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집으로 오겠다는 두 명의 공작을 말리지 않은 니키엘이었으나, 정작 저녁이 되자 그들이 온다는 사실을 까먹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갑작스레 짐을 챙기느라 미치게 분주했기 때문이다.
“이건 왜 가져가! 필요 없다고!”
“그럼 거적때기를 입고 지내실 겁니까?!”
“장난해? 우리 연회 가는 거 아니라니까?!”
“이테렌에 가시면 가끔 이테니움 성에서 열리는 만찬에 초대되실 거예요. 북부의 영주께서는 예와 의를 아시는 분이니까요! 그런데 사냥터지기 같은 몰골로 참석하시면 시종인 제 얼굴은 뭐가 됩니까!”
폴이 성질을 냈다. 니키엘은 어이가 없었다.
“이야, 폴아. 너 정말 말은 잘한다. 논리는 완벽한데 행동이 모순적이야. 네 말대로라면 성장 몇 벌만 챙겨 가면 될 텐데 이 거대한 옷 상자는 뭔데!”
폴은 쳇, 안 통하네, 하는 얼굴을 했다. 산처럼 쌓여 있는 실크 셔츠와 아신카산 비단으로 만든 브레, 프록코트, 에메랄드, 마노, 바다 수정, 다이아몬드와 핏빛 루비로 되어 있는 브로치와 남성용 장신구들이 가득 담긴 상자들을 질린 얼굴로 바라보자 폴이 낮게 탄식하며 가져갈 것과 두고 갈 것을 나누었다.
양피지와 책을 챙기는 것도 바빠 죽겠는데 폴이 싸 둔 짐까지 검열하려니 운동을 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하체 할 차례인데!”
아쉬웠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 와중에도 율란에게 받은 검을 닦는 건 잊지 않았다. 보석이 박힌 검집이 조금 쑥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보다 보면 화려한 만큼 아름다운 터라 크게 신경 쓰이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게 니키엘이 토벌 대회로 떠나는 자신의 짐을 한 번 더 점검해 볼 때였다. 시종 아이 하나가 오더니 폴에게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폴이 놀란 눈으로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왜. 오늘은 단백질 식단 안 된대?”
운동도 못 했는데 탄수화물이 많으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니키엘을 향해 폴이 말했다.
“그것이…. 밑에 내려가 보셔야겠는걸요.”
“그러니까 왜. 나 필기구도 챙겨야 해.”
“그건 제가 추려 놓을게요. 밑에 투르운 공작님이 오셨답니다.”
“오, 그래?”
니키엘은 반색을 하고 일어섰다. 안 그래도 끝없이 들어간다는 그 함이 필요한 참이었다. 아무리 많이 넣어도 책 스무 권 정도 들어간 상자 무게만큼만 무거워진다는 그 함에 양피지와 필기구도 챙길 생각이었다. 니키엘이 신나서 응접실로 달려가려는데 폴이 그의 뒤에 대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리고 볼트윅 공작님께서도요.”
“엥? 아…. 맞다.”
걔도 온다고 했었지, 니키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뒷머리를 긁적일 때였다. 폴의 표정이 더욱 오묘해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발트 대공께서도요.”
“아니, 누가 왔다고?”
니키엘은 놀라 곧바로 1층 응접실로 향했다. 미리 기별 주지 않고 오는 것은 실례라는 말을 폴에게서 들었을 때 율란의 집에 기약 없이 찾아간 자신을 좀 한심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니키엘은 율란이 그때의 복수를 하러 온 건가,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치만 루시안은 내가 맨날 찾아가도 아무 말 안 했는데. 그게 예의가 아니라면 예의가 아니라고 뭐라 할 놈이지, 이런 식으로 에둘러 복수할 성격은 또 아니란 말이야.’
니키엘이 파악한 율란은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어쨌거나 손님이 오셨는데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일이라 니키엘은 자신의 옷차림을 한번 점검했다. 너무 편한 차림이라면 손님을 맞이하기에 적절하지 않아 안에 계신 고매한 귀족 나으리들께서 또 찧고 까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옷은 갑작스러운 손님을 맞이하기에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다. 1층으로 내려오기 전 폴도 별말 하지 않았기에, 니키엘은 응접실 문 옆에 대기 중이던 도어맨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안에서 치열하기 그지없는 살기가 순식간에 밀려 나왔다. 예민한 데다가 기가 약한 편인지, 문 옆에 서 있던 시종 하나가 픽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니키엘은 쓰러진 시종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다른 이에게 그이를 옮겨 의사의 진료를 받게 하라 명령한 뒤 안으로 향했다.
“객으로 왔으면 조용히들 있을 것이지, 왜 남의 집에서 살기는 내뿜고들 있는 게요! 귀공들의 살기가 일반인들이 버틸 수 있는 정도의 것인 줄 알아!”
그가 그렇게 소리를 치며 안으로 들어가자, 루시안이 벌떡 일어나 니키엘을 바라보았고, 레이먼은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다가 곧이어 허리를 곧게 펴 니키엘을 향해 웃음 짓는 반면, 율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일어나지도 않고 있었다.
이곳으로 와서 정을 붙인 왕자 궁 사람들 중 하나가 쓰러지자 니키엘은 드물게 화가 났다. 경계심이 심한 대신 울타리 안으로 들인 이에게는 한없이 다정한 성격인 니키엘은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시종이 기절하자 진심으로 화가 난 상태였다.
