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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95)화 (95/130)

95화

오시니스의 귀족 사교계는 무도회가 끝난 다음 날이면 느지막이 정오에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는 한다. 시종들은 전날 밤 술에 취해 깊은 새벽에 귀가한 주인을 부러 깨우지 않았다.

급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수도 라시리스의 귀족들은 침대에서 아침을 먹은 뒤 하녀의 도움을 받아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라시리스 귀족들은 오늘 아침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벼락같이 등장한 소식을 듣기 전까지 말이다.

“가스파르 백작이….”

“감옥에서-.”

“사망했다고?!”

수도의 귀족들은 각양각색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어제저녁, 귀족들은 간만의 신나는 구경거리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니키엘이 루시안 투르운 공작과 파트너로 등장한 것도 놀라운데, 그를 싫어하는 줄 알았던 수장들 중 한 명인 레이먼이 왕에게 직접 나서 가스파르 백작을 벌하여 달라 주청하지 않았던가.

하루가 멀도록 온갖 무도회와 연회를 돌아다니며 주색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니키엘이 지난여름, 갑작스레 칩거하여 죽을병이 들었다는 소문이 돈 데다 이제는 연회에서 레이먼, 루시안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희한한 일이었다.

게다가 놀라운 사건은 또 있었다. 니키엘에게 알 수 없는 약을 먹이려 했다는 정황 증거가 드러난 가스파르 백작이 하루아침에 사망한 것이다. 그것도 불에 탄 듯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로 말이다.

미네르비나는 소식을 듣자마자 레이먼에게로 달려온 참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파티의 후유증으로 늦게까지 자고 있었을 레이먼이 웬일로 일찍 일어나 가벼운 튜닉 차림으로 차를 마시고 있길래 인사도 대충 하고 용건부터 꺼냈다.

“가스파르가 사망했답니다. 사인은 화상, 햇볕에 타 죽었다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뭐…?”

찻잔에 입술을 붙이며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던 레이먼은 미네르비나의 말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정색했다. 햇볕에 타 죽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란 말인가. 제아무리 루시안처럼 선천적으로 햇볕에 약한 사람이라 해도 감옥에 들어오는 햇빛만으로 타죽을 리가 없었다.

미네르비나 역시 레이먼의 그런 황당함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레이먼은 엄지와 중지로 제 눈썹 끄트머리를 슬슬 문지르다가,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물었다.

“가스파르가 옮겨진 감옥 창문의 크기는….”

레이먼이 그런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미네르비나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린애의 머리통만 합니다. 그 창을 통해 쏟아진 햇빛이 성인 남자를 죽였다기에는 말도 안 되는 크기죠.”

정말 햇빛에 타 죽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해도, 탈옥을 막기 위해 극한적으로 작은 창을 내놓은 곳이라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의 양이 치명적이진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네르비나의 설명에 따르면 가스파르는 오늘 새벽, 여명이 밝아 옴과 동시에 감옥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정통으로 맞고는 그대로 불타 죽었다고 했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이를 발견하여 황급히 모래를 짊어지고 들어와 가스파르에게 뿌렸지만, 불길은 멎지 않았고 백작은 잠시 뒤 사망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마법의 힘을 의심했으나, 급하게 출동한 마법국 관리의 말에 의하면 주변에 사람을 죽일 만한 마나의 흐름 따위는 없다고 했다. 화재가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현장에는 일정량의 마나가 흐른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깨끗했다는 것이다.

레이먼은 보고를 들으며 책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찻잔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동물의 뼈를 섞어 구운 투명한 도자기 찻잔은 동대륙에서 건너온 기술로 제작된 사치품이었다. 맑은 소리를 내는 찻잔을 바라보며, 레이먼은 생각에 잠겼다.

‘지하 감옥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자에게는 너무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짐은 짐의 백성을 사랑하니라.’

레이먼은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리기까지의 경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봐도 라피엘이 걸렸다. 게다가 라피엘은 지난 밤, 율란을 쫓아 나간 니키엘을 찾으며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정원을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어린애나 숨을 법한 작은 크기의 덤불을 헤집고 다니는 모양새가 영 거슬렸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이먼은 사용인을 불러, 나갈 채비를 하겠노라고 밝혔다.

“바로 가 보실 계획입니까?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 하실 줄 알았더니.”

집사에게서 프록코트를 받아 든 레이먼이 망설임 없이 그것을 걸치자 미네르비나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레이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상태로 웃었다. 꼭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일에 굳이 저항하지 않겠다는 듯한 표정이라 그의 부관인 미네르비나는 의아해졌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름으로 불린 값을 해야지 않겠습니까. 다른 짐승 새끼들도 노력이란 걸 하고 있을 텐데. …게다가, 내가 제일 후발 주자인 듯하던데. 아니, 제일 늦은 건 개새끼 쪽인가.”

