….”
진저가 야키프의 공격에서 무사하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아기 새 역시 무사하여 다행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니 마음속이 울컥거리고 두 눈을 뜬 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누가, 누가 좀….”
제가 달려 나가 봤자 대열이 흐트러져 기사들과 마법사단, 저를 호위하던 미네르비나에게 폐를 끼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에 빠진 새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니키엘이 저도 모르게 말의 등자쇠를 쳐 달려가려던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새의 등 위로 훌쩍 튀어 오르더니 달라붙어 있던 야키프를 검으로 쳐 냈다. 그의 검 주위로 마나와 함께 섞인 검기가 일렁였다. 율란이었다.
니키엘은 의식하지 못한 채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새가 고통받는 것을 볼 수 없었는데, 율란이 새의 등 위에 붙어 있는 모든 야키프를 검기로 날려 보내고 있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는데 레이먼이 니키엘을 가로막았다. 그가 거대한 장검을 휘둘러 하늘에서 날아오는 야키프를 공격했다. 수십 마리가 그의 칼 등 위에서 가죽이 찢겨 그대로 반 토막이 났다.
그러나 한 놈이 검의 궤도를 벗어나 니키엘 위로 떨어지려 했다. 니키엘은 금세 보검을 휘둘렀다. 율란이 가르쳐 준 바로 그 자세였다. 진귀한 검으로 마물의 질긴 외피를 가르는 감촉이 그대로 느껴졌다.
레이먼이 흘끗 돌아보며 웃었다.
“잘하셨습니다, 전하!”
니키엘은 고개를 저었다. 이거 하나 처리했다고 칭찬을 듣기는 싫었다. 그러나 뺨이 상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갑작스레 육군 병장의 피가 끓어올랐다.
‘하, 나…. 알아, 이 감각…. 전우애잖아.’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니키엘도 군 생활은 나름 잘 보냈다. 주위 사람들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협동하는 것을 싫어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좀 귀찮을 뿐이었다.
살짝 벅찬 가슴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기사들이 요프닉스에게 달려들어 숨통을 끊어 내려 하는 것이 보였다. 마법사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야키프를 막아 내고, 또 식량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니키엘은 그들을 위해 저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무기가 있고 또 싸우는 기술을 익힌 기사들은 야키프 같은 마물을 처치할 수 있겠지만, 쇠공처럼 단단한 외피를 일반 농민이, 그것도 솔리우스교의 농간으로 청동으로밖에 만들지 못한 농기구로 마물을 해치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눈앞의 기사들은 그런 이들을 위해 원정을 떠나는 사람들이었다. 니키엘은 자신에게 어떠한 역할이 주어졌음을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