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106)화 (106/130)

106화

루시안과 레이먼은 긴급하게 소집되었던 회의가 파하자 자신들이 해야 할 것을 복기했다.

“지키에게 부상 입힐 정도면 만만하지 않겠는걸.”

“…지적 존재가 마물을 결집시켜 군대처럼 대응했다면 지키도 쉽지는 않았을 겁니다.”

두 사람은 지도를 펼쳐 지카리가 비행했을 경로를 추적하며 한동안 더 말을 나눴다.

“지키가 깨어나면 정보 길드 통해서 각 지역에 마물들이 북쪽으로 이동 중인지 살펴보자고.”

“네, 일단 전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다니까-.”

화제가 니키엘로 흐르자, 두 남자는 잠시 각자의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루시안이 먼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발트 대공은 아까 전 왜 그렇게 빨리 자리를 뜨신 겁니까?”

“지키한테 가 본다고…. 음, 그렇군.”

부상당한 지카리에게 가 보겠다고 자리를 일찍 뜬 율란을 레이먼 역시 이상하다 생각했다.

율란이 각 수장들을 급하게 소집한 것은 오후의 일이었다.

‘지카리가 복부에 창상이 난 채로 복귀했다. 보고를 위해 대공저를 먼저 찾은 모양인데 아직 의식은 차리지 못했다.’

율란은 그 말을 끝으로 토벌 대회의 기일을 앞당기자고 말했다. 다른 두 사람도 이견은 없었다.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모레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는 걸로 하지. 궁내처장에겐 출정식을 축소시키라고 전해. 가능하면 폐하께선 그날 아침잠을 너끈하게 주무셨으면 한다고.’

그러더니 그대로 자리를 떠 버렸다. 남은 두 남자는 율란의 그 재빠른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때였다면 검은 가시 기사단에게 이 사실을 알린답시고 바로 연무장으로 내려가거나 기사단의 좌장군이나 우장군에게 말을 전했을 터였다.

그리고 지카리에게 가 본다 한들, 지카리의 상처가 깊은 만큼 오늘 의식을 바로 차릴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개자식이 그렇게 지키를 살뜰하게 챙기는 성격은 아닌데.”

레이먼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금 중얼거렸다. 나이가 가장 어린 데다가 성장이 덜 끝난 탓에 다른 수장들도 지카리를 신경 쓰긴 했지만, 모두 살가운 방식은 아니었다. 그런데 걱정되어 가 본다니. 네발 짐승 주제에, 둥지에 소중한 알을 모셔 둔 아비 수리처럼 구는 이유가 무엇인가.

거기까지 생각한 루시안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수상한 점은 없었는데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어쨌든, 토벌 대회의 시작이 앞당겨진 만큼 준비를 서둘러야겠습니다.”

“지키를 후발주자로 출발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야지.”

서대륙의 모든 마물이 북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군집을 해체하는 것이 손실이 가장 적을 것이다. 대략적인 출정 준비 사항을 논해 율란에게 전달하기로 한 두 수장은 회의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각자의 부관들을 통해 마법국과 사냥부에 출정식이 당겨졌음을 알렸다.

그렇게 빠르게 헤어져 토벌 대회의 채비를 하려는데, 루시안이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춰 섰다.

“…그런데, 발트 대공에게서 별다른 향은 맡지 못했습니까?”

“나보고 개 비린내를 맡아 봤냐고 묻는 건가?”

레이먼이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대답했다. 루시안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사람처럼 눈매를 좁혔다.

“연꽃… 향 같은 건 맡지 못했습니까?”

“뭐?”

레이먼의 기색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루시안이 말하는 냄새가 어느새 니키엘을 떠올리는 고유적인 향이 되었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뭔가를 가늠해 보던 레이먼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향은 맡지 못했어.”

“…그렇습니까.”

루시안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곧장 등을 돌려 회의실 복도 양끝을 향해 걸어 나갔다.

***

니키엘은 붕대를 감은 채로 누워 있던 검독수리를 보고 있었다. 다친 곳이 안쓰러워 만져 볼 수도 없어 상처 위 공중을 쓰다듬는 척 손을 허공에 문지를 수밖에 없었다.

“…가만. 신성력으로 어떻게 안 되려나?”

수장들이 입은 상처에는 신성력이 특효인 듯했지만 평범한 날짐승에게도 그것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 검독수리가 날개를 다쳤을 때도 장애로 남지 않고 정상적으로 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잘되었던 걸 생각해 보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목깃 부근에 금실로 월계수 나뭇잎을 수놓은 검은색 더블릿을 입은 율란이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키엘은 살짝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말끝을 흐렸다.

“아, 대공….”

“…저녁을 건너뛰셨다고.”

분명 존칭인데 끄트머리의 어조를 한없이 내려트려 꼭 책망하듯이 들렸다. 저 알아서 잘 챙겨 먹는 니키엘이지만 어쩐지 머쓱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수리가 걱정되어서 대충 해결했소.”

“부상이 심각한 편이지만 새지기 말로는 내장이 끊긴 곳이 없어 그대로 아물 거라 합니다. 근육을 다친 거라면 쉽게 나을 테니 걱정 말고 제대로 식사하러 가시죠.”

“음, 시간이 늦었는데 식사는 좀….”

니키엘의 대답에도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고 있는 율란 때문에 결국 침대 맡에서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다. 하인에게 새를 돌봐 달라 부탁하려는데 율란이 먼저 문밖을 지키고 있던 하인에게 새를 돌보라 명했다.

