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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101)화 (101/130)

101화

제프콕은 대공가의 수도 타운하우스를 지키는 집사로, 스승인 핀 아래서 견습 집사로 10년을 수학한 끝에 수도 타운하우스의 집사로 발령받을 수 있었다.

핀은 대공가의 영지인 이테렌의 이테니움 성을 총괄하는 대공가의 총 집사로 깐깐한 성격에 걸맞게 안주인이 없는 이테니움 성을 아주 잘 운영하고 있었다. 율란이 전대 대공의 가신 중 유일하게 살려 둔 인물이기도 했다. 애초에 핀이 율란에게 먼저 충성의 맹세를 한 뒤, 전 발트 대공의 세력을 처리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제프콕은 스승인 핀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의 주인이자 이테렌의 영주인 율란을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었다. 율란은 곧고 바른 사람이며 정의로우며 괴팍했다. 그렇다. 제프콕이 생각하기에 율란은 괴팍한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래서 결국 니키엘 전하에게 춤 한번 신청을 못 해 보셨다는 말입니까, 작센 백작님.”

잘 보여도 모자란 자리에서 홀딱 벗은 몸을 보인 채 들것에 실린 귀리 자루처럼 수도 저택에 귀가하게 된 사건이 그러했다. 발트가는 현재, 알레윈의 강력한 주장으로 인해 니키엘 오시니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이었다.

검은 가시 기사단의 우장군인 알레윈에 비해 과묵한 좌장군 베네딕 솜즈 또한 니키엘에 대해 느낌이 많이 변했다고 평한 것이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기사단이 왕궁의 연무장을 사용하는 동안, 그들은 니키엘이 매일같이 검술 연습을 하러 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니키엘의 검술이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기사단의 단원들은 그의 성실성에 탄복했다.

‘잘하지도 않는 걸 꾸준히 하시는 것이야말로 참된 용기지.’

‘태도 또한 얼마나 겸손하신데. 한미한 귀족들도 콧대 세우고 다니는 판에, 연습 끝나신 전하를 어쩌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높은 분이 기사 나부랭이인 우리에게 먼저 인사하시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암, 게다가 패악을 부리시는 것도 없고 말이야. 확실히 그분에 대한 소문이 과장이 된 게 틀림없어.’

단원들은 이미 니키엘을 향한 칭찬 일색이었다. 기사단원들이 쓸 물건들을 주에 한 번씩 왕실로 가져다주는 게 제프콕의 업무인 만큼, 그는 왕실에 방문할 때마다 단원들로부터 니키엘에 대한 칭찬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주인을 닮아 칭찬에 인색한 이들이 웬일로 그런 후한 평을 내린단 말인가.’

제프콕이 신기해하는 건 그런 부분이었다. 까다로운 율란에게 무도회용 정장을 준비하게 하는 것과 그 주인을 닮아 까칠하기 그지없는 기사단원들에게 하나같이 칭찬을 듣는 것. 가히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대단하신 분의 뒤를, 우리 각하처럼 연애에 연 자도 모르시고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분만 쫓고 있을 리가 없다. …아니. 아마, 각하께서 제일 꼴찌일 테지. 그런데 남성적인 부분을 내세우시지도 못할망정 외모를 가꾸느라 수시로 밥을 굶고 다니는 미소년 영식처럼 기절이나 하시다니.’

제프콕의 추측은 놀라울 정도로 정답이었다. 그의 주인이자 군사 총독인 율란 발트는 애석하게도 다른 수장들과는 다르게 아직도 출발선에서 미적거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를 빠르게 간파한 제프콕은 곧 수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한숨 섞인, 또는 염려로 점철된 표정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작센 백작, 알레윈 작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그만 광증을 일으키신 걸 어쩌겠나. 그래도 다행인 건, 전하께서 각하의 광증을 금세 달래 주셨다는 것이지. 어떻게 그렇게 바로 진정시킬 수 있었던 건지. 나는 하마터면 궁 안이 피바다가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여전히 불경한 말씀만 잘하십니다, 백작님.”

“아니…. 자네가 먼저 물어봤잖나….”

알레윈이 살짝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거리고 있던 사이였다. 누군가 대리석 바닥을 크게 울리며 제프콕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집, 집사님-! 집사님!”

그를 다급하게 찾는 이는 문지기였다. 타운하우스 정문 옆에 딸린 작은 마구간에서 말까지 타고 달려왔는지 제프콕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헛숨이 가득했다.

대공이 2층 침실에 있다고는 하나, 낮에, 그것도 수도 저택에 틀어박힌 아주 흔치 않은 날에 하필이면 이런 소란을 일으키는 문지기가 못마땅한 제프콕이 미간에 실금을 긋고는 그를 낮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방정맞게 무슨 소란인가.”

“그것이…. 밖에 귀한 분께서 방문하셨….”

“귀한 분? 오늘은 찾아오실 분이 없는데 그게 대체 무슨…. 아니, 잠깐…. 혹시 설마…?”

갸웃거리던 제프콕이 저택의 로비에서는 그 끝이 보이지도 않는 정원을 지나 정문의 철장 밖에 세워진 마차를 가늠이라도 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일생 검을 연마한 알레윈도 그만큼 밖의 일은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는데, 제프콕은 마치 앞날을 내다보듯 저 혼자 깜짝 놀라더니 소리쳤다.

