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89)화 (89/130)

89화

연회장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무도회가 한창이었다.

“총장 예하께선 언제 귀순하실 예정이십니까.”

“빨리 꺼지라는 말로 들려 마음이 번잡합니다.”

표정 없이 서릿발처럼 말하는 루시안의 말에 오릭스 총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 대화를 가까운 곳에서 듣고 있던 법황의 외질이자 성기사단의 좌익인 유리히 키슈친은 놀라 턱이 떨어질 뻔한 걸 가까스로 멈췄다.

그가 놀란 이유가 있었다. 오릭스 지멘츠는 헌헌한 외양에도 불구하고 숫기가 없고 정치적인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인사라 다른 이의 말을 저런 식으로 되받아치지 못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궁에 도착한 뒤로 오릭스의 행동이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아무리 신성국의 기사단 총장이라고 한들, 오시니스의 개국공신과 다름없는 투르운 공작의 말에 저런 식으로 대꾸하다니. 고지식하고 예의를 중시하는 오릭스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루시안 역시 오릭스의 고까운 대답을 듣고는 한쪽 눈썹을 올린 채로 대답했다.

“파트너가 있는 이의 첫 춤을 앗아 가신 분치고는 예상외로 눈치가 멀쩡하시군요.”

“니키엘 전하의 첫 춤 상대가 나라는 게, 꽤 억울해 보이십니다, 공.”

그러더니 낄낄 웃으며 지나가던 왕실 시종의 은쟁반에서 은잔 하나를 들어 안에 든 증류주를 단숨에 마셔 버리기까지 했다. 그를 지켜보고 있던 유리히는 거듭 놀라는 중이었다.

오릭스는 유리히가 저와 루시안의 대화를 주목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슬쩍 등을 돌려 루시안에게만 무언가를 속삭였다. 유리히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궁금했지만 거리가 멀기도 하고, 오릭스가 등을 돌린 탓에 입 모양을 읽어 볼 수도 없었다.

루시안은 아까부터 법황의 개새끼가 왜 저에게 유독 시비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신이 부여한 신성력만이 이 시대를 아우를 오롯한 기적이라 표방하고 있는 신전과 자연에 퍼져 있는 마나를 운용하여 마법을 일으키는 마법사들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루시안이 기억하고 있는 오릭스 지멘츠는 숫기 없는 인물로 이렇게 당당하게 시비를 걸어 올 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황의 명에 위배되지 않는 것에는 일절 관심이 없는 심심한 인사가 니키엘의 첫 춤을 빼앗아 간 게 심히 이상한 일이기도 했다.

뒤로는 사생아를 낳아 기르는 한이 있더라도 대놓고 연애를 할 입장이 못 되는 성기사단 총장 주제에 니키엘과 추었던 그 끈적한 브웨이카를 다시 떠올리자 목덜미에 비늘이 돋고 눈동자의 동공이 세로로 쪽 찢어지려는 기분이었다.

“예하께서는 혹 죽을 날이라도 받아 두셨습니까. 안 하던 짓거리를 하시니 걱정이 됩니다.”

“다정도 하셔라. 내 걱정에 쓸 만한 주변머리가 남았다면, 니키엘 전하의 곁이나 또렷하게 지키시지요.”

뭣도 아닌 게 아까부터 태도와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니키엘과의 접점이라고는 없는 걸로 아는데 꼭 그를 잘 아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루시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오릭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안만 들릴 만큼 다시 한번 속삭였다.

“지금 먹이 뺏긴 구렁이처럼 색색거릴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 두시지요. 왕태자 전하가 귀궁하지 않았습니까. 태자 전하께 뭔가 특별한 게 있다는 건 공께서도 알고 계신 일 아닙니까.”

“…….”

그 말에, 루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라피엘 오시니스는 꽤 건실한 척하고 있지만 옆에서 보고 있으면 속이 썩어 문드러져 있는 과일처럼 묘하게 겉만 멀쩡한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니키엘의 악명이 높은 탓에 라피엘의 무능함이나 잔인한 면모는 대중들에게 쉽게 잊혔다. 무능력한 왕의 장자답게, 라피엘 역시 다분히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흠들은 매번 니키엘이 친 사고에 의해 조용히 지나가고는 했다.

지지난해만 해도 그랬다. 추수절 왕국민들은 등을 밝힐 초를 사는 풍습이 있었는데, 라피엘이 그해 가을걷이가 끝나기도 전에 사냥 대회를 크게 열며 수도의 돼지기름과 소기름을 몽땅 구매한 뒤, 그것을 맹수 잡는 유인책으로 쓰는 바람에 돈이 없는 빈민들은 밀랍 양초를 구입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했다.

장차 나라를 다스릴 왕태자가 자신의 사사로운 오락을 위해 왕국민들의 살림을 위협했다는 구설수는, 니키엘이 신전 근처에서 웬 귀부인과 야외 정사를 벌이다가 사제에게 들켜 망신을 당한 일로 인해 금세 시들해졌다.

그 귀부인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느 지역 신전의 어느 사제가 그것을 목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런 식으로 라피엘이 벌인 편협한 실수들은 동생의 악명에 의해 쉽게 가려지고는 했다.

루시안이 그를 생각하고 있을 때, 오릭스는 그의 어깨를 한 번 두들기고는 등을 돌려 어딘가로 가 버렸다. 루시안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라피엘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러 대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부왕을 닮아 어느 정도 준수한 생김을 하긴 했지만, 어딘지 오만한 구석을 버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한편, 레이먼은 대리석 바닥 위에 떨어진 한 송이의 푸른 장미를 주워 들고 있었다.

