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86)화 (86/130)

86화

삽시에 속이 안 좋아졌다. 니키엘은 창백하게 질린 낯빛을 했다.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처음 보는 니키엘은 방금 전 보았던 기억 때문에 이렇게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가 싶어 혼란스러웠다.

좀 전까지 수장들의 주목을 받은 니키엘을 자랑스러워하던 부왕은 그의 듬직한 장자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라피엘! 이리로 오라!”

왕의 부름에 라피엘이 2층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니키엘과 마주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였다. 수장들은 모두 그런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어디가 미령하냐 묻는 것 같았지만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왕은 들뜬 어린애 같은 얼굴로 그들을 불렀다.

“다들 이리 와, 오랜만에 귀향한 나의 장자와 인사 나누시게.”

부왕이 말한 ‘다들’에는 니키엘이 없었다. 수장들을 이곳까지 인도한 것과 다름없는 니키엘은 이미 안중에도 없이, 그들에게 라피엘을 인사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다음번 왕이 될 제 아들에게 권력을 무사히 넘겨주려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할 지경이었다.

그때, 라피엘이 왕이 앉은 의자에 다가섰다. 그는 여전히 니키엘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부왕에게 인사했다.

“서대륙의 수호자이신 큰 태양이시여. 태양신의 후손, 라피엘 오시니스가 방금 막 귀궁했나이다.”

라피엘의 인사말에 좌중이 작게 술렁였다. 특히 계단 밑에 도열해 있던 성기사단이 크게 놀란 듯 몸을 움찔했다.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어느 예법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릴 수 있었다.

오시니스의 종교관은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국교인 솔리우스교 자체가 법황이 따로 선출되는 신성국이지만, 왕이 자신을 소개할 때는 태양신인 솔리우스의 이름을 빌려 태양이라 자칭한다는 것이었다. 초대 왕인 오시니스의 피를 이어받은 왕들은 대대로 그런 식의 예법을 사용해 왔다.

자칫하면 신성 모독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솔리우스교는 눈을 감아 주었다. 오시니스 왕국이 아니라면 솔리우스는 서대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신들 중 그저 그런 신이 되었을 테니 말이다. 솔리우스교가 힘을 받기 시작한 자체가 오시니스 왕국의 개국과 국교 확립 때문이니, 역대 왕들이 자신을 태양이라 일컬음은 그저 신의 아들이다로 해석하여 받아들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큰 태양’이라는 말 자체는 너무 과한 단어였다. 그것은 솔리우스교의 법황에게도 허락되지 않는 칭호였다. 큰 태양이라는 말 자체가 주신인 솔리우스를 뜻하는 말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라피엘은 지금, 성기사단이 도열해 있는 무도회장 한가운데에서 부왕을 향해 ‘큰 태양’이라 호칭한 것이다.

나이가 꽤 지긋한 늙은 귀족들은 기함했고, 젊은 귀족들은 라피엘의 용기를 동경하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어 두근거리는 얼굴로 서로 쑥덕거렸다. 그리고 그때였다. 성기사단 총장인 오릭스가 입을 연 것이다.

“그럼 폐하, 허락해 주신다면 이만 물러가겠나이다.”

뜬금없는 마무리 인사에 귀족들이 다시 한번 놀랐다. 그것은 다분히 이중적인 뜻이었다.

왕의 장자인 라피엘이 내뱉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인일 수도 있고, 시끄러운 자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오릭스 지멘츠 총장이 최소한의 예를 차리려 무도회에서 왕을 알현하자마자 가도 되냐 허락을 구하는 순순한 인사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콧대 높은 지멘츠 총장의 성격에 대해 잘 아는 귀족들은 두 가지의 가설 중 어느 것을 채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얼굴로 쑥덕거렸다.

왕은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자신의 후계자를 성기사단 총장과 인사시키고 싶어 하는 욕심이 가득 든 얼굴이었다.

“간다니, 아직 연회는 시작도 안 하였는걸. 그러지 마시고 자리를 지켜 연회를 즐기시게.”

서대륙의 패권자로 불리는 오시니스의 왕이 할 법한 권유는 아니었다. 다소 비굴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장은 그제야 왕의 체면을 생각한 것인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다음 입을 열었다.

“폐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타국에서 귀궁하신 왕태자 전하와 회포를 풀기 위해 여기 이곳에 모인 대귀족 수장님들, 특히 파트너인 루시안 투르운 공을 대신하여, 제가 니키엘 전하의 첫 춤을 함께 해도 되겠나이까.”

좌중이 다시 한번 크게 술렁였다. 그중 가장 크게 술렁인 사람은 니키엘이었다.

‘아니, 가만히 있던 내 이름이 왜 거기서 나와.’

니키엘의 당황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서로 속삭일 생각도 없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반응은 당연했다. 에스코트의 상대가 무도회의 첫 춤을 가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그 기회를 성기사단 총장이 양보해 달라 주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시니스 무도회의 예법이니 신성국에서 파견 나온 총장이 몰랐을 수도 있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렇게 귀족들은 숨죽여 왕의 결정을 기다렸다.

