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애초에 니키엘은 탄수화물보다 단백질이 많은 식단으로, 못 한 오늘치 운동에 대한 죄악감을 씻어 내고 싶었다. 그래도 손님이랍시고 객들이 방문했는데 밥상에 아무거나 낼 수 없는 한국인의 심정으로 주방장 벤디에게 빨리 만들 수 있는 메뉴를 위주로 한 정찬을 준비하게끔 했다.
말하면서도 이건 무슨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말이야 하긴 했지만, 유능한 벤디는 늘 그렇듯이 니키엘의 기대에 완벽하게 부응했다. 정찬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던 것이다.
날씨가 추운 북부에서는 전채와 본 요리를 필두로 시종들이 요리를 하나씩 내온다고 하는데 따스한 편인 수도식 정찬은 모든 요리를 한 상에 꺼내어 놓고 조금씩 덜어 먹는 식이었다. 전라도 담양식 한정식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저들끼리 으르렁거리는 걸 반쯤 포기한 상태로 지켜보던 니키엘은 멍한 얼굴로, ‘그러고 보니 담양 떡갈비 먹고 싶다….’라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고 있었다.
여전히 식탁 위 나머지 대귀족들은 서로를 물고 뜯는 것에 여념 없어 보였다.
“출정 전날 저녁 시간을 자유로 돌려 달라더니 개떼들처럼 전하를 보러 오려고 그 난리를 친 건가?”
“음, 개떼? 자기소개가 과하십니다. 그러는 대공이야말로 왕자 궁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용건 없는 방문이 궁의 주인에게 얼마나 폐가 되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전하, 시타르 소스를 곁들인 농어 요리가 무척이나 훌륭합니다. 식기 전에 그것부터 드시지요.”
율란과 레이먼이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동안, 루시안은 저들의 시끄러운 언쟁과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얼굴로 싱긋 웃으며 니키엘에게 오븐에 쪄 내듯 구운 농어 요리를 권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머리가 아팠다.
“갓 10살 먹은 남자아이들처럼 싸워 대는군. 다들 사이가 안 좋은 거면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투닥거리셨으면 싶어. 나는 보통 이 시간쯤 되면 조용한 저녁을 즐긴다고.”
참지 못해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때부터는 또 조용해졌다. 제가 뭐라 말하든 개의치 않고 서로 물어뜯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때부터 왕자 궁 식당에는 은식기가 동대륙에서 수입한 동물의 뼈를 넣어 구운 자기 접시에 부딪히는 소리만 간혹 들릴 뿐이었다.
은잔에 따라진 물을 마시며 니키엘은 천천히 식사를 재개할 수 있었다. 밥상머리에서는 떠들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게 식사에 임하는 니키엘은 이제라도 저녁 정찬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안도의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식탁 위 모든 그릇이 치워지고 디저트가 나올 차례가 되자, 세 명의 짐승들은 다시금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니키엘은 반쯤 감기는 눈으로 제 몫의 디저트를 물렸다. 또 시작이군, 싶었기 때문이다.
“아주 여기서 잠까지 주무실 생각들이야? 물건 주러 왔으면 전달이나 하고 가.”
말싸움이 끝날 생각을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때 웬일인지 율란이 니키엘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했다.
“전하, 발트 대공의 허물없는 방문은 무례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기별도 없이 방문한 발트 대공을 사형에 처하소서.”
레이먼이 율란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니키엘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니키엘은 쩝, 입맛을 다셨다. 율란의 병문안을 갔을 때, 저 역시 율란에게 기별하지 않고 그라실 저택으로 찾아갔기 때문이다.
“그…. 사형은 너무하지 않겠어.”
“극형에 처하셔야 합니다.”
니키엘의 안색이 한 번 더 짜게 식는 걸 본 율란이 언뜻 웃는 것 같았다. 그 역시, 기약 없이 방문한 것은 니키엘이 먼저라는 걸 알고 그러는 듯했다. …웃기냐? 니키엘은 어이가 없었지만 아무 말 않고 레이먼을 만류했다.
“무슨, 집에 찾아온 것으로 사형을 내리란 말이야. 게다가, 내게 그런 힘이 남아 있다면 식탁 앞에 계신 여러분 모두 왕족 모독죄로 한 번쯤은 손목이 잘렸겠지. 그러나 내가 오늘 보아 하니 귀공들은 멀쩡한 손목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잘만 사용하더군.”
그 말에는 할 말이 없는지 세 남자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니키엘은 이제 그만 일어나 내일을 준비했으면 좋겠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레이먼이 살짝 몸을 기울여 상석에 앉아 있던 니키엘에게 속삭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제가 챙겨 온 것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말투가 꼭 귀부인 꼬시는 제비처럼 달큼했다. 그렇게 달큼하게 말할 것이면 안색이나 어떻게 할 것이지, 아까 전처럼 귓등이 터질 듯 빨간 것이 어이없기도 했다. 니키엘은 그 간극이 조금 웃겨 피식 웃으며 물었다.
“무얼 가져왔는데?”
그리고 그렇게 물은 순간, 루시안이 손을 뻗어 니키엘의 뺨 언저리를 엄지로 문지르더니 그걸 그대로 가져가 혀로 핥으며 눈매를 나른하게 떴다.
