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애초에 그들은 니키엘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화가 나 있었고, 이유를 안 후에도 딱히 이해 가지 않는 일들로 니키엘에게 분노를 표출하고는 했었다.
누군가 저를 먼저 건들지 않는 이상 화를 내는 일이 드문 니키엘에게는 그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았다.
‘둘 다 나랑 결혼할 마음도 없어 보이던데. 그럼 대체 이 몸이 걸레인 게 본인들이랑 무슨 상관이야. 정말 나를 사랑해서 배신당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닐 텐데 말이야.’
니키엘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계속해서 걸었다. 가스파르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하기는 했으나, 곧 있으면 토벌 대회이니 사냥부에 소속되어 있는 미네르비나에게 대신 물으면 될 것 같았다. 잠깐 만난 기억뿐이지만 호쾌한 성격 같았으니 니키엘이 묻는 것에 대해 친절히 답해 줄 것 같았다. 적어도 그녀의 주인 나리보다는 나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면에 닿는 걸음을 신중히 내디뎠다. 니키엘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에는 모든 신발의 밑창이 생각보다 얇아 발목을 다칠까 걱정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의외로 밑창이 얇을수록 지면의 울퉁불퉁함에 발목이 단련되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래서 운동화를 신으면 오히려 달리기 패턴이 무너진다는 거구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떠올리며 걷던 니키엘은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짐짓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니키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상대는 레이먼이었기 때문이다.
가스파르 백작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걸었더니 그가 나타난 우연에 신기하여 빤히 쳐다보고 있자니, 레이먼은 니키엘을 발견했으면서도 저 멀리서 굳은 듯이 서 있었다.
무도회 때는 이름을 불러 달라고 친한 척을 할 때는 언제고, 그런 것들은 그저 그날 하루의 즉흥적인 제안에 불과했는지 이쪽을 빤히 바라만 보길래 그냥 먼저 고개를 까닥여 가벼운 인사를 대신하고는 가던 길을 가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멈춰 서서 인사를 나눌 정도로 친근감 있는 사이도 아니었다.
이름으로 불러 달라 했던 것은 어쩌면 다른 수장들을 향한 견제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때마침 들었다. 레이먼은 율란을 증오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레이먼이 율란을 싫어하는 이유는 누나의 죽음 때문이었지.’
원작을 알고 있는 니키엘은 천천히 그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굵직한 사건들은 미리 정리를 해 둔 터라 메모를 보면 알 수 있었지만, 어쩐지 요즘에는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레이먼의 누이가 율란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는 건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레이먼의 누이인 라일라 볼트윅은 남매의 백부인 다이머스 볼트윅의 음모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니키엘은 처음에, 이 점을 이용해 레이먼의 경계를 허물려고 했었다.
‘그런데 저 자식이 너무 싸가지가 없었어.’
이용한다고 해도 사실은 레이먼과 율란에게 좋은 일이었다. 누이가 그렇게 된 것이 레이먼에게는 크나큰 고통으로 느껴지는 만큼, 적어도 진실을 밝혀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짐을 덜 테니 말이다. 그러나 레이먼이 니키엘을 그런 취급 하는 통에 너는 율란을 오해하고 있다, 라고 말해도 그가 그 말을 들어 줄 것 같지 않았다.
근래 들어 관계가 진전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살갑다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사이도 아니었고, 그가 자신의 말을 무조건 믿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그러니 원작의 니키엘도 마물 토벌 대회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에 다이머스의 음모를 말해 주었겠지.
‘흠…. 그래도 요즘엔 성격 많이 죽었던데. …그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사람은 잘 안 바뀐다고 생각하는 니키엘로서는 레이먼의 변화가 급작스럽게 느껴졌다. 때문에 요 근래 친한 척을 하는 것도 어쩌면 다른 수장들, 특히 율란을 견제하는 행동의 일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쨌거나 니키엘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가스파르에 대한 것들도 그날 이후로 사교계의 소문이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우세한 방향으로 변했는지 궁금했을 뿐이지 나중에 미네르비나에게 들어도 상관없다고 방금 마음먹었던 참 아니겠는가. 니키엘은 계속해서 왕자 궁으로 향했다. 옆에서 말을 거는 이만 없었어도 멈추지 않고 왕자 궁까지 도달했으리라.
“즐거운 오후입니다. 전하.”
…엥? 언제 왔지? 니키엘은 화들짝 놀라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덩치가 더욱 태산 같아 보이는 남자는 해를 등진 채 니키엘에게로 고개를 살짝 숙인 채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니키엘은 그의 표정을 보기 위해 시선을 들었다가 쏟아지는 햇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손바닥이 차양처럼 내려와 니키엘의 눈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막아 주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 있게 된 니키엘은 그제야 제게 그런 친절을 베푼 이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 고맙소 공.”
