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08)화 (108/130)

108화

“나의 전하께서 드디어 미치셨군.”

율란이 짓씹듯 말했다.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올려 두고 있던 니키엘이 어이가 없어 그걸 잡아 내리며 되물었다.

“뭐요?”

율란은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욕실로 들어가 대리석으로 만든 욕실용 테이블 위에서 모슬린 잠옷 상의를 가져와 니키엘에게 내밀었다.

“입고 말씀하시지요.”

“아니,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라-.”

“이게 문제가 아니면, 계속 그렇게 벗고 있겠다는 겁니까?”

“입긴 입을 거지만…. 그보다! 대공이 먼저 내 침실로 들어온 것 아니오?! 나는 뭐 발가벗지도 못하나? 혼자 있는 줄 알았다니까.”

그 말에 율란이 낯빛을 서늘히 굳힌 채 말했다.

“혼자? 저기 있는 저 새 새끼는 뭔데.”

“…어, 뭐?”

니키엘의 어이가 탈출을 감행했다. 다신 돌아오지 않겠다며 못까지 박았다. 사라진 어이를 찾아 조선 시대 어의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니키엘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니키엘은 멍하게 눈만 깜빡였다. 그러길 수초, 저절로 찌푸려진 인상을 펴지 못한 채 물었다.

“그러니까 대공께선 지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함께 있던 새가 보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옷을 훌러덩 벗고 나왔다고 잔소리를….”

“입기나 하십쇼.”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니키엘은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아니, 대공! 지금 저기 아픈 새랑 내가 상의를 벗고 나온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대공에게 미쳤느니 파쳤느니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게요! 그리고, 매번 걸레다 뭐다 나를 모욕하는데, 내가 대체 여기까지 와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뭐야!”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자 가만히 듣고 있던 율란이 한쪽 눈썹을 서서히 올리더니 말했다.

“알겠으니까 옷부터 입어.”

“이런 썅!”

니키엘은 욕을 내뱉으며 옷을 꿰어 입고는 율란의 등을 퍽퍽 밀었다. 단단해서 밀리지도 않았다. 충격적이었다. 내일부터는 푸시업 개수를 늘리겠다고 생각하며 율란을 향해 소리쳤다.

“나가! 지금 그냥 다 홀딱 벗어 버리기 전에 나가!”

“저 새와 전하만 남겨 둘 수 없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수리와 나만 왕자궁으로 갈 테니 마차를 내어 주시오.”

“하아….”

니키엘이 짜증스럽게 말하자 율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는 마뜩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니키엘이 돌아간다고 어깃장을 놓으니 한발 물러나는 듯해 보였다.

“…만약, 자는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제 이름을 부르십시오.”

“자는 사이에 뭔 일이 생기겠소. 대공저에 경비가 허술하지 않은 이상 그럴 일 없으니 이제 그만 대공께서도 물러가요. 나도 쉬고 싶소.”

그 말에 침실 문을 향해 몸을 틀긴 했어도, 그는 계속해서 침대에 누워 잠든 불쌍하고 가녀린 새를 가늘게 뜬 눈으로 주시하다가 니키엘에게 계속해서 경고답지 않은 경고들만 남긴 채로 드디어 방을 나섰다.

새가 품에 파고들면 목을 졸라라, 부리로 뺨을 쓸거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으면 그대로 날개를 꺾어 버리고 자신을 부르라는 경고였다.

율란이 말한 행동들은 과거 검독수리가 니키엘의 침실에서 머물렀을 때 보이던 행동 양상이긴 했다. 그렇다 해도 대체 다친 새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 이유는 뭐란 말인가.

“나 원, 어이가 없어서.”

니키엘이 혀를 쯧, 차며 침대로 돌아갔다. 소란에 혹시나 새가 깨지 않았을까 싶어 살펴보았으나 아직도 쥐 죽은 듯 자고 있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내일은 아프지 마, 수리야.”

니키엘은 천천히 검독수리의 상처에 감긴 붕대를 손으로 더듬었다. 기분 탓인지 손끝이 저릿거리는 기분이라 몇 번 쓰다듬어 주다가 말았다.

니키엘에게도 나름 하루가 길었던 탓에 금세 곤해졌다. 방을 밝히는 제일 큰 야광석을 꺼트린 니키엘은 다시금 침대에 올라 검독수리 옆에 누웠다.

이불로 들어간 니키엘은 가을밤인데도 훈훈한 손님용 침실을 어둠 속에서 둘러보았다.

“그래도 손님 대접은 제대로 하는구만…. 제프콕이 일을 잘하긴 하더라고….”

아무래도 좋을 말들을 중얼거리며, 니키엘은 자신이 잠에 빠져드는 걸 막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단꿈에 젖어 잠들었을까.

니키엘은 무언가 품에 파고드는 기척에 따뜻하기도 하고 간지럽기도 해 몸을 뒤척이다 저를 껴안는 커다란 것을 마주 안았다.

“으음….”

“쉬-.”

괜찮다고 더 자라는 듯 토닥이는 손길이 익숙했다. 외동에다가 아들을 독립적으로 키우신 부모님은 니키엘이 어렸을 때도 이렇게 살갑게 안아 주시지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잠든 니키엘을 따스히 안아 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품이 따뜻해 더 파고들었다.

