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87)화 (87/130)

87화

“방금 이무기라 하였소?”

니키엘은 참지 않고 물었다. 혹시 냇도 다른 세상에서 온 걸까? 정확히는, 대한민국 말이다.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쯤되면 그냥 직설적으로 질문하는 게 낫다.

사람들은 니키엘에 대한 기대가 낮은 편이니 무슨 말을 하든, ‘또 저러시네.’ 하고 말 것이다. 괜히 에둘러 묻느니 이무기에 대해 어떻게 아느냐고 딱 꼬집어 묻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도 답을 기다리는 게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냇은 자신의 팔을 잡은 니키엘의 손이 살짝 떨리는 걸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입을 다문 채로 니키엘의 말에 대답하지 않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브웨이카가 나오는군요.”

브웨이카는 오시니스의 무곡 중 하나로, 일종의 탱고 박자와 맞는 곡이었다. 오시니스 전통 왈츠보다는 살짝 빠른 박자감에 파트너끼리의 스킨십이 많아 연회가 막 시작한 시간대보다는 나이가 지긋한 귀족들이 귀가한 새벽이 되면 연주되는 곡이었다. 관능적인 춤이기 때문에 진짜 니키엘이 수없이 연습하던 바로 그 춤이었다.

그런데 벌써 브웨이카가 나오다니. 니키엘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는 남성의 스텝밖에 밟을 줄 모르오.”

이 무곡을 보다 끈적하게 추기 위하여 여성의 스텝까지 연구했던 진짜 니키엘이었지만, 니키엘은 모른 척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브웨이카를 추고 싶지도 않았다.

“전하, 염려 놓으시고 제 허리를 다정히 감아 주소서.”

냇이 사르르 웃으며 말했다. 다정한 빛을 띠고 있는 녹색 눈이 니키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니키엘은 다소 기가 막혔다.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루시안에게 양보를 구하게 만들지를 않나, 오늘의 냇은 지난번과는 다르게 다소 막무가내였다.

니키엘이 그런 냇을 가만히 바라보자, 어느새 표정을 지운 냇이 고개를 살짝 숙여 니키엘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피엘이라는 개자식을 조심하십시오, 전하. 그 개의 종자가 벌인 일을 분명 보셨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니키엘은 자신이 본 환상, 정확히는 진짜 니키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정확히 짚어 내는 냇에게 놀라 숨을 멈췄다. 냇은 니키엘을 바라보지 않은 채 그의 팔을 제 허리에 두르며 1보 전진했다.

덕분에 니키엘도 반걸음 물러서며 브웨이카 곡의 남성 스텝을 밟아야 했다. 냇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반만 돌렸다가 복귀시키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강인해 보이는 목빗근이 드러나며 곧고 굵은 목선이 냇의 남성성을 돋보이게 해 주었다. 허리를 젖혀 두툼한 흉근이 도드라지자 그들을 주목하던 영애와 영식들이 탄성했다.

니키엘은 그의 허리를 가뿐히 받쳐 주었다. 그동안 애써 왔던 운동의 효과였다. 깃털같이 가벼운 귀부인들에 비해 풍채가 심하게 좋은 기사단장의 무게까지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냇이 붙잡은 니키엘의 팔을 지지대 삼아 허리를 펴 올라왔다. 냇과 니키엘의 가슴팍이 맞닿았다. 서로의 피부 사이에는 옷감이 가로막혀 있어 감촉이 느껴질 리 없는데도 감각이 선연했다. 니키엘은 광대 부근을 붉힌 채 제 첫 춤 상대의 시선을 피했다.

신장 차이 때문에 니키엘은 남성 스텝을 밟아도 냇의 품에 안긴 꼴이 되었다. 이번에는 니키엘의 차례였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움직였다 복귀시키자, 냇이 다시금 속삭였다.

“저 개종자의 근처에서는 반드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계셔야 합니다. 나의 밤이시여.”

태양신을 섬기는 성기사단장의 입에서 나올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밤을 찬양하는 듯한 말은 태양이 뜨지 않는 게 오히려 좋다는 듯 들렸다.

니키엘은 그의 허리를 단단히 받친 채, 냇의 다리 가운데 제 허벅지를 밀어붙이며 냇이 고개를 뒤로 젖힐 수 있도록 했다. 육감적인 허벅지가 니키엘의 다리에 닿았다. 심장이 무척 뛰는 소리가 났다.

“그러니까 그걸 경이 어떻게….”

“냇, 이라고-.”

그가 곧바로 허리를 일으켜 제 허리에 걸린 니키엘의 팔이 풀릴 때까지 제자리에서 빙글 돈 뒤, 다시금 니키엘의 품으로 쓰러지듯 돌아와 그의 팔이 제 몸을 껴안게 만들었다. 그 접촉만으로도 심장이 크게 뛰는 기분이었다.

“불러 주시기로 하셨지 않습니까.”

마지막은 또 애원이다. 니키엘은 난감함에 혀를 찼다. 두 사람의 가슴팍이 다시금 맞붙었다. 니키엘은 거친 숨을 조절하려고 애를 썼다. 들숨을 위해 부풀어 오른 흉곽이 냇에게 닿을 때마다 야릇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는 귀족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일 수가….”

“브웨이카가 이토록 관능적인 춤이었던가요.”

귀족들 모두 부채로 입을 가린 채 소곤거렸다. 두 사람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옅은 홍조까지 떠올랐다. 은발에 흑안을 한 성기사단 총장 오릭스와 백금발의 벽안인 니키엘이 완벽한 브웨이카를 선보이자 플로어에 나오는 커플이 없었다. 웬만한 자들은 모두 용기를 잃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들을 지켜보는 눈 중 불온한 시선도 섞여 있었다.

