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때문에 니키엘은 루시안을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새벽에 아기 새가 날아가 버린 탓에 소동이 일기는 했지만 숙면을 취한 터라 몸 상태가 무척 좋았다.
니키엘은 짐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는 폴에게 대충 둘러댔다.
“나 그, 저기, 갔다 올게.”
“예? 어디를 가신단 말씀입니까?”
“그, 있잖아. 거시기, 다녀올게, 아무튼!”
정말 대충 둘러댔다. 후다닥 왕자 궁을 나오는 니키엘의 뒤에 대고 폴이 “대체 이 바쁜 때 어디를 가신다는 거예욧!” 하고 성을 냈지만 뒤돌아보는 즉시 붙잡힐 것을 알아, 지난번 샌드위치를 주며 친해진 마부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어서 마차를 대령하라는 듯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늘에 앉아 올리브 빵을 찢어먹고 있던 마부가 허둥지둥 일어나 모자를 꾹 누르며 마차를 향해 뛰쳐 갔다.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이 앞으로도 꾸준히 무언가를 찔러 줘, 폴의 눈을 피해 자신을 도주시킬 참된 일꾼으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십쇼, 전하!”
“자네, 정말 마차를 잘 모는군!”
그렇게 주종은 합이 척척 맞아 뒤쫓아오는 시종, 폴을 따돌린 채로 왕자 궁을 나설 수 있었다. 마법국 건물로 가자는 니키엘의 말에 마부는 어려울 일 없다는 듯이 쾌활하게 말을 몰았다.
아침에 몰래 돌아올 때 율란이 내어준 마차도 나쁘지 않았지만, 성격 급한 한국인이 타기에는 왕자 궁 마차가 최고였다. 그라실 저택에서 타고 온 마차는 어찌 된 일인지 너무도 느리고 안전 운전만 하는 터라 성격 급한 니키엘의 복장이 홀라당 타 버렸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탈것은 빨라야지.”
교수님 모시고 부산으로 학회 한 번 갔다가 신세계를 맛보고 돌아온 뒤, 니키엘의 운전관은 180도 변하였다. 마차라고 다를 것 없었다. 빠르면 장땡인 것이다. 그렇게 마차는 오늘도 니키엘을 만족시킬 만큼 빨리 마법국 건물 앞에 그를 내려 주었다.
“나 혼자 알아서 갈 테니 먼저 가 있게!”
“예, 전하!”
폴 같았으면 아니 된다느니, 체통을 지키라느니, 또 혼자 걸어올 생각이냐느니, 대체 약초꾼인지 왕자 전하신지 알 수가 없다느니 잔소리했겠지만, 다소 시원한 구석이 있는 마부는 그런 것들은 전혀 묻지 않은 채 왔던 것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니키엘은 경쾌한 마음으로 마법국 건물 앞으로 다가갔다. 오늘도 역시 문 앞에 경비병이 서 있었는데, 그들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왜냐하면 늘.
“전하! 어쩐 일이십니까?”
탑 꼭대기에서 라푼젤이 머리를 내려 주듯, 대단한 미인이 직접 탑 아래로 내려와 니키엘을 맞이했으니 말이다. 니키엘은 오늘도 자신의 예상을 저버리지 않는 루시안이 반갑기도 하고, 그를 만난 것이 기쁘기도 해 씩 웃었다.
“무도회 이후에 경황이 없어서 공을 찾지도 못하였소.”
“…제 생각을 하셨습니까, 전하.”
“응. 원래 그런 큰 행사가 끝나면 뒤풀이를 해야 하지 않아. 여긴 그런 게 없나?”
루시안은 니키엘의 말을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지우지 못한 채 웃고 있었다. 그이의 장밋빛 뺨을 바라보자, 니키엘 역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간만에 반가운 이를 봤다는 것에 상기되어, 말투가 격의 없어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루시안이 내 얼굴보다 훨씬 예쁜 것 같아. 매스미디어가 있는 시대에 태어났으면 전 세계를 풍미했을 텐데. 아쉽다.’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루시안의 팬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며, 니키엘은 루시안이 저를 탑 위로 끌어올려 주길 기대하며 그이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읏, 전하….”
“아, 내가 너무 격의 없었나? 그렇지만 우리는 춤도 춘 사이고, 또 올 때마다 이렇게 올라갔으니까….”
루시안은 니키엘의 손에 닿자마자 몸을 움찔 떨었다. 니키엘은 자신에게서도 신성력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등골이 오싹했지만 괜히 티를 냈다가 사이가 어색해질까 봐 딴청을 했다.
변명이랍시고 말한 것들이 조악하여 저절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루시안에게도 걸레 취급당하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이 세계에서 폴 빼고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는데. 사이가 멀어지긴 싫어.’
벽이 두꺼울 뿐, 한번 제 울타리로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한없이 치대는 걸 좋아하는 니키엘은 혹시나 루시안이 제 행동을 불편하게 여겼을까 봐 지레 놀라 팔을 풀고 멀어지려 했다.
그때였다. 두껍고 단단한 팔이 니키엘의 허리를 감아 든 것이다. 덕분에 니키엘은 루시안의 품에 꽉 안기는 수밖에 없었다.
“공, 지금 무얼 하는….”
“촌스럽고 경험이 없어 전하께서 베푸신 친근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음번에는 그 누구보다 전하의 팔에 안기는 것을 기뻐할 자신이 있으니 오늘 일을 괘념치 마시고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면 좀 이상한데…. 훤한 대낮에 길거리에서 마법국 장관을 껴안은 사람이 된 것 같아 민망해졌다. 그러나 니키엘은 루시안이 제 답변을 기대하며 빤히 바라보는 걸 더 외면하기가 힘들었다.
