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어제, 오늘 갑작스레 낮인데도 태양이 저물었었대요. 점성술사들도 예측을 못 했다는데. 저는 하늘이 어두워진 것도 몰랐어요.”
그걸 일식이라고 한단다, 중세인들아. 니키엘은 폴의 말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대답하지 않고 멍하니 있었다.
성기사단 총장이 갑작스레 방문한 뒤로부터, 폴의 주인은 계속 멍한 얼굴로 넋을 놓고 있었다. 그의 주인은 대부분 이상하지만 어느 부분에서는 놀랍도록 상식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는 했는데, 아마 지금이 ‘이상한’ 시점인 것 같았다. 니키엘의 충실한 종인 폴은 며칠 멀쩡하다 싶었다고 저 혼자 생각했다.
그래도 니키엘이 축 쳐져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래도 모레가 바로 무도회 날이니 오늘 검술 수업에서 제발 다치는 일 없게 하셔야 해요.”
“…그냥 수업일 뿐인데 어디를 다치기도 애매하지.”
또 멍하게 한곳만을 바라보고 있길래 폴의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주인을 흘끗 본 폴은 그냥 얼른 검술 수업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니키엘은 그렇게 갑작스레 극성스러워진 시종에 의해 빠르게 옷을 챙겨 입고 검술 수업으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어제 했어야 할 검술 수업이었다. 그러나 신전에서 오릭스, 아니 냇을 보고 온 뒤부터 어쩐지 가슴이 먹먹하여 수업에 갈 수 없었고, 율란에게 두통에 의한 불참 의사를 알렸었다. 그 성격에 그럼 다신 오지 말라며 윽박지를 줄 알았는데, 소식을 알리러 갔던 시종에게 북부의 이테렌 사람들이 잘 먹는 두통약을 딸려 보냈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신경 써 준 적은 처음이라 오늘은 검술 수업을 빠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니키엘은 마차를 타고 검술 수업 장소로 향했다.
수업 시간은 해가 진 뒤라서 연무장은 오늘도 조용하기만 했다. 어제는 율란이 애써 시간을 낸 듯했지만 불발되었으니, 오늘은 알레윈이 수업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니키엘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
“늦으셨군요.”
목검을 들고 있는 율란이 웬일로 사람이 없는데도 존댓말로 니키엘을 맞이했다. 니키엘은 그를 빤히 보다가 제가 인사도 안 했다는 걸 깨닫고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는 따로 시간을 빼 주었을 텐데 불참하여 미안하오. 머리가 아파서….”
“지금은.”
“뭐라 하였소…?”
“지금은 어떠시냐 물은 참입니다.”
율란은 담백한 목소리로 물으며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금안이 전에 없이 진중한 빛으로 니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키엘은 율란의 태도가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웬일로 짜증을 내는 것도, 저를 모욕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뭐어…. 괜찮소. …걱정해 주어 고맙군.”
네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미심쩍은 얼굴로 말하는데도, 율란은 그런 그를 슥, 쳐다보고 말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바로 훈련을 시작했다.
목검으로 위에서 아래를 향해 사선으로 내지르는 시범을 보인 율란이 니키엘에게 그것을 따라하게 했다. 기초적인 훈련은 제법 틀을 잡아 가고 있어 알레윈이 간간이 한 손으로나마 상대해 주고는 했다. 그러나 세계관 최고 기사의 눈에는 뭔가 어설펐던 것인지 자세를 다시 잡아 주려 했다.
“사선으로 벨 때는 하체의 힘을 더 주는 편이 좋습니다. 허리에 중심을 세운 채로 오른쪽 허벅지를 단단하게…. 아, 실례했습니다.”
율란이 니키엘의 허벅지로 손을 뻗으려 했다가 닿기 전에 그것을 거두고는 사과했다. 니키엘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뭘 사과하는…. 아….”
그러다가 그가 만지려고 했던 부위가 허벅지 안쪽임을 깨달은 것이다. 니키엘의 얼굴 위로 약간의 머쓱함이 떠올랐다.
이전까지는 직접 만지지 않고 목검으로 다리나 손목 등을 가볍게 치는 걸로 지도했었는데, 스스럼없이 닿으려다가 멈칫하는 것이 이상했다. 평소에서는 안 닿고 싶어서 난리더니, 갑작스레 손으로 만지려 해서 놀랐던 니키엘은 율란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무표정을 띠고 있었다.
‘아, 괜히 나만 민망하네. 같은 남자끼리 좀 만지면 어떻다고 유난을 떨었지.’
이세계의 정조 관념이 약간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율란도 저도 남자인데 허벅지 좀 만질 뻔 했다고 사과받으니 더욱 민망했다. 정작 사과한 율란은 아무렇지 않아 보여 니키엘만 약간 더워하고 있는데, 율란의 귓등 역시 붉어 보였다.
‘…여기가 좀 더운가?’
연무장이 좀 더운 것 같기도 했다. 니키엘은 민망함을 감추려 더욱 열심히 칼을 휘둘렀다. 그걸 빤히 보고 있던 율란이 등을 돌리더니, 무기를 놓아 둔 곳 옆에 있는 탁자로 가 떡갈나무로 만든 상자를 가져왔다. 그 상자는 아이의 두 팔 길이를 합친 것처럼 길었고 폭은 좁았다. 사선 베기를 계속해서 하고 있던 니키엘은 그게 뭔가 싶어 율란과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것이 무엇이오?”