왕은 솔직히 말해서 욕심이 났다. 총장이 자리를 먼저 뜬다고 했을 때, 왕은 적잖이 당황했다. 이제 막 귀궁한 라피엘과 얘기를 나누게끔 자리를 마련하지도 못했는데 무도회장에서 아예 나가 버리면 그런 기회를 얻지도 못하게 될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왕은 아직 루시안이 어떤 마음인지 몰랐던 만큼, 니키엘의 첫 춤 정도는 총장에게 양보하게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루시안이 니키엘 때문에 왕과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도회 파트너를 자청한 것이 아니라, 그가 드디어 자신의 권력 앞에 굴복했다고 오판한 것이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커다란 뱀은 분노가 섞인 페로몬을 퍼뜨리려다가 이곳이 연회장 한복판임을 깨닫고 간신히 갈무리한 뒤, 갑자기 튀어나온 은발 자식이 남의 것을 빼앗는 도적이나 다름없다고 일갈하려던 때였다.

별다른 재주가 없어도 때를 맞추는 재주 하나는 뛰어났던 왕이 루시안보다 먼저 입을 연 것이다.

“좋소. 총장이 나의 불민한 자식과 첫 춤을 함께 한다면, 그 또한 주신의 축복이 아니겠소. 니키엘, 뭐 하느냐. 어서 총장을 뫼시지 않고.”

니키엘은 오묘한 마음이 되었다. 그는 인상을 굳혔다.

‘저 새끼 완전 아버지가 아니라 포주 아냐?’

진짜 니키엘이 늘 우울증을 달고 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대놓고 따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연회장 가운데서 부왕의 명에 항복할 만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시니스 궁중 예법을 잘 모르는 외국인 기사단 총장과의 첫 춤을 거절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신성국과 오시니스 사이를 이간질하려 든다며 귀족들이 니키엘을 찧고 빻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늘 이 연회의 목적이 자신을 향한 재평가를 위한 자리임을 잊지 않았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루시안을 올려다보았다. 루시안 또한 그런 니키엘의 상황을 이해한 듯싶었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은 얼굴이었지만 니키엘을 보는 눈만은 다정했다. 괜히 구설수에 오르지 말라는 배려였다.

루시안을 향한 고마움을 느끼던 때였다. 라피엘이 니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타는 듯한 눈동자였다. 니키엘은 동복형제의 눈빛치고는 불온하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니키엘의 삶은 알면 알수록 녹록지가 않았다. 그가 비호감이 될 이유가 충분했다는 뜻이었다.

그때, 계단을 성큼 내려온 오릭스, 아니 냇이 싱긋 웃으며 니키엘에게 손을 청했다. 그에게 호감이 있던 니키엘은 냇이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굴 줄은 몰랐던 터라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을 마주 잡으려던 찰나였다.

누군가 빠르게 다가오더니 니키엘이 내민 손을 낚아채, 그 손등 위에 입을 맞추는 것이 아닌가.

“양보는 첫 춤뿐입니다. 모자라고 옹졸한 이 짐승을 용서하소서, 전하.”

루시안이었다. 그는 맑게 빛나는 루비 같은 눈으로 니키엘을 응시하며 손등에 입술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다정하고도 집착이 느껴지는 그의 말에 주변에 서 있던 몇몇 영애들이 이마를 짚으며 혼절했다. 무도회를 위해 사나흘을 굶었던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세기의 로맨스에 갑작스레 혈압이 높아져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하는 바람에 어지럼증을 느낀 것이다.

니키엘은 처음에 당황했지만, 이런 스킨십조차도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루시안의 배려인 줄로만 알고 싱긋 웃었다.

“그걸 말이라고. 오늘 내 파트너는 공이 아니오. 왈츠 한 곡이 지나면 곧바로 공에게 돌아갈 터이니, 나중에 지겹다고 소박 놓지 마시오.”

그런 니키엘의 말을 싹둑 자르고 루시안이 잡고 있던 손을 낚아채 간 냇이 무뚝뚝한 얼굴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들었습니까, 투르운 공. 전하께서 공은 오늘이면 끝날 뿐인 파트너라 하시는군요. 오늘뿐이라니, 섭섭하셔도 기회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시간을 죽이는 미련한 짓은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뱀은 천년을 살아도 이무기일 뿐이니까.”

냇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세 사람을 주목하고 있던 귀족들은 저마다, ‘위무얼기?’ 하며 그 단어를 따라 했지만 정확히 발음하는 이가 없었다. 니키엘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냇이 이무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이무기라 함은 한국의 고전 신화에 나오는 동물이 아니던가.

그러나 냇은 니키엘이 되물을 시간도 없이 그의 손을 이끌고 무도회 플로어 정중앙으로 향했다. 덕분에 니키엘은 제 파트너인 루시안을 한 번 더 달래 줄 생각이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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