“혹시 전하가 오신 게냐!”

“허억-! 어찌 아셨습니까요, 집사님!”

“전하? 전하가 오셨다고?”

“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알레윈이 영구 박 터지는 말투로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것에 대답조차 해 주지 않은 제프콕이 펄쩍 뛰어오르더니 재빠르게 품 안의 작은 종을 울려 사용인들을 집합시켰다.

“너! 정원에 가서 장미를 잔뜩 꺾어 오너라. 현관 앞에 장식해 둘 것이니 일단은 꺾어 와 장식한 뒤, 전하께서 지나치시면 가시를 손질토록 해!”

“예, 집사님!”

“너! 너는 주방으로 내려가 주방장에게 차와 곁들일 다과류가 있는지 묻거라! 없으면 지금 빨리 만들라고 해! 꼭 먹기에 편한 것이어야 한다!”

“네, 집사님!”

“너 그리고, 거기 너! 얼른 커튼을 걷거라. 각하의 음침한 취향에 맞춘 터라 너무 칙칙해 보이니까!”

사용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제프콕의 명령을 받고 흩어졌다. 흡사 전쟁터 책사의 명령을 듣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던 알레윈을 향해, 제프콕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백작님은 멍하게 서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어서 가셔서 각하를 단장시키시지요!”

“단장님을 단장시키라고?”

알레윈이 멍하게 제프콕의 말을 따라 하는데도 제프콕은 두 번 말해 주지 않고 금세 등을 돌려 응접실을 정돈한답시고 하인 몇과 함께 금세 사라졌다. 뻘쭘하게 서 있던 알레윈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자 다시 한번 호통을 치며 말이다.

“작센 백작님! 거기 서서 뭐 하십니까! 집 지키는 핏어캣도 아니시면서!”

“아, 알겠네.”

멍청하게 서 있다가 낮 시간 동안 집을 지키기 위해 가만히 석상처럼 서 있기만 하는 마물, 핏어캣 소리를 들은 알레윈이 후다닥 2층으로 올라갔다.

그나마 정원과 저택 간의 거리가 먼 것이 다행이었다. 문지기가 말을 타고 급하게 달려와 니키엘의 방문을 알렸던 판단이 옳았던 것이다. 응접실을 정리하게 한 제프콕은 뛰듯이 걸어 다시금 로비로 돌아왔다. 그런 다음 심호흡을 크게 두 번 한 뒤, 나머지 사용인들과 함께 저택 현관의 문을 열었다.

누가 명령하지 않았는데도 수도의 수석 집사 제프콕에게 교육을 잘 받은 하인들이 현관부터 마차가 멈출 정원 바닥석까지 이어지는 계단에 한 명, 한 명씩 정자세로 섰다.

제프콕은 그 계단을 쭉 내려가는 동안 먼지가 묻지는 않았는지 살펴본 뒤, 지난 18년간 단 한 번도 깨끗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자신의 복장을 점검한 후 점점 가까워져 오는 마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곧 마차가 멈춰 서자, 상앗빛 문을 정중하게 두어 번 두들긴 뒤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안에는 살아 있는 광휘라 불리는 백금발의 미인이 한적한 미소를 지으며 제프콕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허리를 굽혀 인사한 제프콕이 자기소개를 했다.

“니키엘 오시니스 전하, 발트 대공가의 수도 저택, 그라실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그라실의 집사, 제프콕입니다.”

“반갑네.”

니키엘은 다소 깐깐한 인상의 마른 사내가 저를 향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모습을 보고 속으로 조용히 놀랐다. 자신을 집사라 소개한 남자는 니키엘의 방문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침착해 보였다.

‘마구간 지기는 무척 당황해 보였는데 이 사람은 꼭 내가 여기 올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네.’

희한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니키엘은 그의 에스코트를 따라 마차에서 내린 뒤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대공의 와병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온 것이네. 빈손으로 오기 뭐해 선물을 가져왔는데 대공의 높은 취향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어. 자네가 봐 주겠는가?”

“무엇인들 전하께서 가져오신 것이라면 그분의 기쁨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은 말고. 나는 정말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니까.”

집사가 반색하자 니키엘은 살짝 머쓱하여 말했다. 아무래도 육포를 가져온 것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꽃이라도 꺾어 올 걸 그랬나? 이곳에는 병문안을 위한 유리병에 담긴 *키스트 주스 3종 세트도 팔지 않으니 정말 곤란했다.

니키엘의 걱정을 읽은 것인지, 집사는 눈치 좋은 하인이 미리 꺼낸 육포 바구니를 보더니 금세 감탄하듯 말했다.

“이건 육포가 아닙니까! 게다가 훈제로 제작된 것은 최상품이라 전투 식량을 중요히 여기시는 저희 주인 나리의 마음에는 쏙 드실 겁니다.”

율란의 곁에서 오래 보필한 집사가 그리 말하자 한시름 던 니키엘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가 안으로 들어가길 권유하자 그제야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다.

저택은 전체적으로 그 위세가 대단해 보였다.

‘왕자 궁보다 좋네.’

니키엘은 정원을 거치면서 감탄했던 것처럼 저택을 올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니키엘은 그라실 저택의 첫 번째 계단을 이루는 옅은 회색의 대리석을 밟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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