“음….”

뒤척이면 뒤척이는 대로 쫓아와 껴안는 손길이 집요했다. 잠이 깰 정도로 불편한 것은 아닌지라 더욱 깊은 잠에 빠져들려고 할 때였다.

“이 미친 새끼-.”

살벌한 욕설과 함께 누군가 침대 밑으로 우당탕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움찔한 니키엘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그때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뒤집어지고 물건들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났다.

“헉-!”

니키엘은 놀라 일어났다. 침대 옆 콘솔을 더듬어 야광석에 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 봤지만, 늘 폴이 해 주던 일이기에 쉽지 않았다. 겨우겨우 부싯돌 격인 작은 야광석과 큰 야광석을 맞부딪쳐 생긴 마찰 마력으로 야광석을 밝힐 수 있었다.

방 안이 환해지자, 니키엘은 놀라 헉 소리를 질렀다.

“뭐, 뭐 하는-!”

엉망이 된 침실 한복판에서, 웬 금발 남자와 뒤엉켜 싸우고 있는 율란이 있었다.

“대공!”

“별것 아닙니다.”

율란이 아무렇지 않게 니키엘의 부름에 대답하자마자, 금발의 남자가 바닥에 뒹굴던 책의 모서리로 율란의 측두부를 찍었다. 율란이 팔꿈치로 그 공격을 막아 내자마자, 남자는 그 공격 자체가 속임수였다는 듯 비어 버린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단단한 정강이뼈에 측복부를 가격당한 율란이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까분다.”

“…….”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처럼 낮은 목소리로 율란이 말하자, 방 안에 순식간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주위를 얼려 버릴 듯 내뿜어지는 살기였지만, 니키엘에게는 와닿지 않았다. 니키엘은 이제 막 검술을 배워 가던 참이지만 오감이 예민한 편이라 율란이 제게 닿을 살기는 거둬들였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상황이 긴박한데 대한민국 육군병장을 뭘로 보고 이런 배려를 다 하지.’

아무리 봐도 자객의 습격 같은데 저를 배려해 주는 게 어이없었다. 그 사이, 율란은 그대로 팔을 뻗어 금발 남자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커다란 아귀에 잡힌 굵고 긴 목덜미가 금세라도 찢어질 듯 위태해 보였는데, 남자가 율란의 팔뚝을 잡아채며 몸을 휙 돌린 탓에 금세 잡았던 멱살이 풀려 버렸다.

남자는 허리를 돌렸던 반동으로 몸을 반대로 꺾으며 이번에도 다리를 메다꽂았다. 목표 지점은 율란의 상부 승모근과 어깨 사이인 듯했다. 이번에도 팔뚝으로 막아 낸 율란은, 쉽게 공격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반 발자국 정도 주춤거렸다. 타격이 큰 공격을 막아 내느라 버거웠던 것이다.

니키엘은 소드마스터인 율란이 왜 검으로 상대를 공격하지 않는지 이상했다. 그때였다. 율란이 반격을 위해 몸을 숙인 다음 이번에는 금발 남자의 허리를 붙잡아 그대로 들어 올린 뒤 바닥에 메다꽂았다.

놀란 니키엘이 저도 모르게 으, 아프겠다, 하고 중얼거렸을 때였다. 낙법을 이용해 금세 일어난 금발 남자가 그대로 창문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창문 근처에는 니키엘이 어정쩡하게 앉아 있던 침대가 있었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놀라고 말았다. 야광석에 빛이 충분하지 않은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남자는 아예 다 벗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뭐야, 변태…?’

바바리맨 같은 게 성에 들어온 건가? 놀란 니키엘이 눈만 깜빡이던 순간, 순식간에 침대 근처로 다가온 남자가 고개를 숙여 니키엘의 뺨에 쪽, 하고 가벼운 버드 키스를 남긴 것이다.

“뭐, 뭐야-!”

그런 다음 놀란 니키엘이 밀쳐 내기도 전에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마자 남자가 서 있을 법한 벽면에 책 한 권이 날아와 그대로 벽에 꽂혔다.

“책이, 벽에….”

여러모로 놀랄 일밖에 없던 니키엘이 입을 떡 벌리고 벽에 꽂힌 책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그대로 창가를 향해 달려간 남자가 창문을 열더니 밖으로 뛰어내릴 사람처럼 난간에 선 것이다.

“어, 어…?”

니키엘이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남자가 자신의 목을 손으로 잡더니 고개를 절레 저었다.

“말을, 못 한다고…?”

니키엘은 남자의 손동작을 읽고 중얼거렸다. 정답이라는 듯, 남자가 니키엘에게 한쪽 눈을 찡긋였다. 그런 다음 그대로 창문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어?!”

니키엘이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새까만 어둠이 창문 밑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 뿐, 밖에는 여명조차 트지 않은 채라 보이는 것이 없었다. 산새 한 마리가 푸드덕 날아가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귀신에게 홀린 기분으로 니키엘은 침대를 돌아보았다가 꽥 소리를 질렀다.

“우리 아기는?!”

율란이 그 꼴을 보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상당히 유감이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기는, 씨발-.”

당황한 나머지 율란이 욕을 지껄인 것도 모른 채 니키엘은 침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아기 새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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