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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94)화 (94/130)

94화

어린 동생을 숲에 가둬 두고 가 버리는 행동들은 아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동생을 제 입맛에 맞게 길들이는 행동 같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니키엘은 라피엘이 제 부왕과 같은 인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진짜 니키엘 또한 성격이 좋지 못하니, 유전적으로 이어진 몹쓸 인간들일 수도 있겠다고 추측했다.

라피엘의 말에 레이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또 한 번 사람 좋은 미소로 왕에게 다시 한번 첨언했다.

“하면 지금 당장 연회를 파하시고 가스파르 백작을 조사해 보심이 어떠십니까. 사안이 사안인 만큼 이는 역모죄로 다스려야 옳습니다.”

“그건 너무 심한 것 아니오, 볼트윅 공.”

라피엘이 다시금 레이먼의 말을 막았다. 왕에게 첨언하던 레이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피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무엇이 심하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자 전하.”

“아직 가스파르 백작의 혐의에 대해 어떤 것도 특정할 수 있는 게 없는데 벌써부터 죄인 취급은 좀…. 게다가 오늘은 토벌 대회의 필승을 기도하는 성스러운 자리가 아니요.”

니키엘은 레이먼의 표정이 순식간에 구겨졌다가 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아마, 지금도 정원만 나가 보면 귀족들이 여기저기 처박혀 붙어먹고 있기 바쁜데 성스러움 다 얼어 죽었다, 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쩐지 레이먼의 생각이 다 들리는 것 같아 니키엘은 짧게 헛기침했다. 레이먼은 이번엔 웃음을 지운 채 나라가 걱정되어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충신의 다급한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하오나, 태자 전하. 전하의 사랑스러운 동생분께서 변고를 당할 뻔한 일에 분노를 느끼지도 않으십니까. 그 돼지 새끼, 아니 그 탐욕스러운 자가 니키엘 전하의 잔에 무엇을 탔든, 그저 달콤한 설탕 가루일 리는 없지 않겠습니까.”

니키엘은 레이먼이 꽤 고단수라고 생각했다. 저런 식으로 대중 앞에서, ‘네 동생 걱정도 안 되냐, 이 한심한 놈아.’라고 공격하면 상대는 레이먼의 수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부왕은 이번에도 장자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만, 그만하라…. 오늘은 태자의 말대로 성스러운 자리이니 그를 투옥하고 내일 아침부터 조사를 시작하는 것으로 하라. 그리고 지하 감옥은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자에게는 너무 과한 면이 없지 않아. 짐은 짐의 백성을 사랑하니라.”

미친 새끼인가. 백성 사랑에 네 자식은 깨꼬닥 죽어 나자빠져도 된다 이거야? 약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율란이 내상 없이 이성만 잃은 채로 늑대로 화한 것을 보아 하면 아무래도 최음제 종류인 것 같은데, 못해도 강간, 최대 죽임을 당할 뻔한 아들을 두고 귀족의 입장을 추켜세우는 아버지라니.

게다가 주위 귀족들은 이를 두고, 귀족의 편을 들어 주고 입장을 보호해 주는 성군인 폐하라고 부르기는커녕, 부왕조차 무시하는 천덕꾸러기라며 니키엘을 찧고 까불 것이 분명했다. 약자부터 물어뜯는 세계가 아니었던가.

니키엘은 자신이 아침부터 때 빼고 광내는 등 루시안과 함께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썼던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자 왕의 면전에 대고 중지를, 아니 엄지를 추켜세우고 싶었다.

‘제 애비를 내 노예로 부려 가장 먼저 요강 세척부터 시킬 놈.’

부왕의 애비라면 니키엘의 할애비겠지만, 이 혈연관계에 전혀 애착이라고는 없는 니키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선빵은 저쪽에서 먼저 치지 않았는가.

그러나 왕이 그렇게 판결 내린 것에 아무리 볼트윅 공작이라고 해도 말을 얹을 수는 없는지 문제는 그렇게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귀족들은 왕의 결정에 수군덕거리기 바빴다. 니키엘을 흘끔거리기도 했다. 니키엘은 자신이 이번 연회에서도 망나니 이미지를 벗는 것을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다소 짜증이 난 채로 가만히 서 있는데 단상에서 내려온 레이먼이 이쪽을 흘끗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니키엘과 레이먼의 시선은 공중에서 얽혔다.

“…….”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레이먼은 무언가 말하고 싶어 입을 달싹이는 듯했다. 니키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가스파르를 왕에게 고발해 준 것은 레이먼인지라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다. 니키엘은 루시안에게 잠시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루시안은 싱긋 웃었다.

