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커다란 검독수리의 날개가 창공을 갈랐다. 땅에 날개의 그림자가 질 정도로 큰 새였다. 새가 향하는 곳은 북부의 큰 영지인 이테렌을 넘어 있는 커다란 산맥인 타우수스 산맥이었다.
타우수스 산맥은 광산이 있으나 마물의 출몰이 잦았다. 커다란 산맥은 마치 병풍처럼 북부의 땅을 둘러싸고 있는데, 인간의 침입을 달갑게 여기지 않아 침엽수가 울창했기 때문에 그 밑에 고인 그림자 또한 길고 넓었다.
마물들은 주로 그곳에서 태어나고는 했다. 다른 지방에서도 태어나기는 하지만 적어도 올해는 북부에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날 것이라는 게 수장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말을 타고 전속력으로 달렸을 시 30분 이내의 거리에서부터 출현한 마물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수장들은 수도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타우수스 산맥에서 태어난 다수 마물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지적 존재를 거점으로 뭉치는 듯했다.
때문에 율란은 지카리를 정찰병으로 먼저 출정시켰다. 지카리로서도 마음이 바쁜 일이었다. 보나 마나 짐승 새끼들이 니키엘을 알아보고 덤비기 시작할 텐데 자신은 아직 애 취급이나 받고 있다니. 수컷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어서 빨리 정찰을 완료하고, 토벌 대회를 위하여 행군하는 일행에 합류하여 니키엘의 옆자리를 지켜야 했다. 순진한 니키엘은 짐승 놈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를 것이다.
사람의 말을 잘 믿지 않는 지카리는 율란이나 레이먼이 아무리 니키엘에게 관심 없는 척을 하고 있어도 그들의 내면 역시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니키엘을 언급하는 동안 레이먼과 율란의 심장이 빠르게 뛰며 수컷의 페로몬이 스멀스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루시안도 그걸 느꼈는지 매번 겨울 맞은 뱀처럼 흐리멍덩하던 빨간 눈을 치켜뜨고 제게 쉭쉭거리지 않았던가. 뱀과 늑대, 순록 사이에서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둥지로 니키엘을 초대하여야 하는 지카리에게는 악재가 겹쳤다고밖에 볼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니키엘의 유일한 수컷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지카리의 키는 조금씩 커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냥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인간의 것을 거부하고 자신을 새로 여겨 검독수리로 화한 후에도 이성을 차릴 수 있었던 지카리는 수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희미한 광증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금빛에게서 멀어져서 이러는 거야.’
지카리의 추측은 옳았다. 니키엘에게서 멀어질수록 지카리의 인내심은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수장들보다 인간적인 이성이 부재하여 광증을 앓지 않았던 지카리는 니키엘에 대한 정확한 욕구를 자각한 뒤부터 점점 이성을 회복하여 오히려 광증에 잠식당하게 된 것이다.
당장 광증에 빠지지 않도록 그의 찬란하게 빛나는 머리 타래나 호수와 같은 벽안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그림자에 좀먹히는 기분이었다.
다른 수장들과 다르게 지카리는 광증에 면역이 없었다. 겪어 본 적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성장을 멈출 수는 없었다. 다른 짐승들이 니키엘을 완전히 노리기 전에 제가 먼저 그에게 저야말로 좋은 둥지를 지을 수 있는 완벽한 수컷이라는 걸 어필해야 했다. 니키엘은 온전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와 짝짓기를 하려면 자신이 새로 남아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릇, 수컷이란 짝짓기 상대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지 않겠는가.
지카리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검독수리의 너른 날개는 부지런히 너울거리며 그를 북부의 이테렌으로 데려다주었다. 뾰족한 가문비나무 숲을 지나 율란의 거처인 이테니움 성을 지나면 나오는 산맥이 바로 타우수스 산맥이었다.
머지않은 거리에 지카리는 천천히 공중을 선회하며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예 하늘 위 구름 사이에 숨어 날 수도 있겠지만, 날개가 넓어 자칫하다간 자신의 그림자를 마물들이 발견할 수도 있었다. 마물이란 그림자와 친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카리는 점점 더 몸을 낮추며 산맥으로 향했다. 그때, 저 멀리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산세가 험하여 사람의 출입이 적은 타우수스 산맥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기색이 이상했다.
성체로는 들켜 버릴 것 같아 지카리는 억지로 애를 써서 몸체를 작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니키엘의 신성력을 맘껏 받았을 때는 크기를 늘리는 것도 줄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지만, 최근에 접촉이 없어 신성력의 비호를 받지 못한지라 어려움이 있었다.
니키엘의 침실로 숨어들기 전에는 몸의 크기를 키우는 게 어려웠는데, 인간의 욕구를 알아 버린 지카리는 이제 크기를 줄이는 것도 어려운 듯했다. 결국 몸체를 줄이다가 어지러워진 탓에 날개가 가문비나무 가지의 첨단에 닿기도 했다.
