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라피엘이 니키엘의 신성력을 질투하는 이유는 어찌 보면 명확했다. 그것이 수장들을 움직일 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음습한 권력욕을 훤히 알고 있는 수장들이 태자를 경계하는 이유기도 했다.
레이먼은 첨탑을 벗어나자마자 니키엘에게 말했다.
“태자 전하를 경계하십시오, 전하.”
무도회로부터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두 명의 인물로부터 똑같은 말을 들은 터라 기분이 묘했다. 니키엘은 진중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레이먼에게 대꾸했다.
“어찌하여 나에게 형님 전하를 경계하라는 것이오.”
이유나 들어 보자 싶었다. 내내 핀잔만 주며 까탈스럽게 굴던 놈이 이제는 제게 누굴 경계하라느니 하는 게 웃겼기 때문이다.
니키엘이 이 세계에 처음 떨어져 니키엘로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사방이 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방에서 니키엘을 적이라고 규정하고 있었을 뿐. 이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남들이 경계할 만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저를 깔보던 이들 중 그 강도와 무례가 가장 심했던 이가 바로 레이먼 볼트윅 아니던가.
지금이야 비즈니스 파트너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전적이 있다 보니 왕태자를 경계하라는 이유도 니키엘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아닌 본인의 목적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니키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이의 눈초리가 새초롬해지자 레이먼의 목울대가 울컥였다.
‘눈을 가늘게 뜨시니 속눈썹에 가려진 벽안이 꼭 비 오는 날의 호숫가처럼 검푸르게 보여서….’
레이먼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니키엘이 한 질문에 답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전하께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전하께 좋은 일로만 볼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것이 가스파르 백작의 일로 증명되었다는 걸 전하께서도 아실 겁니다.”
가스파르 때 라피엘이 어떻게 굴었는지 너도 보았지 않니, 하는 뜻이었다. 니키엘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알겠소. 충고를 새겨 두지. 그보다, 나는 이후에 일정이 있는데 여기서 헤어지면 어떨까 하오.”
레이먼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일정이라 하시면….”
그러나 니키엘은 그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하였다. 레이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아, 저기 마차가 오는군.”
니키엘과 레이먼이 첨탑까지 걸어오는 바람에 한참 동안이나 그를 찾아 헤맨 마부가 헐레벌떡 첨탑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차를 대기에는 여의치 않은 길목이라 니키엘은 마부의 편의를 위해 직접 대로 앞으로 나가 주려고 했다.
“무슨…. 어떤 일정이 있으십니까.”
레이먼이 그런 그의 앞을 슬쩍 가로막지만 않았어도 마부와의 재회는 성공했을 것이다. 진로를 완전히 방해한 것은 아니라 무시하고 걸으면 그만이지만 니키엘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레이먼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스민 초조함이 의아했다.
“글쎄. 근데 그걸 공에게 말할 필요가 있나 싶소. 내 개인적인 일정이라서.”
니키엘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는 다시 걸으며 말했다.
“어쨌든 오늘은 고맙소. 다음에 술이라도 한잔-. 아니, 술은 좀 아닌가. 우리 사이가 애매하니 말로만 때우려는 나를 이해하시오. 공도 이만 들어가도록 하오.”
빠르게 저 할 말만 끝낸 니키엘이 마차가 있는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레이먼은 그를 쫓던 걸음을 멈춰 섰다.
“…….”
마차의 문을 열어 줄 시종이 없어 마부가 내려 문을 열어 주려 하자 손사래를 치는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니키엘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마차의 문을 벌컥 열고 올라타더니, 그대로 문을 쾅 닫은 채 레이먼은 바라보지도 않은 채로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마차 안과 연결된 줄을 당기는 모습도 보였다. 줄에 이어진 종이 딸랑, 하고 울리자 마부가 이랴, 하며 말을 몰았다. 레이먼은 마차가 사라진 이후에도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마차는 발트가의 타운하우스로 향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궁을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여태껏 궁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 하고 바쁘게만 살았던 것 같다.
‘당연하지. 박사 따고 갑자기 이곳에서 눈 떴을 때만 해도 여유가 없었는걸.’
적응이 최우선 사항이었기 때문에 수도 구경이고 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꼭 교수와 함께 스위스에서 열리는 심포지엄에 참석한 기분이었어…. 먹고 죽을래도 여유 따윈 찾을 수가 없었단 뜻이지.’
이왕 나온 김에 구경이나 할까 싶어 니키엘은 멍하니 마차 밖을 바라보았다. 오시니스의 수도인 라시리스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라시리스는 꽤 아름다운 곳이었다. 수도 계획이 잘되어 있는 편인지 마차로 이동하기에도 길이 울퉁불퉁하지 않아 편했다. 율란의 수도 타운하우스가 외곽으로 빠져 있지만 않았다면 더욱 많은 구경을 했을 텐데 그것이 아쉬웠다.
니키엘은 선물을 위해 챙겨 온 왕자 궁 주방장의 육포를 바라보았다.
‘아니…. 마땅히 선물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꽃을 주기에는 좀 그렇고…. 실용적인 걸 찾다 보니 육포인데 말이야. 병문안 선물로는 좀 그런가?’