갑작스러운 접촉과 루시안의 눈빛 속에 담긴 열기에 말을 잃은 니키엘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자, 루시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구스베리 소스가 묻어 있어서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식탁이 쾅, 하고 덜컹거리며 그 위에 있던 식기들이 한꺼번에 쨍그랑 소리를 냈다. 힘을 조절해서 친 건지 아래로 떨어진 것들은 없었지만 니키엘은 놀라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율란이었다.
“가자니까, 이 짐승 새끼들아.”
살기까지 내뿜을 것 같은 기색이라 앓느니 죽는다는 심정으로 니키엘이 말을 거들었다.
“그래요. 이제 그만 귀가들 하시오. 나도 이제 하루를 마무리해야 내일 무리 없이 떠날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에 짐승들은 어쩐지 끈적한 시선을 보내더니 아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섰다. 식후에 오시니스식 장기의 일종인 킥스를 두며 담소를 나누는 것이 정찬을 함께한 손님에 대한 예의 중 하나였지만 니키엘은 예의 따위는 지키고 싶지 않았다.
‘한국인이 식사 챙겨 줬으면 다 준 거다. 더 바라지 마라.’
그렇게 생각하며 그들을 내보냈던 것이다.
잠깐 그 혼돈했던 식사 자리를 아련하게 회상하던 니키엘은 왕자 궁 마구간지기가 끌고 온 각자의 말에 올라탄 수장들을 보며 대충 손을 흔들었다. 얼른 꺼지란 뜻이었다.
레이먼과 루시안이 막 말에 올랐을 때, 먼저 타 있던 율란이 가뿐하게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금세 니키엘이 배웅을 위해 나와 있던 정원석 위를 디뎠다.
“저런-!”
뒤에서 레이먼이 알아들을 수도 없는 욕을 하는 걸 한 귀로 듣고 흘리고 있던 니키엘을 향해 율란이 고개를 낮추고 속삭였다.
“밤에 새가 찾아오면 문을 열어 주시면 안 됩니다.”
“새가 찾아온다고? 혹시 나의 아기 새를 말하는 건가? 다 나았대?”
니키엘은 그렇게 물어 놓고도 멍청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대관절 발트 대공과 검독수리 사이에 무슨 친분이 있다고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한다는 말인가. 그러나 니키엘의 황당한 물음에도 율란은 한쪽 눈썹만 지그시 올릴 뿐이었다.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엄중히 경고하듯 말하고는 숙였던 허리를 폈다. 눈만 내리깔아 니키엘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묘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꼭 그의 시선이 니키엘이 입고 있던 실크 튜닉과 브레, 깨끗한 면으로 된 속옷까지 남김없이 벗겨 내는 느낌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어쩐지 발라 먹기로 한 맛있는 음식을 보는 것처럼 탐욕스럽기도 했다. 니키엘은 늑대 앞에 선 피식자의 기분을 감추며 쯧, 혀를 찼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여기서 그냥 자고 가기 전에 내 말 들어.”
은근슬쩍 반말하는 게 어이가 없어 째려보자, 율란이 피식 웃으며 니키엘에게만 들리게끔 다시금 속삭였다.
“억울하시다면, 전하께오서도 신에게 말을 놓으시면 될 일입니다.”
“알겠다, 율란아. 가라, 좀.”
니키엘은 냉큼 그의 말을 수용했다. 하대하듯 불렀는데도 율란은 싫은 기색 없이 다시 한번 피식 웃고는 니키엘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그대로 등을 돌려 말에 올라탔다. …뭐야, 왜 저래. 어이가 없어 율란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제 다들 진짜 가시오. 나도 피곤하다니까?”
그 말에 수장들은 더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숙여 간단한 예를 대신 한 다음 말 머리를 돌렸다. 니키엘은 그들이 말 머리를 돌리자마자 어휴, 저 화상들, 하고 중얼거리며 그대로 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현관 아래 서 있던 폴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수장들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몰라. 지들끼리 싸우더니 밥만 처먹고 가 버렸어.”
“전하, 말씀 좀 고아하게 하시면 안 될 일입니까?”
“몰라. 수장들께서 정찬을 즐기시며 한편으로는 입에 걸레를 문 무뢰배들처럼 서로를 헐뜯더니 자리를 뜨셨단다, 폴아.”
폴이 어이가 없다는 듯 니키엘을 바라보았지만, 니키엘은 신경 쓰지 않고 얼른 1층 제 방으로 뛰어 올라갔다. 폴이 뒤쫓아오며 레이먼이 가져온 것에 대해 말했다.
“볼트윅 공작께서 주신 것은 없어지지도, 무르지도 않는 마법 비누입니다. 게다가 내내 뜨끈하여 탕파처럼 껴안고 주무실 수도 있는 마법석도 주셨어요.”
“오, 그래?”
겨울에 유독 약한 니키엘이 반색했다. 얼마나 좋은 걸 주려나 했더니 실용적이기 그지없어 니키엘의 취향에 딱이었다. 자고로 선물이란 실용적일수록 훌륭하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니키엘에게 딱인 물건이었다.
예쁘기만 한 선물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니키엘은 레이먼의 선물에 몹시 만족했다. 그리고 그날 밤, 예쁘기만 하고 쓸모없는 한 송이 들꽃을 부리에 문 채로, 검독수리가 찾아와 니키엘의 침실 유리문을 톡톡 두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