만약 이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특히 레이먼이 있었다면 ‘본인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순결하다는 걸 강조하고 있군, 저 음흉한 뱀 새끼.’ 하며 어금니를 바드득 갈았을 테지만, 다행히 이 자리에는 루시안과 니키엘뿐이었다.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난 그저 우리 사이가 전보다는 좀 더 친근해진 듯하여 그랬소. 아, 이상한 뜻은 아니니 오해 마시오.”
“저는 그 이상한 뜻이 더 마음에 드는걸요, 전하.”
“음?”
니키엘이 방금 무슨 말을 했냐는 듯 루시안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니키엘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아 제 가슴팍으로 잡아당긴 루시안이 그들의 발밑에 대기의 와류를 일으키는 마법을 불어넣어 공중 위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지며 발밑에 아무것도 닿지 않게 되자, 니키엘의 등골을 타고 전율이 일었다. 이것이 추락에 대한 옅은 공포감인지, 아니면 맞닿은 틈을 통해 빠져나가는 신성력이 주는 흥분감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니키엘은 꽤 즐거웠다. 루시안은 시종일관 정중한 태도로 니키엘을 커다란 창문까지 에스코트해 주었고, 니키엘은 익숙하게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은 전보다 더 어수선했다. 당장 내일 토벌 대회를 떠날 참이니, 루시안도 짐 정리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밑에 층에서는 소음이 일며 많은 사람이 오가는 소리가 났다.
마법국의 직원들, 즉 마법사들이 내일 있을 출정식을 위해 짐을 챙기고 있는 것이었다. 니키엘은 그제야 용건이 생각났지만 루시안이 이미 손짓 몇 번으로 방 안에서 가장 너저분했던 테이블 위를 깨끗하게 만든 뒤 어디 있었는지 모를 하얀 융을 가져와 테이블 보처럼 그 위에 깔아 니키엘에게 자리를 권했기 때문에 일단 앉는 수밖에 없었다.
“바쁠 때 온 듯해 민망하군.”
“전하께오서는 그런 걱정을 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당치 않다는 듯 말하는 태도가 사뭇 단호했다. 약간 머쓱해진 니키엘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함에 대해서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루시안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하온데, 전하.”
“무엇이오.”
“어디서 개 비린내가 지독하게 나는데, 사육장에라도 다녀오셨습니까?”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든 니키엘은, 루비처럼 새빨갛던 루시안의 눈동자 속 검은 홍채가 세로로 쪽 찢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니키엘은 꼭 거대한 타이판이라든지, 버마왕뱀을 마주한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앞에 앉아 있는 것이 소속사 사옥의 지하 연습실에서 수년을 갈고 닦은 뒤 K-pop을 이끌어 나갈 아이돌처럼 예쁘고 다정한 남자가 아니라 송곳니에서 독액이 뚝뚝 떨어지는 이무기와 같다는 걸 이제야 떠올린 것처럼 말이다.
니키엘이 찻잔을 든 채로 동작을 멈추자 루시안이 그제야 사방을 메우던 살기를 걷어 내고 눈매를 어여쁘게 일그러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하, 옆자리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 무얼…?”
니키엘은 갑작스레 봄바람처럼 사근해진 기색에 적응하지 못한 채 두 눈을 깜빡였다. 그는 니키엘의 대답을 이미 들은 사람처럼 다가와 니키엘이 앉아 있던 소파 등받이에 손을 뻗으며 앉았다. 그 동작이 부드럽기 그지없어, 니키엘은 제가 아직 루시안에게 허락의 말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지 못한 채였다.
세로로 쪽 찢어져 있던 동공이 제자리를 찾으며, 루시안이 니키엘에게로 슬쩍 몸을 기울였다.
그의 목덜미에서 진한 향이 느껴졌다. 맡아 본 적 있는 향에, 니키엘의 체온이 자연스레 상승했다. 루시안이 멍하니 넋을 놓은 니키엘을 들여다보며 그의 뺨에 달라붙은 아마 빛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방금은 놀라셨지요. 광증이 조절되지 않아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니…. 난 괜찮은….”
루시안이 꼭 벽을 치듯이 니키엘의 주변으로 살기를 보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정통으로 맞았다가 그대로 실신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래서 어제 율란도 그 성환이(성병 환자)랑 싸우면서 살기를 내 쪽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했구나.’
니키엘은 어젯밤, 율란이 했던 행동에 대해 그제야 이해가 가는 기분이었다.
“이 짐승은 이렇게 가끔 이성을 잃곤 합니다. 혹여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는 멀리 도망가셔야 합니다.”
그러나 루시안은 그렇게 말해 놓은 주제에 좀 전보다 더욱 니키엘에게 몸을 붙여 왔다.
나는 뱀보다 교활한 사내를 알고 있다. 그의 가장 불한당 같은 점은, 평소에는 독니 따위는 모르는 초식 동물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레이먼 볼트윅 공작, 성 바르울트 신전에서 옛일을 회고하며.
니키엘의 머릿속에 잊은 줄 알았던 원작 책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딱 그 구절이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풀어지려는 동공을 바로 하려 노력해 보았다.
그 사이, 옆자리에 앉은 채 허리를 틀어 니키엘을 바라보고 있는 루시안의 단단한 가슴팍에 니키엘의 상박이 붙었다. 찌릿하는 느낌과 함께 신성력이 흘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처럼 가만히 계시면 안 됩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