때문에 비행의 궤도를 잃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결국 내려앉은 지카리는 나뭇가지에 몸체를 부딪치고 날개가 긁혀 푸드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낙하하기 전에 가까스로 날개를 펴 다시금 날아오른 지카리는 숲속이 묘하게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산새들이…. 없다.’
남녘으로 날아가야 하는 철새들을 제외하고 겨울새들은 산맥에 머물러야 함이 옳은데 새들이 날개를 부비는 소리 하나 없이 숲이 조용하기만 했다. 비단 새들뿐만 아니었다. 다른 산짐승들까지 씨가 마른 듯 조용했다. 지카리는 숨을 죽이고 푸드덕 날아올랐다.
몇백 년을 살아와 거대하게 굵어진 나뭇가지에 앉아 동태를 살폈다. 수리의 홍채가 좁혀졌다 넓어지며 산속의 모든 것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지카리의 후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끼릭끼릭거리는, 흡사 나사가 조여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어떤 짐승의 울음소리도 아니었다. 지카리는 그것이 마물이 내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지카리는 나뭇가지의 아래로 몸을 숨겼다.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하자 거대한 훔비비 두 마리가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훔비비는 사자의 손톱에 몸통엔 청동 비늘이 덮여 있고 머리에는 들소의 뿔이 달린 거인이었다. 그들의 꼬리에 달린 뱀의 대가리 같은 것이 있는데 이는 벡시라는 마물로, 훔비비에 기생하며 훔비비를 조종하는 마물이었다. 훔비비의 지능이 낮고 멍청하기 때문에 벡시가 이를 조종하며 사냥을 도와주는 일종의 공생 관계였다.
벡시의 조종을 받고 있다고 해도 훔비비는 사냥 외의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마물인데, 무언가를 옮기는 게 바빠 보였다. 흡사, 인간의 사회 활동처럼 보였다. 지카리는 홍채를 조절하여 그들이 하는 행동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했다.
그것들은 머리가 터진 수사슴 몇 마리를 옮기고 있었다. 먹이를 잡으면 잡은 자리에서 바로 먹어 버리는 훔비비 같지 않은 행동이었다. 저장 습성이 없는 걸로 아는데 먹이를 옮기다니. 게다가 훔비비는 서로 협력할 정도로 지능이 높지 않았다. 먹이를 옮기는데 서로 싸우지 않고 협동하여 움직이다니 이상했다.
그때 무언가 낮은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흡사 인간의 언어처럼 일정한 운율을 보였다. 지카리는 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나무 하나를 이동했다. 날갯짓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천천히 비행하느라 어깻죽지가 뻐근했다.
염탐을 계속하기 위해 날개를 감추고 홍채를 열어 시력을 높인 지카리가 앞을 본 순간이었다. 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지카리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
서로 다정하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던 커플은 연회장으로 무사히 복귀하였다. 그동안 루시안은 청각을 곤두세워 레이먼이 가스파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살폈다.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루시안은 레이먼과 시선이 마주쳤다.
레이먼은 루시안의 손을 잡고 있는 니키엘을 한 번 보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왕에게로 향했다. 루시안은 서늘한 얼굴로 그걸 보다가 곧이어 고개를 돌린 채 니키엘을 향해 상냥하게 웃었다.
“다음 춤곡은 왈츠군요.”
“공과 함께 연습했던 그 곡이오.”
니키엘도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루시안이 보기에 니키엘은 꽤 다정한 성격이었다. 전에는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리 분별을 잘하고 심지가 굳은 구석이 있었다.
네 명의 수장들 중 궁중 연애를 해 본 이는 레이먼뿐이었다. 그러나 루시안은 자신의 마음을 빨리 자각한 만큼 없는 경험치를 선수 필승으로 채우고 있었다. 니키엘이 지카리에 대해 묻지도 않는 걸 보면 멍청한 새 새끼 역시 니키엘에게 원래의 모습으로 다가간 적은 없는 듯했다. 그건 지카리가 맨 처음, 니키엘이 어딘지 이상하다고 했던 그때부터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니키엘이 소중했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부터 신성력의 은혜를 받은 것인지 지독했던 폐병이 종적을 감춘 듯 기침이 멎어 가는 것에 루시안의 집사이자 유년 시절 보호자였던 졸탄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런 사소한 기적이 아니더라도 루시안은 니키엘과 함께하고 싶었다. 다른 짐승들은 어떨지 몰라도 인간의 세계에서는 종종 강한 수컷이 아닌 가장 질긴 수컷이 오래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나머지 머저리들이 제 발로 기회를 뻥뻥 차는 동안, 루시안은 니키엘의 옆자리에 꼭 붙어 있을 작정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왈츠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