“…고맙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하셨다는데, 전하께서 아무리 바요바처럼 많이 드신다고 해도 대공가는 기둥 하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뭘 또 말을 그렇게…. 난 그냥 미안해서 그렇지.”

병문안 온 주제에 새가 걱정되어 하룻밤 묵는다고 한 걸 뻔뻔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적당히 기분이 나아진 니키엘이 웃는 듯 마는 듯 민망하다는 어투로 사과하자 복도를 앞서 걷던 율란이 그런 그를 흘끗 돌아보고는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가을이라 밖이 쌀쌀한가. 귀가 빨갛네.’

니키엘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고, 귓등이 빨개진 게 희한하다 여겼으나 부러 지적하지 않고 조용히 따라 걸었다.

율란은 니키엘을 식당까지 인도했다. 말 한마디 없는 에스코트였지만 전처럼 걸음걸이가 빠르진 않아 오는 동안 적당히 식욕이 보골보골 끓어올랐다. 아무래도 아침부터 활동량이 많았는데 끼니를 시원치 않게 때워 밤늦은 시간에도 배가 고픈 듯했다.

두 사람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이 서른은 앉을 수 있을 법한 기다란 식탁의 가장 상석과 그 오른쪽 자리에는 테이블보와 은식기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하인이 의자를 빼 주려 하기 전에 율란이 상석의 의자를 빼 준 뒤 자신은 오른쪽에 앉았다.

“음, 대공이 상석에 앉는 것이 맞지 않겠소?”

아무리 왕족이라도 자신은 객인 데다가 상대는 대공인지라 그렇게 물으니 율란이 별걸 다 신경 쓴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은 하지 않고 스프부터 내오라 일렀다.

‘저놈 쉑 또 말을 씹네.’

황당했지만 율란에게 말을 무시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그러려니 한 니키엘은 크림을 넣어 졸인 완두콩 스프를 해치웠다. 달지 않게 끓여 그저 고소하기만 한 스프는 니키엘의 입맛에 딱이었다.

‘유지방이 많아서 이 밤에 먹기엔 좀 죄악 같지만…. 어쩔 수 없이 내일 덤벨 스쾃 해야지 뭐….’

손님으로 온 주제에 음식이 기름지니 뭐니 할 수 없는 데다가 음식을 남기는 건 죄악으로 여기는 한국인인 니키엘은 그저 부지런히 스푼만 놀렸다. 그들이 스프를 끝내자 트롤리에 담긴 갖가지 음식들이 테이블을 메웠다. 사람은 둘인데 음식의 가짓수가 너무 많아 또 한 번 당황스러웠다.

“…대공성은 손님 대접이 후하군.”

“토벌 대회를 떠나면 이테렌의 이테니움에서도 이와 같은 대접을 받으실 겁니다.”

와, 체지방률 늘 것 같은데? 대학원에서 열심히 머리에 때려 박은 사회성으로 말을 참은 니키엘이 다시 한번 고맙다 말했다. 율란은 대꾸 없이 일어나 뼈가 붙은 채로 구워져 나온 암사슴의 앞다릿살을 미트 나이프로 먹을 만큼 잘라 내어 니키엘의 접시 위에 얹어 주었다.

‘호스트가 메인 요리를 손님 수에 맞춰 자르는 것이 만찬의 시작이라고 했던가.’

니키엘은 둘뿐인 식당에 만찬장처럼 내오는 음식들과 율란의 정중한 태도, 그의 말쑥한 차림 등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특정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기생충 생긴 거 아니야…? 뱃속이 간지러워.’

아무래도 나라의 시대상이 니키엘이 살던 곳에 대입해 보면 중세이니 그럴 수 있을 듯했다. 이 세계에서 회충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궁금해하며 니키엘은 율란이 잘라 준 사슴 스테이크를 입에 넣었다.

“입에는, 맞으십니까?”

율란이 제게 질문하길래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고블릿에 입술을 붙이고 있는 율란의 옆모습이 보였다. 질문을 해 놓고는 저를 바라보지 않는 게 이상해 몇 번 고개를 움직여 눈을 맞추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 포기한 니키엘이 대답했다.

“음식이 무척 훌륭한걸. 당하고만 살 수는 없으니 다음엔 왕자 궁에 들러 주시오. 주방장의 솜씨가 무척,”

“훌륭한 편이니까?”

뒷말을 빼앗긴 니키엘이 놀라 율란을 바라보자 그는 여전히 고블릿을 든 채로 전과 다르게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금안은 사금이 잔뜩 반짝이는 강가처럼 빛나고 있었다. 만찬장의 야광석이 달린 샹들리에에는 수정이 매달려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빛이 그대로 내려앉은 율란의 콧대가 산맥처럼 한쪽 면에 깊은 그림자 골짜기를 만들어 냈다. 니키엘은 거기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어쩐지 민망하여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 내가 했던 칭찬을 기억하시는군. 맞소. 벤디의 음식 솜씨가 무척 훌륭하지.”

애초에 니키엘로서는 다음에 식사 한번 같이 하자, 는 한국인의 공통적인 빈말 인사법을 돌려주었을 뿐인데 집요하게 캐묻는 것이 정말 오려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본인은 꽤 괜찮은 선물이라 생각하면서도 좋아할지에 대해선 자신 없었던 육포를 받아 준 율란에게 전처럼 거리감이 느껴지지는 않아 니키엘은 초대를 거듭할 생각이었다.

율란이 그렇게 말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식사 초대는 좀 먼일이 될 것 같습니다. 출정일이 모레로 앞당겨졌습니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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