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루시안이 공기의 흐름을 바꿔 주위에 산재되어 있던 마나를 끌어왔다. 그는 공중에 녹색, 적색, 푸른색의 불꽃을 띄웠다.
“이대로 가다가는 전하께서 목욕은커녕 저녁 식사도 거르시게 될 겁니다. 빨리 해결하죠. 각자 원하는 색을 뽑으세요.”
“녹색.”
“적색을 원한다.”
레이먼이 녹색, 율란이 적색을 선택했다. 자동으로 푸른색을 갖게 된 루시안이 공중에 한 번 손을 젓자 불꽃이 늘어나며 선을 그렸다. 이내 불꽃이 터졌고, 연기 뒤로 보이는 허공에 그어진 선 중 적색의 선이 가장 짧았다. 루시안이 쯧, 혀를 찼다.
“다시 하자고.”
레이먼은 루시안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율란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 씩 웃으며 등을 돌렸다.
“전하, 개울가로 안내하겠습니다.”
“논의들이 끝났나 보군.”
니키엘이 간단히 대답했다. 시기를 놓친 레이먼이 루시안을 노려보았다. 루시안은 눈매를 가늘게 뜬 채로 율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루비 같은 눈동자 안에 검은 동공이 세로로 쪽 찢어져 있었다.
레이먼이 그를 만류했다.
“제비뽑기는 공이 하자고 해 놓고 왜 성질이야. 그보다 저건 언제부터 저렇게 몸 달은 개처럼 구는 거야? 볼 때마다 희한하네.”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니키엘 전하의 신묘한 매력 때문이겠죠. 그러는 공이야말로 전하를 싫어한다 어쩐다 장황하게 입만 놀리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는 레이먼이 입을 다물었다. 두 짐승은 각자 상당히 불쾌한 기색을 지우지 않은 채로 찢어졌다.
한편, 니키엘은 물이 얼마나 차가울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야영용 봇짐에서 레이먼이 주었던 뜨거워지는 돌을 폴이 가져오면, 그걸 끌어안고 물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때마침 율란이 다가와 그런 니키엘을 개울로 안내했다.
“근처에 산이 있어 마침 개울이 있는 게 다행이야. 말들도 다 목을 축였을까?”
“그렇습니다, 전하.”
말들이 걱정되어 묻자 율란이 온순하게 대답했다. 웬일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는 상대가 신기해 흘끗 본 니키엘이 물었다.
“그대들도 여독이 있을 텐데 내 경호를 맡기게 해 미안하군.”
“삼 박 사흘 동안 한숨 안 자고도 전하를 호위하는 것 정도는 해낼 수 있으니 그런 쓸데없는 염려는 거두시고 어서 가 보시지요.”
율란이 별소리 다 한다는 듯 니키엘에게 덤불 뒤의 개울을 가리켰다. 얕지 않은 계곡이어서 물 안으로 들어가 씻기에는 딱 좋았다. 니키엘은 사양하지 않고 그리로 향하려 했는데, 폴이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전하-! 목욕 용품입니다!”
“고마워.”
폴이 가져다준 것은 목욕용 솔과 레이먼이 준 마법 향비누였다. 영견 몇 장과 함께 갈아입을 옷을 들고 있길래 니키엘이 폴의 품에서 짐을 가져가며 그를 떠밀었다.
“혼자 씻을 수 있으니까 너도 가서 쉬어.”
“그렇지만….”
“얼른.”
니키엘이 두 번 말하기 싫다는 듯 딱 자르자 폴이 율란을 흘끗 보다가 두 사람에게 꾸벅 절을 하고 물러섰다. 율란은 덤불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가 니키엘에게 아주 얇고 작은 호각 피리가 달린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네 명의 수장들은 이 신호를 곧장 들을 수 있습니다. 위급 시에 입구에 공기를 불어 넣기만 하면, 물속에서 불더라도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꼭 유념하십시오.”
“아…. 고맙네.”
신기하여 호각 피리를 내려다보는 금색 속눈썹을 빤히 바라보던 율란이 등을 돌렸다. 니키엘은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든 것 같아 얼른 씻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덤불 뒤로 넘어가 양지바른 곳에 옷 무더기와 영견을 얹어 두고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적당한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
그런 뒤 뜨거워지는 돌과 향비누를 끌어안고 신발을 벗은 채 천천히 물가로 다가갔다.
“읏-. 차가워-.”
저도 모르게 탄성이 터질 정도로 얼음장 같은 물이었다. 이 정도로 차가우면 씻기도 싫어지지만, 탕 목욕을 오래 하는 걸 싫어할 뿐 땀 흘린 뒤 씻지 않고 자는 건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편인 니키엘은 간단한 등목이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천천히 물 안으로 들어가 심장의 원위부에서부터 물을 뿌린 니키엘은 덜덜 떨면서도 점점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재빨리 말을 몰며 묻었던 흙먼지를 씻어 냈다.
너무 오한이 심히 들면 레이먼이 준 돌로 몸을 문지르기도 해 가며 머리까지 감아 낸 니키엘은 덜덜 떨며 다시금 물가로 나와 바닥에 놓아둔 영견을 집어 들어 물기를 빠르게 닦아 냈다. 그러곤 속옷을 입은 뒤, 폴에게 주문하여 새로 맞춘 통이 넉넉한 파자마 바지를 꿰어 입었다.
