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다른 마물들도 그와 같이 전략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은 이번 토벌이 한낱 마물 ‘사냥’이 아닌 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얘기지.”
“기존의 마물들에 대한 심도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전략을 세우려면 적을 아는 것이 가장 첫 번째이니.”
“학자들을 동원하자는 얘깁니까?”
율란의 말에 레이먼, 루시안이 차례로 대답했다. 루시안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니키엘 전하께서 마물에 있어서 해박하십니다.”
“어떻게?”
레이먼이 놀라 물었다. 한쪽 눈썹이 지그시 올라간 것이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표정이라 루시안은 레이먼이 첫사랑을 시작한 얼뜨기처럼 들떠 보이는 것이 꼴 보기 싫어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건 전하와 저의 이야기입니다. 볼트윅 공이 알 필요 없는 얘기니 넘어가고, 제가 검증할 수 있을 정도로 마물에의 지식에 있어 해박하시다는 것만은 장담합니다.”
저 재수 없는 책상 인사 새끼. 율란과 레이먼이 두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출정 전날 따질 만한 이야기는 아닌지라 울분을 간신히 누른 두 짐승이 송곳니를 번뜩이며 다시금 물었다.
“그래, 발도 없는 주제에 발 빠른 흉내를 낸 파충류의 수작은 그렇다 치고, 전하께서 지식에 해박하시다면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말해 봐.”
율란의 물음에 루시안이 대답했다.
“저를 웃도는 듯했습니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따로 집필 중인 마물 사전도 있으신 듯하더군요.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늘 화제를 빙 돌리시는 탓에 대화를 통한 대략적인 유추일 뿐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연구에 있어서 상당한 수준으로 접근하던 니키엘을 떠올리며, 루시안은 진중한 어조로 대답했다.
“…협력이 필요한 상황에 다다랐을 시, 전하께서 연구에 대한 것들을 저희에게 공유해 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루시안이 아는 학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연구에 대한 자신감이 상당했다. 개중에는 본인의 연구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다 못해 대중에 그것을 발표하기 꺼리는 학자들도 있었다. 니키엘이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무릇 연구를 업으로 삼는 학삐리들은 괴짜가 많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기사단과의 단체 생활이 삶의 주축이었던 율란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물에 관한 연구를 했는데, 그걸 토벌 대회에 참여하는 기사단에게 공유하지 않는다면 그 연구의 목적은 뭐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루시안은 저 무식한 상놈을 보았나, 하는 얼굴로 율란을 바라보다가 흠, 목을 울렸다.
“일단은 여정을 떠나며 전하께 되도록 조심스레 요청해 보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마물 연구를 위해 여정에 참여하시는 건 확실하니 말입니다.”
레이먼과 율란은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었고, 지카리는 조용히 앉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레이먼이 갑작스레 짜증을 냈다.
“수컷 냄새가 진동을 하는군! 지키, 너 지금 발정 열이 오르고 있다. 어떻게 좀 해.”
그 말에 루시안과 율란이 동시에 코를 틀어막았다. 소매와 망토 자락으로 코를 가린 채 다른 수컷의 발정 향에 불쾌한 표정을 짓는 수장들을 멍하게 보던 지카리가 입을 열었다.
“이건…. 이게 발정 열인가…? 지금이라도 니키에게 가고 싶다. 니키와 둥지를 틀고 싶어.”
그 말에 세 명의 수장들이 동시에 굳어 버렸다. 율란이 한숨 섞인 말을 내뱉었다.
“…저 미친놈을 일단 묶어 놔. 정찰병은 당분간 보내지 못하게 되었군.”
그러자 루시안이 손을 공중에 휘둘러 마나로 만든 끈을 소환시킨 뒤 지카리의 두 팔을 상체에 붙인 채로 묶어 버렸다. 아무런 망설임 없이 말이다.
***
새벽 일찍 일어난 니키엘은 어쩐지 처지는 몸이 걱정이었다. 당장 오늘 출정일인데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니키엘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몸에 들어온 지 벌써 한 계절이 지났어. 불균형했던 영양 상태와 불규칙한 생활 패턴으로 인해 무너졌던 호르몬 체계 때문에 경미한 신경증과 우울증을 앓고 있었지만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통한 아드레날린 분비로 이겨 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 지난날들 동안 쌓인 데이터와 계산에 따르면 니키엘의 현재 몸은 우울증을 앓을 만한 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울할 만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지난밤에는 아기 새가 찾아와 즐겁게 잠들었고, 화병에는 아직도 새에게 받은 들꽃이 꽂혀 있으니 말이다. 그럴 이유와 원인이 없는데 우울하다니.
‘게다가…. 꽤 심한 우울감이야. 울고 싶어지다니. 이게 무슨….’
