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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03)화 (103/130)

103화

율란의 커다란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율란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직도 흠칫거리는 제 하반신을 부정하려고 애써 봤다.

“이런 씹….”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마에는 혈관이 돋아 있었다. 율란은 아랫배가 자꾸 울컥거리다가 이불까지 젖어 든 걸 보고 어이가 없어 그걸 걷어 냈다.

“이, 씨발-.”

다시 욕이었다. 아래 속옷만 입고 자는 습관 때문에 율란은 젖은 속옷을 제외하고는 맨몸인 상태였다.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방을 단장할 제프콕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이 나이를 먹고 직접 빨래해야 한다니.

욕이 세 번째로 튀어나왔다. 아니, 그 이후로도 쉴 새 없이 욕을 해 댔다. 마지막에는 주신을 향해 엄지까지 치켜들었다. 신성 모독의 죄로 극형에 처해질 수 있음에도 율란은 거침이 없었다.

“개 좆같은 게 신이랍시고 앉아 있으니 이딴 모자란 피조물이 두 발로 걸어 다니지.”

그는 신을 욕하는 동시에 자신을 욕했다. 신앙심이 많지도 않은 편이라 나오는 욕마다 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계속 욕만 지껄이며 있을 수는 없는 일인지라, 율란은 쯧, 혀를 차며 이불을 모두 걷어 욕조에 던져 넣은 채 물을 틀었다. 아예 욕조 안으로 들어가 젖은 이불을 발로 퍽퍽 밟는 김에 속옷도 끌어 내리고 몸을 닦았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헛짓거리인지 모르겠다.

곧이어 욕조에서 빠져나온 율란이 턱에 올리브기름을 바른 채 나이프를 들어 거울 앞에 섰을 때였다. 밖에 누군가 왔다 싶었는데 제프콕이었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주인님, 기침하셨습니까.”

“두고 나가.”

아침 식사를 들고 온 듯했다. 주인의 간단한 대답에 제프콕이 작은 목소리로 트레이를 끌고 들어온 사용인들을 부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이 침실 한편에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두고 나가는 동안에도 욕실에 처박혀 있던 율란은 더러운 기분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면도를 마친 뒤 세면대의 물을 틀어 얼굴을 닦아 낸 율란은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한 뒤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침실 안에는 사용인들이 차려 둔 아침이 있었다. 그러나 율란은 식사를 시작하기도 전에 입맛을 잃은 상태였다.

‘그렇게 세게 안지 말라니까. 당신한테나 작은 힘이지 아예 부러질 것 같다고.’

꿈속에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떠올린 순간, 갑자기 아랫배가 다시금 묵직해져 왔다. 허벅지 안쪽에 심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태양신을 숨 쉬듯 저주한 율란이 가운을 집어 들었다. 소드마스터가 운용할 수 있는 마나를 통해 몸의 흥분을 가라앉히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평소에 온몸을 도사리던 욕구를 해소하는 방식이 전혀 먹혀들지 않자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그저 계속해서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할 뿐이었다. 비열한 왕이 사는 궁전 뒤뜰 정원에서 니키엘이 늑대로 변한 제 목덜미를 쓸어 주던 손길과 꿈속의 목소리, 작게 웃는 얼굴과 어이가 없다는 듯 늑대의 주둥이를 밀어내던 말캉한 손바닥이 말이다.

율란은 돔 트레이의 뚜껑도 열지 못한 채로 자괴감에 빠졌다.

“이게 대체 무슨, 좆같은….”

니키엘의 백금발색 머리카락, 푸르른 청안, 백옥 같은 피부 결, 되바라지고 당찬 목소리와 그에 비해 심드렁한 말투, 저를 보던 무감한 눈빛, 아주 조금씩 흘러들어 감로수가 따로 없던 그의 웃음소리.

율란은 더 망설이지 않은 채 옷을 갈아입고 바로 저택의 연무장으로 뛰쳐나갔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의 목덜미나 귀 뒤에 니키엘이 묻혀 놓은 듯한 연꽃의 향유 냄새가 코를 찔러 왔다.

몸을 닦아도 없어지지 않은 걸 보면 착각이 분명한데, 그 향이 너무도 선명해 검을 휘둘러도, 마나를 운용하여 몸을 정화하려 해 봐도 지워지지 않았다. 율란의 얼굴 위로 그가 단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표정이 떠올랐다.

길을 잃은 듯한 얼굴. 누군가 지금의 율란에게 거울을 가져다주었어야 했다. 사랑에 빠진 네 얼굴이 이다지도 멍청하고 바보 같노라고 깔깔 놀리며 말이다. 율란은 붉어진 얼굴과 여전히 힘을 받은 채로 혼자 꺼덕이는 걸 잠재우지 못한 상태로 멍하니 검을 내려트려야 했다.

열락의 시작이었다.

***

그렇다. 그게 바로 오늘 있었던 일이었다. 그 괴로운 짓거리들을 겪은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누가 왔다고? 멍한 얼굴을 한 율란에게 알레윈이 뭐 하고 서 있냐는 듯 물었다.

“지금 고귀하신 분이 기다리고 계신다니까요, 각하!”

사용인들에게 얼른 옷을 가져오라 명령하고 있던 알레윈은 제 손으로 직접 쓰러져 있던 트립티크를 세웠다. 그러고는 그 앞으로 옷을 가져오라 명한 뒤 율란을 향해 말했다.

“서재에서 간단히 집무를 보다 나온 분위기가 좋겠습니다. 너무 과하지 않게 꾸미는 게 나을 듯합니다. 단장님은 안 꾸미셔서 그렇지 화려하게 생긴 편이시니까요.”