오시니스의 남성들은 잠자리에서 부인에게 봉사하기 위해 타이트 하고 모직이 얇은 천으로 만든 잠옷을 입기 때문에 도톰하고 폭신한 재질의 수면 바지가 두 장의 만오천 원인 세계에서 살다 온 니키엘이 입기엔 무척 불편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따로 제작해 온 바지였는데, 참으로 편해 니키엘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바지를 꿰어 입은 채 젖은 머리를 영견으로 감싸 터번처럼 틀어 올리고 상의를 찾는데, 웬 까마귀가 잠옷 상의를 물고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어? 너어? 그거 이리 줘. 내 거야.”
까마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꼭, ‘엥, 주웠으니 내 것이지.’ 하는 듯한 제스처였다. 어이없어진 니키엘이 그를 잡으려고 손을 뻗은 순간, 까마귀는 잠옷 상의를 문 채로 푸드덕 날아올랐다.
“어, 어?!”
아무리 가볍다 한들 까마귀에는 커다란 옷감이니 처음에는 날갯짓이 어려운지 휘청거리길래 빨리 잡으려고 했는데, 꼭 놀리듯 니키엘의 손가락 끄트머리를 톡 치고 날아간 까마귀가 이내 어스름히 어둠이 깔린 숲속 저편으로 가 버렸다.
“이런 무슨 황당한 경우가….”
니키엘은 이게 꿈인가 싶어 두 눈을 깜빡였다. 대체 까마귀가 왜 자신의 옷을 물고 가 버린 건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이가 없네.”
그러나 황망해하면서도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포기가 빠른 니키엘은 원래 입었던 옷이라도 주워 입어야지 싶어 뒤를 돌았다. 그러나 막상 흙먼지가 가득한 그 옷을 보자 도로 입는 것이 갑자기 끔찍하게 싫어졌다.
결국 니키엘은 율란을 부르는 수밖에 없었다.
“저기, 대공-.”
민망해 개미만 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는데도 율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저기…. 까마귀가 내 옷을 물고 가 버려서….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러자 율란이 덤불을 불쑥 넘어왔다. 니키엘은 놀라 저도 모르게 팔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상체를 가렸다가, 아니 내가 굳이 가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에 천천히 팔을 내렸다.
율란은 그런 니키엘을 바라보지 않은 채 허공을 둘러보았다.
“그 새가 어디로 날아갔습니까?”
“서편이었어.”
율란이 니키엘의 말에 서쪽을 응시하다가 이를 바득 갈았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호각을 불라고 했잖아. 꼭 일이 터져야만 속이 편한가 보지?”
또 저 편한 대로 반말을 하는 것이 황당하여 니키엘은 두 눈을 깜빡였다.
“아니, 왜 갑자기 화를 내는….”
“마물 지식이 뛰어나다더니, 짐승으로 위장하는 마물도 있다는 건 까먹기라도 하셨습니까?”
율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 망토를 풀어 니키엘의 등을 덮어 주었다. 그러고는 니키엘이 머리 위에 터번처럼 얹은 영견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걸 툭 건드렸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니키엘은 저 혼자 두어 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아, 소리를 냈다.
“설마 프니키오…?”
프니키오라는 마물은 작은 짐승으로 변해 사람을 유인한 뒤 둥지로 끌어들여 그 사람을 먹어 치운 뒤, 그 뼈다귀를 이용하여 둥지를 짓는 마물이다.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프니키오는 북부에 주로 산다고….”
“곧 겨울이니 남하하는 놈들도 간혹 있습니다. 다음엔 꼭 호각을 부셔야 합니다.”
율란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자신이 잘못한 거에 있어선 화내지 않고 수용하는 편인 니키엘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오, 알겠어. 나는 그런 줄은 몰랐지 뭐야. 그런 변신형 마물이라면 다른 종의 아종인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개체인지 궁금하기도 하군.”
율란은 니키엘이 무언가 중얼거리는 걸 무시한 채로 풀숲을 뒤지고 있었다. 마물의 흔적을 찾아봐도 딱히 걸리는 것은 없었기에, 율란은 니키엘의 짐을 들고는 덤불을 팔로 벌려 고개를 까딱였다.
니키엘은 그게 먼저 덤불을 건너가라는 다소 싸가지없는 제스처임을 깨닫고 덤불을 건넜다. 율란이 뒤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얼마쯤 걸었을까, 니키엘의 막사 근처에 온 율란이 경고하듯 말했다.
“의외로 조심성이 없으십니다. 어느 때 보면 놀라울 정도로 사리 판단이 바르신데 또 어떨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천지를 누비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 같으시군요.”
그거야, 나는 자연계 과학자니까. 호기심 없는 과학자가 어디 있겠어. 니키엘은 속으로 말대답 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어 율란의 화를 더 돋울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던 율란이 쯧, 혀를 찼다.
“잔소리를 해도 들을 생각이 없으시군요. 은근히 고집도 있으시고….”
“알겠어. 고맙다니까? 대공께서도 가서 쉬시지 그래. 난 이제 들어가면 된다고.”
“…다른 곳은 웬만하면 기사를 불러 함께 가시고 저 막사만은 들어가지 마십시오.”
율란이 니키엘의 막사에서 한참 떨어진 누군가의 막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검은색 깃털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저곳은 왜?”
“빌어먹게도 호기심이 많으시군요. 저녁은 막사로 보낼 테니 오늘 밤은 나오지 마십쇼.”
율란이 심드렁하게 대답한 뒤 등을 돌렸다. 니키엘이 그의 등 뒤에 대고, “대공! 망토는?!” 하고 물었지만 그의 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