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93)화 (93/130)

93화

니키엘은 루시안이 밟는 스텝이 익숙하여 기분이 좋아졌다. 냇과 췄던 춤은 어딘지 불편한 데다가, 가슴팍이 뻐근하고 아랫배가 동시에 묵직하기도 했다.

냇과의 만남이 오래되지는 않았어도 만날 때마다 두통에 시달리는 것도 이상했다. 그와 말을 할 때마다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는 기분이었다. 때문에 니키엘은 루시안이 제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이 기꺼웠다.

팔로 그의 허리를 감아 당기자 루시안이 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볼 때는 늘씬한 체형이라고 생각되는데도 가까이 붙어 허리를 만지니 기립근이 단단하고 원래 말랐던 제 몸보다 남성성이 물씬 느껴지는 몸이었다.

지난번 그의 연구실에서 간단하게 춤을 췄을 때보다 더 잘 느껴지는 감각에, 이제는 춤에 좀 익숙해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대신, 니키엘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허리가 무척 단단한데 따로 하는 운동이라도 있소?”

헬스장에서 근육이 잘 짜여 있고 운동을 잘하는 회원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저 근데 기립근 한 번만 촉지 해 봐도 되나요?” 하고 묻던 습관이 그대로 나와 버렸다.

잡고 있던 허리를 쓱 쓸다가 실례인 것 같아 엉치 바로 윗부분에서 멈추는데 루시안이 놀란 듯 귓등이 붉어졌다.

“읏, 전하-.”

“…아, 미안하오.”

그의 반응에 니키엘 역시 얼굴이 붉어졌다. 같은 남자끼리 가볍게, 너 3대 몇 쳐? 묻던 습관이 여기서 발휘되어 버린 걸 탓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루시안과 니키엘은 서로의 예비 약혼자이니 말이다. 좀 더 조심스레 대했어야 한다고 자책이 들 만큼, 루시안의 얼굴이 붉었다. 유전병 때문에 피부가 얇은 편이라 물든 얼굴이 꼭 장밋빛 같았다.

니키엘은 흠, 하고 목을 울리고는 루시안의 스텝을 인도했다. 그는 연구실에서 춤을 췄던 것처럼 유려한 스텝으로 니키엘의 리드를 따라와 주었다. 춤추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루시안이 그런 니키엘을 흘겼다. 꼭 아무것도 모르는 이에게 치근덕거리는 못된 망종을 탓하는 듯이 말이다.

“희롱하실 생각이 없으셨던 것이 더 잔인하십니다.”

“아니…. 미안하다니까. 공도 내 허리를 만지면 될 것 아니오.”

“그런 말도 너무 생각 없이 하십니다.”

허리가 뭐 어때서. 루시안이 스킨십에 예민하게 구는 것은 그가 중세 사람이라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만 저는 현대에서 온 데다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이성애자로서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아온지라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허리를 만지는 정도야 형, 동생 사이에 할 수 있는 일 아니겠는가. 니키엘이 어깨를 으쓱이며 루시안의 턴을 유도하자 그를 떠나 빙글 돌고 온 루시안이 니키엘에게 가까이 붙더니 그런다.

“부토니에도 잃어버리시더니. 속상합니다, 전하.”

“아…. 아까 달려 나가다가 떨어진 것 같소. 계속 미안할 일만 생기는군.”

루시안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무언가를 인내하는 듯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루시안이 한숨을 내쉬며 니키엘의 어깨에 제 이마를 톡 떨어트렸다. 은실을 엮은 듯 반짝거리는 그의 머리카락이 니키엘의 가슴팍에 쏟아져 괜히 간지러워졌다.

“저를, 너무 애태우십니다. …어지간히 애가 닳아요.”

음? 그 정도로 속상한가? 니키엘은 제가 잘못했구나 싶어 루시안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다시금 움찔거리길래 가볍게 쓸어 주기까지 했다. 낮은 숨소리가 니키엘의 어깨에 스며들었다. 목덜미까지 닿는 호흡에 니키엘 역시 간지러워졌다.

“미안하다니까. 어떻게 하면 공의 마음이 풀릴 것 같소?”

루시안이 그제야 이마를 떼어 내고는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빛이 무척 깊었다.

“…글쎄요. 해 달라는 건 다 해 주실 것처럼 물으시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들어주겠소.”