쯧, 혀를 차며 하는 말에 미네르비나는 어렴풋이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고야 말았다. 그녀 역시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이왕 하실 거면 노력을 좀 더 많이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제 보니 춤도 못 추고 돌아오셨던데요.”

“시끄러워요. 갑시다.”

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듯이 손을 내저은 레이먼이 저택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들은 곧 왕궁으로 향했다.

***

수도의 귀족들이 아무리 느지막이 일어나 늦은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해도, 니키엘은 달랐다. 그는 진작 일어나 아침 산책을 한 뒤,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간 주방장 벤디의 특제 조찬을 즐긴 참이었다.

“무도회라고 춤만 추고 밥도 못 먹고. 정말 루시안한테 라면이라도 먹고 가라고 권했어야 했는데.”

저를 왕자 궁까지 배웅해 준 루시안 역시 지난밤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한 빈속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왕자 궁으로 함께 귀궁하여 야참을 들고 보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니지. 또 다른 놈들이 봤다면 무분별한 연애니 뭐니 했을지도.”

듣는 귀와 보는 눈이 많은 궁 안이다. 저와 루시안의 소문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퍼져 나갈지 모르니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니키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런지를 했다. 니키엘이 생각하기에 적당한 개수인, 45회씩 3세트를 끝내고 나자 허벅지가 불에 탈 듯이 저릿거렸다. 찢어지는 작열감을 즐기며 니키엘은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한 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니키엘의 사랑스러운 운동 기구들이 모조리 흉악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근처에 올 생각도 않는 폴이 헐레벌떡 달려와 가스파르 백작의 사망 소식을 알린 것이다.

“아니, 진짜 죽었대? 이 나라는 원래 사람이 별안간 죽나…?”

“지금 수도 전역으로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에요. 가스파르 백작가에서 가주의 시신을 내놓으라고 폐하께 요구하고 있다는데 어찌 될는지….”

재판을 치르지 못하고 죽었으니 사실상 가스파르는 죄인의 신분이 아니었다. 정황상의 증거가 충분하지만 가스파르는 자신을 해명할 기회를 얻지 못했고, 오시니스의 재판관은 그를 심문할 방법을 잃었다.

보통은 왕궁의 감옥에 갇힌 경우에는 재판을 치르지 않고 죄인으로 짐작이 되는 편이었지만 사안이 너무 애매했다. 왕이 직접 나서 별것 아니니 무도회가 끝난 뒤 재판하자고 일축해 버린 사건이 아닌가. 덕분에 니키엘은 피해를 당할 뻔했는데도 애먼 귀족을 죽였다는 오명을 또 뒤집어쓰게 생겼다.

“토벌 대회 앞두고 사람이 죽어서 영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고….”

“그렇게 수군댄단 말이야?”

니키엘은 구리봉을 내려놓으며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노력을 해도 악명을 벗기가 쉽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숨을 내쉬던 니키엘은 폴에게 본궁으로 갈 차비를 해 달라고 말했다.

꼴 보기 싫지만 부왕을 직접 보고 말을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어제 태도를 보아 하니 이번 일도 대충 니키엘의 행실이 문제이니라, 하고 치워 버리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뭐라도 제 입장을 밝혀 놓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폴 역시 니키엘이 걱정되었는지 바로 준비를 도와주었다. 니키엘은 최대한 단정한 옷을 꺼내 오라 했고 폴은 니키엘의 요구에 맞춰 은사로 포인트만 준 짙은 청색의 프록코트를 가져왔다.

그렇게 니키엘은 외출 준비를 마친 채로 왕자 궁에서 나섰다. 저를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탄 뒤 마차의 벽을 두들겼다. 신호를 알아들은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는 소리가 났다. 왕자 궁의 마차가 그렇게 별일 없이 출발하여 본궁으로 진입하려던 순간이었다.

“윽-!”

니키엘의 뒷덜미에 푹 쑤시는 듯한 고통이 갑작스레 찾아왔다. 폴이 단정하게 빗어 준 머리카락을 헤집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명멸했다. 그리고 문득, 계시를 받듯 여러 정보 값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새로이 떠오른 것들이 아니라 니키엘이 지난 시간 동안 마물에 대한 연구 결과들을 살펴본 다음에 얻을 수 있는 정보였다.

곤충형 마물인 닉시가 갑작스레 여왕 닉시와 함께 둥지를 버리고 탈출하는 원인과 독을 품은 식물형 마물인 상파스가 독성이 없는 진액을 분비하는 이유, 거대한 새 마물인 슈피츠가 따뜻한 서식지를 포기하고 북녘으로 날아가기 위해 민가에서 쟁이 질을 하던 소 두 마리를 잡아먹은 일화.

산발적으로 퍼져 있는 정보들이 니키엘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알고리즘을 생성시켰다. 니키엘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것이다.

“몬스터 웨이브….”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때, 끼익 하는 마찰음과 함께 마차가 본궁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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