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그러나 율란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자리가 이다지 넓은데 배려심이 덕목인 사제께서 돌아가시면 될 일을 왜 내게 굳이 말을 겁니까.”
너 나한테 관심 있어? 하고 묻는 말투였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질 것 같아 매섭게 인상을 굳혔다. 그러나 냇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폐하아, 건장한 수장들께서 모두 이곳에 올라 계시니 어깨가 넓은 저로서는 설 자리가 없나이다.”
“오? 아니, 경들은 뭘 하는 겐가. 지멘츠 총장이 올라올 수 있도록 자리를 좀 넓히시게.”
냇의 끝 발음을 늘린 가증스러운 목소리에, 니키엘은 율란과 레이먼이 동시에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한 계단 아래로 내려갔고, 자리가 넓어지자 냇은 니키엘에게만 보일 수 있도록 한쪽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별안간 윙크를 받은지라 니키엘의 표정이 오묘해졌을 때, 그는 무언가 다른 점을 깨달았다. 가넷을 박아 넣은 듯 검붉은 색으로 반짝이던 냇의 눈이 이제는 녹음이 짙은 여름날의 버드나무 잎처럼 싱싱한 초록색을 하고 있던 것이다.
‘어…? 눈 색이….’
니키엘은 순간적으로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분명하게 그의 눈 색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녹색으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니키엘의 시선은 냇의 뒷모습을 훑듯이 응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손을 꽉 붙잡아 왔다. 루시안이었다. 그는 맞잡았던 손을 살짝 틀어 아예 깍지를 껴 왔다. 면사포로 만든 장갑을 끼고 있던 니키엘은 제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감촉에 놀라 루시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싱긋 웃는 얼굴로 니키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개떼들이 많아 피곤하시지요, 전하.”
“아, 음…. 아니오.”
개떼…, 라니. 니키엘은 루시안이 어여쁜 얼굴로 제게 말한 걸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예쁘게 말한다고 해도 욕은 욕일 텐데 미소가 상냥하고 눈부셔서 주위의 모든 이들을 개떼로 만들어 버린 한마디가 늦게 와닿았다.
충격적인 한마디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은 계속해서 냇의 눈 색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무언가 니키엘을 스쳐 지나갔다.
‘내 눈 색이 다른 이유는 그대에게 보는 즐거움을 주고 싶어서야. 그대가 내게 질려 하지 않을까 두려운 짐승의 발악인 거지.’
누군가 키득거리며 니키엘에게 속삭였다. 니키엘은 삽시에 어지럼증을 느꼈다. 균형을 잃은 그를 잡아 준 것은 니키엘에게서 가장 멀리 서 있던 레이먼이었다. 길게 뻗은 팔이 니키엘을 받쳐 주었다.
옅은 페로몬 향이 났다. 단단한 품 안에서 고개를 든 니키엘은 귓등이 터질 듯 붉어진 레이먼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나 저를 부축해 주는 것인지 궁금하던 찰나에 레이먼이 루시안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 좀 지켜보시오. 전하의 밑이 바로 계단일진데.”
아니, 왜 이래. 니키엘은 다소 황당한 심정이었다. 레이먼과는 서로 으르렁거린 기억밖에 없는데 갑자기 걱정하는 말투라니. 니키엘은 그의 품에서 얼른 빠져나오려 노력했다. 그러고 나서야 좌중이 침묵한 채로 계단 위에 선 남자들만 주목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러 귀족이 그들을 올려다보며 입을 가린 부채를 팔락이고 있었다. 왕자에게 아무런 관심 없던 수장들이 셋이서 한꺼번에 단상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충격인 듯했다. 더 이상 이목을 끌기 싫어, 니키엘은 부왕과 말을 나누고 있는 냇을 보려 노력했다.
그때였다. 시종장이 급히 다가와 허리를 숙인 뒤, 왕에게 무언가 속삭인 것이다. 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이렇게 빠르게? 어서 들라 하라.”
왕은 다소 허둥거렸지만, 순수하게 기뻐 보였다. 니키엘은 뭐가 왔길래 저런 얼굴을 할까 싶었다. 치킨 배달도 택배도 아닌데 누가 오는 걸 반기는 얼굴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뒤, 태양의 문양으로 조각한 금으로 장식된 연회장 가운데 문이 열렸다. 왕족만이 드나드는 문이었다.
“어머-!”
“저분은…!”
뭐야, 누군데. 진짜 치킨이라도 온 거야? 니키엘은 궁금해 고개를 쭉 빼 보았다. 연회장 정 가운데의 문은 2층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누군가 문에서 나와 계단 바로 위쪽에 잠시 서 있었다.
레이먼이나 율란만큼 크진 않지만, 계단 위에 선 사람도 꽤 컸다. 적어도 니키엘과 비등하거나 좀 더 커 보였다. 가운데 문을 통해 들어오는 이는 왕족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당당하게 서 있는 걸 보니 누군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그때, 루시안이 니키엘을 제 등 뒤로 감추려는 듯 앞으로 나서며 시야를 가려 버렸다. 뭐지? 지금 내 앞을 가로막은 건가? 루시안이 그런 행동을 이유 없이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니키엘이 알기에 루시안은 무척이나 효율을 중시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이공계 애들이 다 그렇지.’
자연대를 나온 니키엘에게 가장 친숙한 타입의 성격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이유가 따로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궁금함을 조금 누르고 그의 뒤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시종이 외쳤다.
