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사실, 수도 전역에 퍼진 소문은 니키엘과 폴에게 알려진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정확히는, 가스파르 백작에 대한 소문이 퍼진 것도 있지만 니키엘에 대한 소문이 더해졌다는 것이다.
아니, 소문이라기보다는 유행에 가까웠다.
“무도회 파트너 프러포즈 선물로는 흰 장갑이죠. 비단실로 아름답게 직조된 레이스 흰 장갑. 수도 귀족 영애들은 모두 이 흰 장갑을 받고 싶어 한답니다!”
“레이디 D, 레이디의 하얀 장갑이 오늘따라 눈부시군요. 저 역시 요즘 유행을 따라 봤습니다. 지각을 갖춘 훌륭한 신사라면 누구나 이렇게 파란 장미로 부토니에를 만들어 프록코트에 달아야죠. 신사의 품격을 자랑하기 위해 말입니다.”
“어머, K 백작님.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앞머리를 모두 걷으셨군요. 수도 최신 유행이 놀랍도록 어울리십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D.”
“별말씀을요, K 백작님!”
그렇다. 토벌 대회 연회의 밤, 니키엘의 차림새가 유행이 되어 수도 전역에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도 귀족들에게는 가스파르 백작이 니키엘에게 약물을 강제로 먹이려 한 사건 역시 의외의 매력으로 다가왔다. 누구나 미인의 옅은 불행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수장들과 오릭스 지멘츠에 둘러싸인 니키엘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남자였고, 특히 루시안 투르운 공작과 오릭스 지멘츠 공작과 추었던 춤은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매혹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했기 때문에, 성질이 고약하고 추하기까지 한 가스파르 백작이 아름다운 커플이던 루시안과 니키엘을 질투하여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추남이 미남들의 사랑에 재를 뿌린 것은 오히려 소문에 양념이 되어 수도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었다. 니키엘이 루시안과 추었던 전통 왈츠와 오릭스와 추었던 브웨이카에 깔린 무곡이 무도회마다 꼭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된 것은 이보다 조금 후에 일어날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그 두 곡은 오시니스의 모든 무도회에 꼭 등장하여야만 하는 곡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막 왕의 궁 앞으로 도착한 니키엘은 그렇게 물 밑을 떠도는 소문들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두통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마차에서 내릴 뿐이었다.
시종이 달려 나와 그런 니키엘을 맞이하였다. 그는 황급한 인사 후, 다소 무례하다 싶은 언사로 물었다.
“왕자 전하, 혹 알현의 기약이 되어 있으십니까?”
니키엘은 대답하지 않고 시종을 흘끗 본 뒤 궁을 향해 걸었다. 딱 봐도 무시하는 말투라 대답해 줄 가치를 깨닫지 못한 탓이다. 석사 3년 내내 저를 싫어하던 박사 과정 선배를 무시했던 니키엘에게 시종의 말 한마디를 무시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전하-!”
시종은 차마 니키엘의 앞까지는 막지 못하겠는지 다급히 그를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채로 직접 문을 열어젖혔다. 본인의 힘으로 문을 여는 왕족은 없기에 문을 열어 주지만 않는다면 니키엘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시종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렸다.
‘저 미친놈, 하고 보는 얼굴이군.’
니키엘은 심드렁하게 생각하며 가뿐하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왕이 사는 궁은 전에도 와 본 적이 있었다. 레이먼과의 식사 자리에 초대되었을 때였다.
대리석 바닥을 비단신으로 밟은 니키엘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계단을 올랐다. 왕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난번 왔을 때 레이먼과 함께 식사한 백화관이 1층에 있으니 대충 왕의 침실은 2층에 있을 것이라 유추했기 때문이다.
‘뻔하지 뭐. 암살 위협 때문에 고층에 배정하는 게 좋을 테니까.’
궁의 구조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역사 채널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니키엘은 막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저를 따라오는 시종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니키엘을 말리고는 있지만 묘하게 안도한 내색이었기 때문이다.
빠르게 판단한 니키엘은 몸을 휙 돌려, 오르던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즈언하-!”
그 돌발 행동에 시종이 혼비백산하여 그런 니키엘을 잡으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최근 민첩성 훈련까지 실시하여 더욱 빨라진 니키엘을 잡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키가 우뚝 큰 니키엘의 다리 길이가 시종의 것보다 훤칠하게 긴 것 역시 승리의 요인이었다.
도망치듯 1층으로 내려간 니키엘은 시종 2명이 도열한 곳을 발견하고 왕이 그곳에 있음을 짐작했다. 니키엘은 대리석 바닥을 박차고 빠르게 걸었고, 그 걷는 속도에도 못 미친 시종은 니키엘을 잡으려 뛰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니키엘이 왕이 있을 법한 곳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문 앞으로 다가가려던 때였다.
“네가 여기 웬일이니.”
등에서부터 소름이 쫙 올라왔다. 니키엘은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생리적으로 거부감을 표출하는 몸에 쯧, 혀를 찼다. 그렇다. 그것은 니키엘의 이복형이자 오시니스의 태자인 라피엘 오시니스의 목소리였다.