진심이었다. 오늘 낮부터 지금까지 루시안이 제게 보인 성의를 보자면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다. 선물은 실용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니키엘로서는 상대가 원하는 걸 알아내어 그걸 선물하는 것이 훨씬 편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다시 말해 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커지더니 이내 왈츠 곡의 연주가 멈추어 버렸다. 니키엘과 루시안 역시 춤을 추던 것을 멈추고 귀족들이 응시하고 있던 단상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단상 위에는 라피엘과 왕, 그리고 레이먼이 있었다. 레이먼은 왕에게 무언가를 고하다가 왕이 그의 말을 막자 사근한 미소를 짓더니, 그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들을 정도로 큰 소리를 냈다.

“폐하, 하면 니키엘 전하를 시해하려던 역적 가스파르에 대한 조사를 지금 바로 시행해도 될는지요.”

역적. 그 무게가 주는 울림이 상당했다. 왈츠곡의 연주가 멈춘 연회장은 귀족들의 웅성거림으로 인해 소란해졌다가, 레이먼의 그 한마디에 의해 모든 소음이 뚝 멎어 버렸다.

왕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이 커지기를 원하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루시안이 그쪽을 바라보더니, 니키엘을 조용히 인도했다. 두 사람은 곧, 단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당도했다.

레이먼은 아직도 빙긋 웃고 있었다. 그가 웃자 무척이나 다정해 보여 뭇 귀족들은 그가 연회를 멈출 만큼 마땅한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신뢰 가득한 미소였기 때문이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레이먼이 곧이어 말을 이었다.

“가스파르 백작이 니키엘 전하에게 건넨 잔에 독극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발트 대공이 그를 감지하고 먼저 술잔에 입을 대어 참사를 막았나이다.”

왕이 말릴 새도 없이, 레이먼이 모두의 앞에서 니키엘에게 벌어졌던 일을 소상히 알렸다. 왕은 그가 사실을 밝히자 곤란한 얼굴을 했다.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딱 봐도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구만. 제 자식 먹을 술에 약을 탔다는데 반응이 저게 뭐야.’

니키엘이 불쾌한 기색을 하자 루시안이 그를 위로하듯 손등을 두들겼다. 니키엘은 그런 루시안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주고 계속하여 정면을 응시했다.

“가스파르 백작은 지하 감옥에 구금시켰습니다. 이는 사안이 명백하고 또 율란 발트 대공이 독극물이 든 술을 니키엘 전하 대신 마셔 이성을 잃기까지 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뭐라?”

왕은 그제야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고 있었다.

“그, 그럼 지금 그 짐승이 궁에 있다는 얘긴가? 근위대는 대체 무얼 하는가! 어서 짐을 지켜라!”

레이먼이 다시금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정하시지요, 폐하. 발트 대공은 현재 이성을 회복하여 출궁하였습니다.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가 송구하다는 말을 전하였으니 폐하께서도 노여움을 푸시지요.”

율란이 그런 말을 할 리 없지만 왕에게는 그가 제게 말도 없이 무도회를 나섰다는 사실보다 그가 늑대의 몸에서 다시금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았다. 니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부왕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내도록 안심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싶었다. 자신의 자식인 니키엘이 당한 피해는 적당히 덮을 수 있는 내용이지만, 그 피해가 율란에게 전해진 지금은 가스파르 백작을 벌하지 않는다는 것이 발트가를 무시하는 처사와 다름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마물 토벌 대회가 코앞인 시점이었다. 이럴 때 율란에게 정말로 변고라도 생겼다면, 늘 마물의 위협을 달고 사는 오시니스 왕국에는 큰 타격이 올 것이다. 마물 토벌 대회에 왕태자인 라피엘을 단 한 번도 출정시키지 않았던 왕으로서는, 율란을 잃으면 당장 있을 토벌에 크나큰 차질이 생길 터였다.

왕은 침통한 얼굴을 했다. 귀찮은 문제를 무시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여 짜증이 난 얼굴이었다. 레이먼은 그런 그를 향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모든 귀족들 앞에서 가스파르 백작이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를 명명백백히 알린 것이다.

“가스파르 백작, 아니 그 무도한 자가 벌인 일에 태양신의 가호를 받는 오시니스의 후손이 명을 달리할 뻔한 것뿐만 아니라, 이 왕국의 군사 총독인 율란 발트 대공까지 변고를 당할 뻔했습니다, 폐하.”

그러니 가스파르에 대한 처벌을 내리라는 뜻이었다. 왕이 썩은 얼굴로 입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가만히 부왕의 옆자리에 서 있던 라피엘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은 그가 술에 넣었던 독약에 대해 조사하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폐하.”

왕이 고개를 들어 그의 장자를 바라보았다. 라피엘은 선선한 태도로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이 어쩐지 비열하기 짝이 없어 니키엘은 그에게 달리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 니키엘의 기억에서도 그렇고, 저놈이 뭔가 좀 수상하던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