“…….”
율란은 대답하지 않은 채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세계의 기사들이 사용하는 검보다 살짝 짧은 듯한 검이 들어 있었다. 날이 철로 되고 손잡이에는 보석이 박힌 꽤 화려한 보검이었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상자 속에 있는 보검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의문이 들어 율란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나에게 검을 자랑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란이 뱉은 말은 의외였다.
“…전하의 검입니다.”
“뭐, 라 하였소? 내 검…?”
니키엘은 자신이 말을 더듬는 것도 모른 채 되물었다. 제 검이라니. 이럴 수가. 놀라 다시 묻자 율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토벌 대회가 곧이라 제작을 맡긴 게 축성을 마치고 이제 도착했습니다. 급히 제작된 것이 흠이지만, 신전의 대장장이는 꽤 실력이 좋은 편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보시다시피 연마가 잘된 검입니다.”
그런 것 같았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검을 쥐어 들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꽤 가벼웠다.
“아니, 그래도…. 나는 이런 걸 받을지는 몰랐는데.”
“…연습을, 열심히 하시지 않았습니까.”
율란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니키엘은 그의 귓등이 터질 듯 붉어져 있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왜 이렇게 잘해 줘? 무시하고 다닐 때는 언제고.’
니키엘은 미심쩍었다. 신전 앞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제게 으르렁거리지 않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때도 약간 태도가 이상하긴 했다. 그때 한소리 했던 것이 율란에게 각성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 책으로 봤을 때도 꽤 훌륭한 리더였으니까. 내 말에 반성했을 수도 있지.’
니키엘은 단순하게 생각했다. 타인의 마음 같은 건 깊게 생각할수록 손해였다. 남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냥 율란의 속에서 제가 ‘구제 불능 쓰레기’에서 ‘갱생 가능한 쓰레기’ 정도로 바뀐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율란 역시 타인의 노력을 그냥 넘기는 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검술 연습 정도는 열심히 했으니 상처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노력한 보상을 받았다는 생각에 니키엘은 웃음이 나왔다.
“고맙소. 검이 정말 훌륭하오.”
“…….”
율란을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지만 그는 대답을 돌려주지 않은 채 니키엘만 뚫어지게 내려다볼 뿐이었다. 율란을 원체 별난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니키엘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검을 살피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그날의 훈련이 종료되었다. 에스코트해 주겠다는 율란의 말에, 니키엘은 검이 저를 에스코트해 줄 텐데 부러 걸음하지 말라고 정중하게 거절한 뒤, 전용 마차에 올라탔다.
니키엘이 왕자궁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알레윈이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오늘 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기사단의 단장이 왕자의 검술을 봐주겠답시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알레윈은 제가 해도 될 일을 율란이 직접 하겠다고 나선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아마, 니키엘 전하께 무도회에 같이 가자 프러포즈하시려는 게 아닐까?’
마침 신전에 긴급히 부탁한 보검이 도착했지 않는가. 콧대 높은 신전의 대장장이를 설득하기 위해 만들려는 검 무게의 딱 반만큼의 황금이 필요했다.
토벌 대회의 경비 측정은 보통 왕실이 해 주기 때문에 딱히 패물을 들고 오지 않았었는데, 급히 사람을 이테렌으로 보내 영지의 보석 몇 개를 가져오라 이르기도 했었다. 그렇게 가져온 황수정과 황금색 에메랄드는 검의 손잡이에 박혀 장식되었다. 값비싼 보검이 탄생된 것이다.
때문에 알레윈은 잘생긴 데다가 선물까지 준비한 단장이 프러포즈에 성공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성공했다면 에스코트까지 해 주러 가셨을 거야.’
율란을 찾으러 온 것은 맞지만, 혹시나 싶어 들른 것이지, 알레윈이 예상하기에 율란은 이미 왕자궁으로 니키엘을 배웅해 주러 떠난 뒤라 연무장이 비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왜 여기 계십니까, 각하?”
율란이 무기를 걸어 둔 곳에 서서 천으로 제 검을 닦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알레윈의 물음에 그를 흘끗 본 율란이 무감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럼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어야 하냐는 물음이었다. 알레윈은 기가 막혀 대답했다.
“니키엘 전하를 궁까지 에스코트해 주셨어야 할 것 아닙니까.”
“본인이 거절하셨다.”
알레윈은 율란이 니키엘이 없는 자리에서도 존칭을 쓰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아, 단장님 좀 하시는데….’ 하는 표정이 되었다가 금세 갈무리하고는 덧붙였다.
“그래도 무도회 프러포즈를 성공하셨으면 에스코트 정도는 해야 예의인 것….”
저도 모르게 나온 말에 알레윈은 제 입을 막았다. 단장의 연애 사정에 너무 끼어드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란에게서 나온 반응은 알레윈의 기대와는 달랐다.
“…무도회?”
닦고 있던 천을 내려놓으며, 율란이 되물었다. 알레윈은 영문도 모른 채로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