니키엘을 잡으려 뛰어오던 시종들이 안절부절못하고 허리를 푹 숙였다. 진짜로 ‘왕족’을 대하듯 말이다. 니키엘에게 대하던 태도는 모두 종적을 감추고 지엄한 이를 뵌 듯이 깍듯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그게 어이가 없었지만 당장 눈앞에 라피엘을 상대하는 것이 먼저였다.
“형님 전하를 뵈옵니다. 강녕하시었습니까.”
니키엘은 또 한 번 대충 인사했다. 기체후 일향만강 하냐는 앞 인사를 다 잘라먹은 인사에 라피엘이 피식 웃었다. 그는 성장 차림이었다. 아마 왕을 알현하기 위해 차려입은 듯했다. 짙은 적색의 프록코트가 그의 음울한 기색을 가리고 싱그럽게 보이게 했지만 여태껏 미남자들에 둘러싸여 눈이 성층권까지 치솟은 니키엘에게는 감흥 없는 외양이었다.
‘대충 생겼군.’
자국의 남성들이 어떤 생김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싹 다 잊은 채, 수장들이 미남의 기준이 되어 버린 니키엘에게 라피엘의 생김은 다소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부왕을 닮아 훤칠하지만 율란보다는 매끈하지 못한 콧날이 울퉁불퉁했으며 루시안의 맑고 깨끗한 눈보다는 흐리멍덩한 눈빛이 좋지 못하였고 레이먼보다 작은 골격이 그를 소인배로 보이게 했으며, 냇보다 깨끗하지 못한 피부가 그를 자다 깨어 세수도 안 한 인물로 비치게 만든 것이다.
라피엘의 외양에 대한 신랄한 평가를 내리는 동안, 니키엘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이 잦아들었다. 몸이 갖고 있던 기억들을 정신력으로 날려 보낸 것이다. 덕분에 니키엘은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부왕을 뵙고자 합니다.”
“부왕께서는 바쁘시다.”
“직접 말씀하시던가요? 하나뿐인 막내아들과 차 한 잔 나눌 시간도 없이 바쁘시다고?”
니키엘은 감흥 없는 어조로 대꾸했다. 라피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루시안보다는 작아 니키엘과 시선의 높이가 얼추 비슷했는데, 턱을 치켜들어 격차를 벌리겠다는 듯 니키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니키엘로 말할 것 같으면, 저런 타입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군대에서 무수하게 겪었기 때문이다.
‘꼭 병장이나 상병보다 일병이 이병을 갈구는 법이지. 뭐 없어 보이는데 왜 저렇게 당당해?’
레이먼이나 율란에게서 느껴지는 무인 특유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데다가 루시안 같은 마법사들 특유의 날카로운 분위기도 없었다. 마법사를 만나 본 것은 루시안이 처음이지만, 니키엘이 느끼기에 라피엘은 아무리 봐도 좆밥이었다.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나대는 거야.’
미간이 슬쩍 찌푸려지는 순간, 라피엘이 피식 웃으며 니키엘에게 말했다.
“아바마마를 뵙고자 하면 먼저 알현을 신청해야 할 것 아니니.”
“형님 전하께선 부왕을 찾아뵙기 전 알현을 신청하셨나요.”
너나 잘하세요, 라는 말뜻이었는데도 라피엘은 모른 척 웃으며 팔을 벌려 니키엘을 껴안으려 했다. 그가 슬쩍 몸을 피한 탓에 껴안는 것을 실패한 라피엘은 니키엘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오, 니키엘. 나의 동생아. 여지없이 어린 날처럼 부왕의 사랑을 갈구하는구나. 이 형님은 부왕의 하나뿐인 후계자이지 않으냐.”
“후계자가 하나라구요? 보통 후계권은 발트 대공까지 갖고 있지 않나요?”
니키엘은 순진한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주위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던 시종들이 놀라 숨을 헉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두 눈을 깜빡이던 니키엘의 말뜻은 이러하였다.
‘님은 하나뿐인 후계자가 아니셔요. 율란 발트 대공까지 갖고 있는 후계권, 개나 소나 다 챙기는 건데 그게 뭐가 대단해서? 대공 자리에 앉은 율란보다 님이 뛰어난 게 있으셔요?’
그리고 니키엘의 카운터 펀치는 정확히 들어간 것인지 라피엘은 미끈했던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동생아. 아무리 그렇다 한들 지금 네가 부왕을 직접 알현할 수는 없-.”
“무슨 일인 게냐?”
그리고 공교롭게도, 때마침 왕이 문을 열고 나왔다. 그의 옆에는 레이먼이 서 있었다. 니키엘은 라피엘이 또 한 번 훼방을 놓기 전에 곧바로 말했다.
“강녕-. 아아, 인사를 올릴 틈이 없나이다. 먼저 용건부터 말하는 불초한 자식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폐하.”
뒤의 양해를 구하는 말이 인사말보다 훨씬 길었음에도 니키엘은 또 한 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레이먼이 그의 뒤에서 입가를 손으로 가리는 것이 보았다. 눈매가 살짝 휘어진 것으로 보아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니키엘은 그걸 흘긋 보다가 혹시나 라피엘이 저를 방해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부왕이시여. 조만간 북녘에 몬스터 웨이브가 도래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온 목적을 바로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