“…….”

그는 말없이 살짝 시들해진 장미잎을 바라보았다. 푸른 장미는 아까 전, 니키엘이 루시안과 함께 등장할 때 그의 가슴팍에 꽂혀 부토니에를 이루던 그 장미가 틀림없었다. 이토록 푸른색의 장미는 마법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으며, 그렇게 선명한 파란색을 낼 수 있는 마법사는 마법국 장관인 루시안 투르운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이먼은 이 장미의 주인이 니키엘이라고 확신했다. 색이 꼭 니키엘의 벽안을 닮아 있었다.

잠시간 말없이 꽃을 내려다보던 그는, 그대로 장미를 주워 든 채 어딘가로 향했다. 수 분 전 가스파르 백작이 허둥지둥 연회장을 나섰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가스파르 백작이 니키엘에게 잔을 건네고, 그 잔에 든 것을 무엄하게도 한 입에 털어 넣은 율란이 연회장을 떠나는 것까지 모두 보고 있던 레이먼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애당초, 백작이 갑작스레 니키엘에게 잔을 건넨 것부터가 이상했다. 그는 가스파르 백작을 쫓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의 내면 안에 있는 짐승은 레이먼에게 율란을 쫓아간 니키엘의 뒤를 따르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율란에게 니키엘을 영영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레이먼은 부정했다.

‘전하께서 눈이 없는 것도 아닌데 북부의 냄새 나는 개자식을 왜 쫓아가신다는 말이야. …게다가, 그러면 또 어떻고.’

지난 며칠간 해 왔던 부정이 이번에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방 안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던 레이먼은 수없이 많은 시간 동안 인정할 수 없는 자신과 싸워야 했다. 니키엘을 향한 자신의 두근거림과 그 욕정들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외면하면서.

‘내가? 니키엘 오시니스에게? 자존심과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사실상 사랑에 빠진 게 처음인 남자는 오기와 자존심만 세운 채로 쓸데없는 부정을 계속해 왔다.

레이먼에게도 이유는 있었다. 자신은 니키엘 앞에서 몇 번이고 그를 대놓고 욕보였다. 말로 가했던 폭력을 참아 주던 니키엘은 종내에는 레이먼을 향해 서늘한 눈을 치켜떴다. 더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긴 듯해, 갑작스레 초조한 감이 몰려왔었다.

니키엘 앞에 선 레이먼은 주제도 모르고 영민한 분에게 치근덕거리던 지독한 추남이 자신의 추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패악만 부리다가 외면받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 이 감정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니키엘에게 최소한 사과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 며칠간 꿈에 나와 저를 달래 주었던 니키엘을 볼 면목이…. 아니, 꿈에 대한 것은 그만 떠올려야 했다.

연회장은 그의 꿈에 나와 시종일관 달큼한 미소로 저를 보던 니키엘을 곱씹기엔 부적절한 장소였다. 레이먼은 얼핏 당겨 오는 아랫배에 프록코트 자락으로 앞섶을 가리며, 애매한 인정과 부정 사이에서 떠도는 자신에게 그만 갈피를 잡으라며 다그쳐야 했다.

그 때문에 본능의 경고도 무시한 채 가스파르 백작을 쫓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금 율란을 쫓아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뒷덜미에 달라붙어 기분을 아주 더럽게 만드는데도 불구하고, 레이먼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잃은 순록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묘하게 더러워지는 기분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라, 레이먼이 기어코 가스파르 백작과 조우했을 때는 그의 주변으로 짐승의 페로몬이 섞인 살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다시피 하고 있었다.

레이먼은 망설이지 않고 백작이 달아나려 하는 그 바로 옆 나무를 발로 걷어찼다. 기둥이 두꺼운 나무였음에도 불구하고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우지끈거리며 기둥이 반쯤 부러졌다.

“히익-!”

레이먼은 해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딜 바삐 가시오, 백작.”

“보, 보, 볼트윅 공작 각하-!”

말을 더듬으며 저를 보고 희게 질린 백작의 추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레이먼은 속으로 계속해서 갈팡질팡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북부의 개새끼를 따라가? 대체 전하께서는 언제부터 그 망할 개자식과 친하셨다고 쪼르르 달려가시는 게지.’

양심의 허락을 웃도는 한도 내에서 니키엘을 원망도 해 봤다. 말이 되지 않는 원망이라는 걸, 레이먼 그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백작은 정상인으로 볼 수 없는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 내가 그런 게 아니야. 위대하신, 위대하신 분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상념에 빠져 있던 레이먼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백작의 뺨을 내려쳤다. 백작이 두 눈을 까집으려 들길래 따귀라도 살짝 때려 제정신으로 돌리려 한 친절일 뿐이었다. 손 크기가 상당한지라 내려치듯 뺨에 꽂힌 손바닥에서 나는 소리가 상당했지만 말이다. 그러고는 상냥한 말투로 물었다.

“정신이 드시오, 백작? 갑작스레 멍청한 말이나 해 대는 것이 걱정되어 뺨을 후려쳤소.”

“으, 으윽, 아픕니다, 아픕니다, 각하-. 제발 자비를-.”

“자비라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오. 난 그저 전하에게 건넨 술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 백작의 뒤를 쫓은 것뿐입니다.”

레이먼은 다시 한번 상냥하고 나긋하게 웃었다. 바른대로 고하지 않으면 다시금 뺨 맞을 각오를 하라는 듯이. 대번에 그 숨은 뜻을 알아들은 백작이 공포에 치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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