꽃을 선물하는 건 너무 낯 간지러운 데다 구설수가 염려되는 일이었고, 그렇다고 달콤한 쿠키류를 준비하자니 그 얼굴에 달달한 것이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마 생각한 것이 육포인데….”
책에서는 율란이 출정할 때 이테렌 성의 요리사는 따라가지 않은 걸로 나와 있던 것 같다. 왜 추정형이냐면, 이곳에 온 지도 꽤 오래라 책을 읽은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굵직한 사건이나 줄거리 등은 혹시나 기억이 바랠까 봐 메모해 두었지만, 율란이 출정할 때 지네 집 요리사를 데리고 가든 말든 솔직히 니키엘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다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일단 가져가면 기사단 사람들에게 주든지 하겠지. 빈손으로 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거 아닌가.”
니키엘은 혀를 쯧 차며 육포가 가지런히 놓여 있는 바구니를 정돈했다. 주방장 벤디의 특제 육포는 향신료 배합이 훌륭하여 무척이나 맛이 좋았다.
근력 운동에 매진하는 니키엘에게는 나트륨이 좋지 않은 터라 늘 저염 육포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었는데, 아무래도 율란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가을이라 한들 뙤약볕에 행군해야 하니 소금을 쳐 맛있게 만들어 달라고 했다.
햇볕 아래서는 수분 섭취만큼 중요한 것이 나트륨의 섭취이니 말이다. 벤디의 특제 육포는 만드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임에도 불구하고 훈제로 조리한 덕분에 향신료의 향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훌륭한 식품이 되었다.
선물 센스가 약간 구린 것 같다고 생각되면서도, 벤디의 솜씨를 자랑하고 싶던 니키엘은 그냥 그것들을 들고 발트가의 타운하우스로 향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 마차가 멈춰 섰다. 발트가가 토벌 대회 시즌마다 머무는 수도의 타운하우스 앞이었다.
정원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타운하우스의 문지기가 니키엘의 마차를 멈추게 한 것이다.
“이곳부터는 발트 대공가의 사유지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왕자 궁의 표식이 달려 있는 마차를 타고 왔음에도 그런 질문을 들을 줄은 몰랐던 니키엘은 마차 창문에 매달린 커튼을 살짝 열고 자신을 소개했다.
“약속은 잡지 않았지만, 대공의 병문안을 왔다네. 가서 니키엘 오시니스가 왔다고 알리고 자네 주인의 그다음 명령을 받아 오게.”
약속하지 않은 놈은 돌아가라는 말을 들을까 봐 뜨끔했던 니키엘은 일부러 표정을 싸늘하게 얼린 채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오시니스라는 성을 알아들은 문지기가 놀라 펄쩍 뛰더니 죄송과 황공, 망극이라는 세 단어를 어지럽게 섞어 말하더니 후다닥 뛰어 안으로 들어갔다. 아마 제 상관에게 방문객의 이름을 알리려는 듯했다.
한시름 던 니키엘은 마차에서 차분히 기다리려 노력했다.
‘괜히… 왔나?! 그렇지만, 율란이 내 잔에 담긴 술을 대신 마신 뒤 그렇게 늑대로 변해 버렸는데 인사를 오는 것이 도리…. 아니, 유교도 모르는 것들한테 도리 찾을 필요가 있나? 오히려 율란은 나만 보면 인상을 찡그리기 바쁜데 말이야.’
검술 수업을 함께 진행하며 분위기가 많이 나아진 듯하지만, 니키엘이 생각하기에 율란은 아직 니키엘을 향한 사감이 많았다.
‘아니라면 사람을 그렇게 무뚝뚝하게 대하겠어.’
율란의 원래 성격이 그렇다는 건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지만 저를 대하던 행동들은 통념적인 무뚝뚝함을 넘어선 상태가 아니던가.
어찌 되었든 그가 니키엘을 구해 준 것은 맞으니 보답이나 할까 싶어 찾아온 것뿐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마차의 진입 허락을 맡은 것인지 문지기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헉, 허억-! 와, 왕자 전하, 정원을 곧장 지나시면 됩니다요.”
“수고했네.”
니키엘은 창문을 통해 문지기에게 인사한 뒤 설렁줄을 당겨 마부에게 출발을 알리는 종을 울렸다. 마부가 이랴, 하며 다시금 마차를 움직였다.
서울에 적을 둔 잘사는 집들도 부지가 끝없이 넓지는 못하니, 발트가의 수도 타운하우스도 그럴 거라 생각했던 니키엘은 한없이 달리는 마차 안에서 기함했다.
“아니, 대체 정원이 어디까지인 거야? 뭔 정원이 여의도만 해.”
니키엘은 어이가 없어 체통 없이 자라처럼 고개를 쭉 빼 보려다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몸을 바로 했다. 그러고도 조금 더 있다가 마차가 드디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땅이 얼마나 넓은 거야. 율란 놈 쌉부자잖아….”
저도 모르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멈춰 선 마차 안에서 내릴 준비를 할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누군가 마차의 문을 두들긴 뒤 일정 간격 후에 마차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