“라피엘 오시니스 왕태자 전하 드십니다!”
왕태자…? 니키엘이 그 단어를 읊조린 순간이었다. 끼잉- 하는 금속성 음과 함께 머릿속으로 불쑥 누군가의 기억이 스며들었다. 니키엘은 두통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 속 니키엘은 아직 어린아이였다.
“형님 전하, 저도 형님 전하 따라갈 것이옵니다.”
아이는 누군가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고 있었다. 얇은 백금발 머리를 한 아이는 아마도 어릴 적 니키엘인 듯싶었다. 무척 사랑스러운 생김새의 니키엘은 밝게 웃으며 형이라고 부른 이에게 안아 달라 졸랐다.
“니키, 형님을 따라갈 테냐.”
“네, 형님 전하. 저는 형님 전하와 노는 것이 가장 좋아요!”
니키엘만큼 어린 건 아니지만, 앳된 소년은 잿빛에 가까운 금발이었다. 이목구비가 부왕과 닮은 것을 보아 방금 소개된 라피엘 오시니스 왕태자의 어린 시절인 듯했다. 니키엘은 제삼자의 입장으로 어린 소년들이 까르륵거리며 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라피엘은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왕궁의 뒤편에 있는 거대한 숲으로 향했다. 소년은 동생을 족히 500년은 그 자리에 뿌리박고 지내 온 나무의 밑동 아래 숨겼다.
“니키, 이곳은 니키와 이 형님 전하만의 은신처이다. 지난밤 읽어 준 알리후바와 60인의 도적에서 나온 내용을 기억하지?”
“예, 형님 전하.”
어린 니키엘이 밝게 대답했다. 뽀얀 얼굴을 끄덕이며, 아이는 제 형을 무척이나 신뢰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아이 둘이 곰살맞게 노는 생생한 상상에 빠져 버린 니키엘은 자신이 연회장 한복판이었다는 것도 잊은 채 멀거니 그들 형제가 노는 모습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두 아이는 서로 무척이나 친해 보였기 때문에 니키엘로서는 꽤 보는 재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뿐.
“형님 전하, 여긴 무섭습니다. 저도 궁에 데려가 주세요.”
“쉿, 니키. 네가 이곳을 지키지 않으면 우리의 은신처에 다른 이가 숨어들지도 모르지 않느냐. 이 형님 전하는 용맹한 니키를 믿는단다.”
소년은 맑게 웃으며 동생을 다독였다. 니키엘은 숨을 집어삼켰다. 소년이 어린 니키엘을 숲속에 유기한 것이다.
유기라고 확언하기엔 부족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소년은 매일같이 니키엘을 찾아왔으며, 먹을 것과 담요를 주었다. 어린 니키엘은 며칠 동안 집에 가고 싶다고 졸랐지만 소년은 들어주지 않았다. 엄한 얼굴로 갖은 협박을 해 댔다.
“네가 이렇게 떼를 쓰면 부왕께서 너를 어떻게 여길 것이라 했지? 태양신이 너를 지켜 줄 텐데 대체 뭐가 무서워 이러느냐.”
어린 니키엘은 엉엉 울었다. 형님 전하, 그러면 밤에는요. 태양이 뜨지 않는 밤에는 누가 저를 지켜 줍니까. 그러자 소년이 아이를 매섭게 꾸짖었다.
“지금 감히 태양신의 권능이 밤에 닿지 못한다 한 것이냐!”
“아니, 아니에요, 니키는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너는 당분간 이곳에서 태양신께 반성하는 수밖에 없겠다.”
어린 니키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그의 작은 등을 쓰다듬으며, 소년이 말했다.
“니키, 네가 이곳을 잘 지켜야만 부왕께서 너를 궁 밖으로 쫓아내지 않을 것 아니냐. 이 형님 전하와 한평생 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니.”
어린 니키엘은 대답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이곳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소년은 아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니키, 너는 무척이나 고집이 세구나. 착한 아이가 아니니 이곳에 둘 수밖에 없겠다.”
고작 몇 살이 많은 걸로 소년은 어린 니키엘을 회유하고 협박하며 아이가 그곳에 남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어둠이 깔린 숲의 밤을 울면서 보낸 니키엘은 아침이면 퉁퉁 부은 눈으로 저를 찾아온 소년에게 안겨 모자란 잠을 청했다.
그렇게 아이가 궁의 인력들에게 발견된 것은 숲에서의 밤이 다섯 번이나 흐른 뒤였다. 어린 니키엘은 그동안 쇠꼬챙이처럼 말라 갔고 심하게는 헛것을 보았다.
니키엘의 성격이 괴팍해진 가장 큰 이유였다.
“헉-!”
니키엘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숲속의 아이들을 지켜보던 니키엘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루시안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니키엘은 대답하지 못한 채 왕이 앉은 자리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왕의 옆에 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냇을.
짙푸른 녹색의 눈이 니키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냇이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니키엘은 천천히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조심, 하십시오-.”
그리고 그때, 왕이 크게 소리쳤다.
“짐의 장자! 2개 주의 젊은 맹주! 라피엘 오시니스가 이번 토벌 대회를 맞이하여 드디어 귀국하였노라!”
왕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은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귀족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다. 멈춰 있던 악단이 연주를 재개했다. 니키엘은 멍한 눈으로 2층을 바라보았다.
“…….”
“…….”
잿빛에 가까운 블론드, 옅은 갈색 눈. 니키엘은 라피엘 오시니스와 눈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