레이먼은 잠시 대답하지 않고 빤히 니키엘을 바라보더니 슬쩍 웃으며 말했다.
“지난번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청을 들어주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게 유효한 청이었단 말이야? 니키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내가 아직 익숙지가 않아서. 미안하오, 레이먼.”
“존칭도 생략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놓으라는 얘긴가? 안 그래도 레이먼이 고까웠던 니키엘은 냉큼 수락했다.
“그러지.”
그러나 레이먼은 무례할 정도로 빠른 그 대답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을 향해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가 봄바람을 머금은 듯 선선해 보여 니키엘은 등골에 소름이 일었다.
‘왜 저렇게 웃어…? 온 왕궁 사람들에게는 다 저렇게 웃어도 내게는 저러지 않던 작자인데.’
당황스러웠다. 얼른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 난 이제 왕자 궁을 가려던 참이라.”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어? 아니 굳이 그럴 필요가….”
“오늘은 어디를 다녀오시던 길이었습니까?”
니키엘은 상대의 사근사근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압박 면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왜 그런지 고찰해 보니 결론은 쉽게 나왔다. 레이먼은 니키엘을 만난 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존칭을 생략해 달라는 청은 부드러웠지만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왕자 궁까지 에스코트하겠다는 친절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니키엘의 사양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자식…. 오늘따라 좀 끈질기네…?’
니키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레이먼을 흘겨보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레이먼은 그동안 니키엘을 아주 부드러운 태도로 에스코트하여 왕자 궁으로 인도하고 있었고, 발밑에 비단신이 밟으면 아플 만한 험한 것들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 동시에 니키엘이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만 어깨를 스쳤다. 게다가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로 말투는 상냥하기 짝이 없었다.
‘맞다. 얘 바람둥이였지.’
이 사람 저 사람 다 만나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수장들에 비해 경험이 많은 데다 연애 기간은 짧은 남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레이먼의 에스코트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위화감을 조성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손을…. 왜 저렇게 떨어?’
레이먼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안으로 구분될 정도로 떨고 있는 그를 보며 니키엘은 뭔가 싶어 레이먼을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가 다시금 니키엘을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여전히 훌륭한 미소였다. 그런데 손의 떨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니키엘은 이 남자가 어디 아픈가 싶어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또 지난번처럼 궁 한복판에서 순록으로 변하는 건 아니겠지?’
타당한 의심이었다. 결국 니키엘은 레이먼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열이 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저절로 손을 뻗기도 했다.
“레이먼, 그대 어디 아픈가?”
니키엘의 손등이 레이먼의 이마에 살짝 달라붙은 동시에 물었다. 레이먼은 걸음을 멈춘 것 같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픈 곳 없습니다. 전하.”
이번에도 흠잡을 곳 없는 미소였지만, 니키엘은 더더욱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먼의 뒷덜미며 귓등이 불에 댄 듯이 새빨갛게 익어 버린 것이었다.
“아니, 안색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로 레이먼의 얼굴은 불에 달아오른 빨간 숯처럼 보였다. …이 가을에 열사병이라도 걸린 건가? 아님 역병에라도 걸린 거 아니야? 니키엘은 놀라워 레이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레이먼이 여전히 안색 외에는 모든 것이 훌륭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 보시면 긴장이 되어 아예 머리가 터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전하.”
“음? 무슨 긴장을 한다는 거야.”
혹시 마물이 나타났나 싶어 두리번거리던 니키엘은 저를 빤히 보는 시선에 이내 고개를 들었다. 안색이 어느 정도 진정된 레이먼이 여전히 그림 같은 미소를 띠고 다시금 니키엘에게 걸을 것을 부드럽게 권유했다.
“그런데 전하, 여기까지는 웬일이십니까. 오늘은 행낭을 꾸리느라 바쁘실 텐데.”
“아, 투르운 공에게 책과 필기구를 정리하는 마법 함이 따로 있나 해서.”
책이라고 말하면, 레이먼이 네가 그런 것도 읽냐고 비웃을 거라 예상한 니키엘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레이먼은 예상과는 다른 말을 했다.
“그런 편리한 여행용품을 찾으시는 거라면 제게도 있습니다.”
“오, 그래?”
니키엘이 솔깃하여 레이먼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변함없이 봄바람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간신히 가라앉았던 귓등의 붉은 기운이 다시금 달아오른 것인지 터질 듯 빨간 귀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