‘흥, 저 천박한 왕손이 뭐가 좋다고 다들 꺅꺅거리는 거야.’

가스파르 백작이었다. 가스파르 백작은 지난번 니키엘에게 망신당한 뒤 결국 투자 유치에 실패하여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어찌 된 것인지 그 일이 소문처럼 퍼져 요즘에는 가스파르 백작을 불러 주는 이도 없었다. 오늘 이 무도회의 초대장도 충신이었던 선대의 이름을 팔아 간신히 받은 것이었다.

‘대귀족인 이 몸이 이렇게까지 수모를 겪어야 하냐고.’

가스파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벼락과 같은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 그래. 그러니까 복수해야지.

가스파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복수해야지. 고작 왕궁의 걸레 주제에 내게 망신을 줘? 이 값을 톡톡히 치러 주지.

- 맞아. 니키엘 오시니스는 걸레니까. 걸레에게는 알맞은 위치가 있는 법이야.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가 다시금 속삭였다. 가스파르는 몇 잔째로 비우는지 모를 과실주를 다시금 마시며 게슴츠레한 눈을 떴다.

그리고 머릿속에 들리는 목소리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니키엘을 욕보여, 평판이 나아지기 시작한 저 건방진 막내 왕자에게 자신의 원래 위치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스파르는 아무도 저를 보지 않을 때 재빨리 품에서 손수건에 쌓인 무언가를 꺼내어 은잔에 섞었다. 하얀 가루가 남김없이 은잔 속 사과주에 섞였다. 춤을 추고 나온 니키엘은 반드시 목이 마를 것이다. 그때 잔을 건넬 속셈이었다.

은잔에 섞은 약은 ‘미혹의 기회’라고 불리는 흥분제로, 나이 많은 영감들이 성감을 깨울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젊은 니키엘이 이 약이 섞인 술을 먹게 되면 발정이 날 것이다. 그가 걸레였던 전처럼 말이다. 그렇게 되면 궁중 한복판에서 이성을 잃은 죄로, 그는 간신히 회복되어 가던 평판을 순식간에 잃고야 말 것이다.

오늘 니키엘은 루시안 투르운 공작과 함께 무도회에 등장했다. 말이 되질 않았다. 그 콧대 높은 투르운 공작이 왜 니키엘의 파트너가 되어 무도회에 참석하냐는 말이다. 가스파르가 생각하기에 모조리 부조리한 일들뿐이었다.

그가 그런 생각에 빠진 사이, 브웨이카의 마지막 구절이 연주자의 현을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가스파르는 꿀꺽 침을 삼킨 뒤 이제 막 플로어 중앙에서 나오고 있는 아름다운 커플에게로 다가갔다.

마침 파트너가 교체되려고 하고 있었다. 니키엘의 형이자 오시니스의 왕태자인 라피엘이 두 사람에게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피엘이 웃으며 다가서자, 오릭스 지멘츠 역시 왕태자와 마주 섰다. 그는 한 발자국 라피엘에게로 다가가 악수를 나누며 슬며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가스파르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가스파르는 재빠르게 단상 위를 올려다보았다. 왕이 만든 수다의 늪에서 이제 막 빠져나오려는 루시안과 레이먼이 니키엘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음 춤 상대가 없는 니키엘을 노리는 것이 분명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배알이 꼴렸다. 저런 천한 놈이 왕자랍시고 대귀족들을 홀리고 있는 꼴이 못마땅했다.

그는 니키엘이 다음 춤 상대와 조우하기 전에 빠르게 니키엘에게로 향했다. 말을 걸 기회를 노리고 있던 다른 귀족들보다 먼저 자리를 선점해야 했다.

그리고 가스파르는 드디어 니키엘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전하…. 목이 마르시지요. 이걸 좀 드셔 보시지요.”

저라는 걸 들킬까 봐 목소리를 변조하고 사냥터에서나 쓸 법한 챙이 긴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가스파르는 니키엘에게 잔을 건넸다. 니키엘은 갑작스레 나타난 가스파르를 경계하는 듯했으나, 귀족이 건넨 잔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거절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걸 깨달았는지 약간 난감한 얼굴로 잔을 받아들였다.

가스파르는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마셔, 얼른 마셔라. 마시고 네가 얼마나 천박한 노예의 핏줄인지, 네 안에 흐르는 신성력은 그저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 주렴!’

계속해서 알 수 없는 환희가 차올랐다.

순진하고 바보 같은 걸레 니키엘은 잔을 받아 든 채로 은잔에 입술을 붙이고 있었다. 좀만 더! 가스파르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집착적인 눈빛으로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니키엘이 잔을 기울여 안에 든 황금색의 과실주를 입안에 머금으려 했을 때였다.

“실례합니다, 전하. 목이 너무 말라서.”

언제 도달한 것인지, 니키엘의 잔을 낚아챈 율란이 고개를 뒤로 젖혀 잔 안에 든 것을 홀랑 먹어 버리고 말았다.

“안 돼!”

가스파르가 놀라 소리쳤다. 귀족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이곳을 바라보며 웅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도주해야 했다. 바로 도망쳐 저 약의 정체에 대해 들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도 말이다. 찬란하고 뜨거운 명령을 받아 저 걸레 창놈 새끼를 응징하려고 했다는 걸 실토하는 순간 자신은 태양 빛에 몸이 타 버려 죽고야 말 것이다!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가스파르는 둔한 몸을 움직여 빠르게 무도회장을 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니키엘과 잔 안에 든 정체불명의 술을 마셔 버린 율란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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