“뭣들 하시느라 남의 집 귀한 시종을 기절시킨 게요!”
니키엘이 드물게 화를 내자 루시안은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인사를 하려다 만 채 멈춰 서 있었다. 레이먼 역시 입가에 걸쳐져 있던 미소를 서서히 내렸다.
“…귀한 시종? 얼마나 귀하십니까?”
그때, 율란이 뜬금없이 물었다. 니키엘이 율란을 노려보았다.
“내가 먼저 물었지 않소.”
“…….”
그러자 또 입을 꾹 다문다. 니키엘은 어이가 없어졌다. 왜 저래? 나머지 둘은 온다고 말이라도 했지 율란은 뜬금없이 찾아온 터라 대체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니키엘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투르운 공과 레이먼은 기별이라도 하고 방문했지만, 발트 대공께서는 여긴 웬일이신지 궁금하군.”
“지난번 저의 사저를 찾아오셨을 때도 저도 똑같이 그 이유가 궁금했지만 부러 묻지 않았습니다, 전하.”
“그건 병문안 간 거였잖아!”
내내 이상한 말만 하는 율란이 이해되지 않아 꽥 소리를 지른 니키엘을 바라보던 루시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발트 대공은 삼박사일 동안 쿤드라 빙하에 머리부터 처박아 둬도 낮잠만 쿨쿨 잘 잘 위인입니다. 어찌하여 그런 기력 소비를 하셨습니까, 전하.”
니키엘은 그런 루시안을 흘끗 바라보다가 너라도 대답해 보라는 식으로 말했다.
“아니, 왜 남의 집 응접실에서 살기를 흘리고 있었는지나 대답들 해 보시라니까. 내 말이 우습소?”
“그건 절대 아닙니다, 전하. 이리 오시지요.”
루시안이 안타까운 표정을 하며 다가와 니키엘을 달래듯 에스코트했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움직임에 레이먼이 움찔거렸고 율란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방울뱀 새끼는 그동안 전하의 옆에서 어지간히 딸랑거렸으니 그렇다 치고, 왜 저 무식한 사슴 새끼도 이름으로 부르는데 나는 발트 대공입니까.”
“말투에 배워 먹은 곳이 하나 없습니다, 대공. 그보다 안 바쁩니까? 전하도 말씀하셨다시피 나는 목적이 있는 방문입니다.”
레이먼이 눈웃음을 치며 율란에게 니키엘 대신 대답했다. 니키엘은 왠지 모르게 골이 아팠다.
‘이건 마치…. 총장한테 연구지원금 뜯어 내려고 서로 물어뜯는 아귀 떼가 되어 버린 학과장들을 보는 기분인데…. 대체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거지.’
남의 집에서 별안간 서로 싸워 대는 세 명의 고위 귀족을 바라보며 니키엘은 그냥 제가 먼저 이유 듣기를 포기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그만들 하시오. …일단 오셨으니 세 분 다 식사 전이라면 저녁부터 드는 건 어떻겠소. 다들 식사하셨다면, 용건만 말하고 빠르게 나가 줬으면 좋겠어. 귀공들의 살기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머리가 아프십니까?”
루시안이 니키엘의 이마에 잽싸게 손을 댔다. 가만히 앉아 있던 니키엘은 맞닿은 면을 통해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기분에 살짝 시원하기도 하고, 대체 언제 다가와 제 이마에 손을 올려 둔 것인가 싶어 어이가 없기도 해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때 레이먼이 슬쩍 웃으며 루시안의 손목을 잡아 내렸다.
“이런 식으로 전하의 몸에 페로몬을 발라 두었군, 실뱀 새끼가.”
“그런데 공께선 언제부터 전하의 궁에 방문하실 정도가 되셨습니까? 일전에 전하께 행한 모든 무례를 용서받기라도 하신 겁니까?”
두 사람은 웃는 낯으로 칼을 품고 서로를 향해 독설을 내뱉었다. 니키엘은 짜증을 냈다.
“밥 안 먹을 거면 둘 다 나가.”
응접실에 있던 네 명의 남자 중 유일하게 아직까지 앉아 있던 율란이 다리를 꼬며 물었다.
“이왕이면 식사에 사슴고기가 있었으면 좋겠군.”
니키엘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훌륭한 저녁이었습니다, 전하.”
“내일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토벌이 시작하면 제 곁에 꼭 붙어 계셔야 합니다.”
왼손은 레이먼에게, 오른손은 루시안에게 붙잡혀 손등에 입맞춤을 당하며, 니키엘은 불퉁하게 말하는 율란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란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세 남자는 저녁 식사 자리 내내 이런 식으로 서른다섯 번의 기 싸움, 스물한 번의 이죽거림, 열세 번의 자잘한 욕설들을 지속하며 서로를 견제했다.
‘대체 왜?! 사이가 나쁘면 저들끼리 싸울 것이지 왜 우리 집에 와서 싸우냐고!’
니키엘은 이들이 왜 갑자기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조용한 식사를 선호하는 니키엘은 그들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통에 식사를 즐기지도 못했다.
어쨌든 당장 내일 출발하니 늦은 저녁이라도 평화롭게 즐기고 싶었는데 말이다. 니키엘은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