니키엘은 하품 등의 이유로 새어 나오는 생리적 원인에 의해 눈물이 나온 적은 있어도 감정적으로 우울하여 울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양친의 장례식 정도? 그나마도 첫 기일 이후로는 울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목 놓아 울고 싶어지는 것이다. 아니, 무언가 그리운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제 감정이 어찌 됐든 오늘은 출정식이 있는 중요한 날이었고, 할 일은 해야 하기 때문에 니키엘은 입을 열었다.
“그거 다 버려. 가져가 봤자 못 쓴다니까.”
“그렇지만!”
게다가, 바리바리 옷 짐을 챙기다 못해 니키엘의 비단신까지 짊어지려고 하는 폴을 만류해야 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니키엘은 마물 토벌을 위한 출정을 했음에도 하루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는 또라이 짓거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됐어. 그거 다 두고 가자고. 빨리 와.”
니키엘은 왕자 궁 뜰 앞에 놓인 드라이브 인에서 얌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말에 올라탔다.
‘토벌을 떠나시는 것에 마땅한 말이 없는 줄 압니다. 제 성의이니 가납하십시오.’
그런 카드와 함께 도착한 말은 볏짚 색 윤기 짙은 털을 자랑하는, 성격이 유순한 명마였다. 니키엘은 말에 올라타 부드러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껴안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새벽에 일어나 볼트윅가의 마부가 말을 끌고 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니키엘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충 왕자 궁 마구간에 있는 아무 말이나 끌고 가려고 했는데 말이다.
“잘 부탁한다, 진저.”
털이 생강 색은 아니지만 반려동물의 이름을 음식 종류로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미신이 있는 대한민국에서 온 니키엘은 말의 이름을 진저로 지어 주었다. 훈련이 잘된 명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름 없이 길러졌다니 꼭 니키엘을 위한 말 같기도 했다.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몇 번이나 말에게 속삭여 준 니키엘은 폴을 위시한 왕자 궁 시종들이 떠날 채비를 마친 것 같자 이랴, 소리를 내며 말을 몰았다.
출정식이 있는 곳은 왕궁 내 신전 앞이었다. 늦지 않게 도착하려 애를 썼는데도 레이먼의 백록 기사단과 발트가의 검은 가시 기사단, 루시안의 마법사단이 이미 도열해 있었다. 신전의 앞마당에 늘어선 기사단들이 장엄했다.
그들의 갑주는 기름을 먹여 아침 햇빛을 받아 반질반질하게 빛났으며, 말들은 모두 좋은 여물과 풀을 먹었는지 털 빛이 고와 보였다. 게다가 축언을 끝낸 철로 만든 무기들을 꾸준히 관리한 덕에 장비하고 있는 검집과 궁수들의 활이 그렇게 훌륭할 수가 없었다. 연습장만 가면 청동으로 된 검도 매번 광이 나게 닦고 있던 기사들이 눈에 선했다. 그런 걸 보면, 오시니스에는 귀한 철은 또 얼마나 극진히 관리했을지 알 만했다.
니키엘은 자신의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한 번 쓰다듬었다. 이걸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많은 이들에게 민폐가 되면 안 될 텐데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남이 제게 민폐를 끼치는 걸 싫어하는 니키엘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남에게 해가 되는 상황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내 목숨 정도는 건사해야 할 텐데.’
마물을 연구하고 싶은 욕심에 이 장엄한 기사단 행렬에 끼긴 했지만 솔직히 니키엘은 자신이 검 몇 번 휘둘러 본 애송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율란의 말처럼 가능한 한 율란이나 레이먼 곁에 붙어 있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열한 기사단의 머리 쪽으로 가던 니키엘은 간만에 보는 오릭스 지멘츠를 마주했다. 말 옆에 서 있는 그를 보고 니키엘 역시 인사를 위해 내리려 하자 성큼 걸어온 오릭스가 말의 고삐를 잡아 주었다.
마부나 종자가 할 행동을 성기사단 단장이 하니 주위에서 숨을 헉,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니키엘은 그 주목에 민망해져 살짝 무뚝뚝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영광된 아침입니다, 전하.”
“오랜만이오, 냇.”
니키엘은 그가 불러 달라 청했던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그러자 냇이 싱긋 웃었다.
‘여전히…. 죽여주는 미소군.’
자신은 그쪽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냇만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니키엘이 흠, 헛기침을 했다. 그의 등 뒤를 바라보니 다른 수장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키엘은 냇에게 말했다.
“다들 기다리는 듯한데 저쪽으로 가야 하지 않겠소.”
“저들에게 가는 동안만큼은 전하와의 대화를 독점할 수 있겠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 만한 이도 없었기 때문에 니키엘은 약간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게 별일이라고….”
그러자 냇이 환하게 웃었다. 오늘의 그는 투명한 얼음의 속처럼 뿌옇게 보이는 회색 눈을 하고 있었다.
‘눈동자 색이 매번 다르게 보이는 게 신기하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