“함께 가시지요. 저도 볼트윅 공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공께선 무슨 인사를…?”

“제 파트너의 억울한 점을 널리 알리지 않았습니까. 고마운 분이지요.”

루시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니키엘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루시안의 여우짓임을 모르는 니키엘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레이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레이먼은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런 니키엘의 손에 씌워진 레이스 장갑과 그의 손을 잡고 있는 루시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진득하여 니키엘이 의아할 정도였다.

어쨌든 인사는 해야 했기에, 니키엘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신세를 졌소. 고맙소, 볼트윅 공.”

니키엘이 감사 인사를 건넬 동안에도, 레이먼의 시선은 그의 흰 장갑 위를 머물고 있었다. 그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얼마나 고마우십니까.”

그렇게 물을 줄은 몰라,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올린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야….”

“제가 무언가를 청해도 가납하실 정도로 고마우십니까.”

레이먼은 담담하게 말했다. 늘 그의 신경질적인 모습만 보았던 니키엘은 레이먼의 눈동자가 생각보다 더 선명한 초록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니키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귓등이 붉어진 레이먼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를 레이먼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니키엘이 약간 벙쪄 있다가, 그게 다냐고 물을 참이었다.

“레이먼, 레이먼, 레이먼. 이제 되었소?”

루시안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3창 하는 것이 아닌가. 레이먼의 미간이 빠르게 구겨졌다.

“지금 뭘 하는-.”

“이름 불러 달라 하시기에 제가 대신 불렀습니다. 원래 무도회에서 파트너에게 곤란한 일이 생기면 대신 해 주는 법이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전하?”

“으응…? 그런 법이 있었나?”

니키엘이 멍한 얼굴로 무도회에서의 예법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동안, 뱀과 순록은 사나운 얼굴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시선에서 불꽃이 튀고 있는데, 니키엘은 루시안이 물었던 예법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폴이 그런 예법에 대해서는 말해 준 적 없는 것 같은데.’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레이먼에게 말했다.

“이름이 뭐 별거라고. 여하튼 고맙소, 레이먼.”

“…전하.”

이번엔 루시안이 충격먹은 듯 멍한 목소리로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얜 또 왜 이러나 싶어 니키엘이 한쪽 눈썹을 다시금 올렸을 때였다. 레이먼이 빠르게 니키엘의 손을 가져가더니 손등 위에 바로 입술을 붙였다.

그 레이스 장갑 위로 말이다.

“가납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겠으니, 다음에도 오늘처럼 친근히 레이먼이라 불러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정중하고 예의 발랐지만, 묘하게 도장을 꽝꽝 찍는 듯한 태도였다.

‘그다지 친절하게 부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니키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니키엘의 대답에 만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레이먼은 곧 등을 돌려 가 버렸고, 니키엘은 갑작스레 루시안의 페로몬을 맡을 수 있었다. 화가 난 듯해 니키엘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공, 무슨 화가 난 일이 있소?”

“없습니다. 제 이름이 루시안 투르운이라는 것 외에는.”

“그래…? 음, 난 니키엘 오시니스요.”

갑자기 아이엠그라운드 자기소개를 하자는 건가 싶어 멍한 태도로 제 이름을 밝힌 니키엘을 보며, 루시안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니키엘에게 이만 배웅해 줄 테니 자리를 뜨자고 권유했다.

아까부터 사실 피곤했던 니키엘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왕이 물러간 이후라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은 라피엘뿐이었지만, 니키엘은 깔끔히 예법을 무시하기로 했다.

루시안이 니키엘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문으로 인도하는 동안,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전해졌다. 니키엘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은 적이 많은 듯했기 때문이다.

연회장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그대로 루시안의 마차에 올라탔다. 루시안은 니키엘의 왕자 궁으로 환궁하는 동안 계속해서 제 이름을 밝혔다. 니키엘도 그에 맞서 자신의 이름은 니키엘이라고 소개해 주었지만, 그가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그를 왕자 궁의 안뜰에 내려 주는 동안 루시안은 무언가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고, 니키엘은 갑작스레 ‘라면 먹고 갈래?’ 하는 대사를 떠올렸다가 민망하여 금세 지워 내 버렸다.

그들은 왕자 궁 현관 앞에서 헤어졌다. 루시안은 제 프록코트에 꽂혀 있던 푸른 장미를 니키엘에게 건네주었다. 니키엘은 그제야 푸스스 웃으며 장미의 향을 맡았고, 내내 무표정하던 루시안도 그걸 보며 천천히 따라 웃었다.

가을바람이 선선한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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