율란은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트립티크 뒤로 돌아갔다. 매사 진중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상관의 외모를 아무렇지 않게 평가한 부관도, 그런 무례한 평가를 듣고 있는 상관도 저들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의식하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 저택에 방문한 손님은 그런 위력을 갖고 있었다.

공작의 침실로 들어온 여러 벌의 옷가지들은 제프콕이나 이테니움 성의 핀이 사교 시즌마다 재단사에게 의뢰한 것들로, 율란은 연무장에 갈 때 외에 입는 옷 말고는 제 옷이 뭐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때문에 알레윈이 뭘 입을지 물어보더라도 대답해 줄 만한 것이 없었다. 인상을 찌푸린 율란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무도회 때 입었던 걸 입으면 되잖아.”

“그게 무슨 수탉 벼슬 벗는 소리세요. 각하를 적당히 꾸몄다가는 제프콕이 절 죽일 기세였습니다. 히피바울 강을 떠도는 총각 유령이 되고 싶지 않으니 그냥 제가 골라 드리는 걸 입어 주십시오.”

“까분다.”

율란은 어이없다는 듯 대답하면서도 알레윈이 고르는 옷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도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정성을 들이는 듯하여, 알레윈은 뿌듯해졌고, 덕분에 옷을 고르는 손길이 더욱 신중해졌다. 그렇게 알레윈이 골라 온 오시니스 귀족식 실내복은 진회색 베스트와 그와 색이 알맞은 다소 폭이 좁은 브레, 진녹색의 튜닉이었다. 녹색 염료를 만들기가 어려운 나머지 아신카산 비단을 녹색으로 물들인 천은 고작 손수건 하나의 면적이 금괴와 맞바꿀 정도로 비쌌지만, 대공가의 형편을 생각하면 과한 편도 아니었다.

율란은 말없이 부관이 골라 온 옷들을 입었다. 베스트의 왼 가슴팍에 셔츠보다 좀 더 진한 녹색 사파이어 브로치를 달자 꽤 그럴듯한 차림이 되었다. 양가죽으로 만든 실내용 부츠를 신자 평소 검은 망토를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닐 때에 비하면 놀랍도록 헌헌해 보였다.

“꾸미면 이토록 근사하신걸요! 어서 내려가 보십쇼, 각하!”

알레윈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율란이 그런 그가 기가 막힌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가 마땅치 않은 사람처럼 쯧, 혀를 차고는 몸을 돌려 침실의 문을 열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괜스레 뛰고 있었다. 그저 문 하나를 열었을 뿐인데 1층 응접실에 있을 니키엘의 연꽃 향유 향이 여기까지 나는 듯했다. 율란은 손에 땀이 고이는 기분이었다. 뛰듯이 아래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가던 율란이 갑작스레 멈칫했다.

‘씨발, 양심이 너무 없는데….’

그동안 제가 니키엘을 대했던 걸 생각하면 감정이고 나발이고 이런 식이면 안 될 것 같았다. 애초에 사람을 쥐잡듯이 괴롭혔던 것부터가 문제였다. 율란 발트는 혐오하는 인간은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것이 그의 조부가 그런 개짓거리들만 하고도 단칼에 목숨을 잃을 수 있었던 행운의 이유였다.

그런데 율란 발트는 니키엘 오시니스에게 어떻게 굴었던가.

‘…모자란 새끼.’

어딘가 좀 모자라지 않은 이상, 지금까지 니키엘만 보면 그런 식으로 으르렁거렸을 이유가 없었다. 지금도 꼴랑 약을 탄 술 한 잔 대신 마셔 주고 그 값으로 니키엘의 병문안이라는 행운을 넙죽 삼키려 들고 있지 않은가. 율란은 자신이 이다지도 양심이 없고 철면피스러웠는지 생각하며 마지막 몇 계단은 기듯이 느린 속도로 내려갔다.

그러나 아무리 양심이 뒤졌다고 해도 응접실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 손님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율란은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양가죽 부츠의 밑창이 대리석을 일정한 박자로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제 심장 소리보다 작게 들린다는 게 이상했다.

응접실 앞에는 사용인들이 기립해 있었다. 저택의 주인이 왔음을 알아본 사용인들이 문을 열어도 되는지 허락받기 위해 주인을 바라보며 문 앞에 노크하기 위한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율란은 혀로 한쪽 볼을 밀어내며 고심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인이 일정한 박자로 문을 두들기며 고했다.

“대공 각하 드십니다.”

율란은 그 말에 천천히 걸음을 다시금 옮겼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깜깜한 밤하늘에 달이 밝게 떠오르듯 니키엘이 앉아 있는 자리만 밝아 보였다. 그는 기가 막혔다.

‘아주…. 개지랄을 떨어라.’

이 감정이 뭔지도 모르겠는데 니키엘이 앉아 있는 모습만 꼭 조명을 비춘 듯 환하게 보이는 것이 어이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감추려 노력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라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전하.”

“오, 대공.”

니키엘은 친구 집에 온 사람처럼 편하게, ‘왔어?’ 하고 묻는 듯 입술로 가져간 찻잔을 내리지도 않고 눈썹만 까딱여 화답했다. 그 시건방진 인사가 귀여워 죽을 것 같았다. 율란은 그게 제일 짜증이 났다.

‘졸도했을 때, 어떤 씹새끼가 내 입에 환각 버섯을 처넣은 게 틀림없다.’

도무지 그것 외에는 제 심경이 이토록 널을 뛰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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