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니키엘의 허둥거림이 소강되는 것에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니키엘은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아지지 않는 뚝딱거림에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봐도 남자다운 오릭스를 보고 얼굴을 붉히지 않나, 머뭇거리며 말까지 더듬으며 아주 염병을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니키엘’의 신체가 불러일으킨 반응 같지도 않았다. 전에도 수장들을 대할 때 신체 반응이 이상하게 일어나고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신체’의 작용일 뿐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거나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하는 일들은 감정이라기보다 반응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릭스를 대하는 것은 달랐다. 니키엘은 그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쑥스러웠다. 눈을 피하고 싶다가도 그를 뚫어지게 보고 싶었다. 왜 제게만 흑발에 적색 눈을 가진 미남자로 보이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동시에,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니키엘을 구제해 주겠다는 듯, 폴이 은쟁반에 받친 찻잔과 다과 일색을 들고 들어왔다.
니키엘은 오릭스가 자신을 보기 전 짧게 한숨을 내쉬며 차를 권했다. 오릭스가 감사하다며 싱긋 웃자 이번에는 심장이 흉곽을 찢고 나올 듯 쿵쾅거리기까지 했다. 빨리 눈앞에서 그를 치우는 것이 이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키엘은 차마 나오지 않는 물음을 내뱉으려 여러 번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제 우리는 차를 마시고 있으니, 갑작스런 방문의 이유가 뭔지 들어 볼 수 있겠소?”
“…그렇습니다, 전하. 지금 ‘우리는’ 차를 마시고 있죠.”
아니, 내 말을 따라하는 게 아니라 대답을 하라니까. 그러나 니키엘의 답답한 마음도 모르는 건지 오릭스는 니키엘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집요할 정도로 깊은 시선에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뺨이 간지러워질 지경이었다.
같은 적안이라도 루시안의 붉은 눈은 루비와 같은 투명한 빨강인데, 오릭스의 것은 약간 짙은 붉은색의 가넷처럼 보였다. 알알이 떨어진 석류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때문에 그 적안이 저를 뚫어지게 응시하니 묘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루시안만큼이나 기다란 그의 흑발은 밤하늘처럼 검기만 했다. 그렇다고 루시안처럼 미인에 가까운 생김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짙은 눈썹은 율란처럼 검었고, 불툭 튀어나온 눈썹뼈는 레이먼의 것처럼 남자다웠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나른해 보였는데, 그 점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본인은 나무에 올라타 오수를 즐기는 맹수 같은 분위기로 늘어지듯 소파에 기대어 있으면서 니키엘로 하여금 긴장에 떨게끔 만들고 있었다. 몸속 어느 부분이 간지러운데 그게 어딘지를 모르겠어서 몸부림 치고 싶은 심정으로, 니키엘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음, 차를 청한 것 치고 경은 아직 찻잔에 입도 대지 않은 듯하오.”
“뜨거운 걸 못 먹습니다.”
오릭스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의 외모에 넋이 나가 있던 니키엘은 갑작스레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 되었다.
맞다. 그랬지. 뜨거운 걸 못 먹었었어. …이면 입에서 불도 뿜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내가 놀렸었는데.
-잠깐,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니키엘은 방금까지 골몰했던 생각을 바로 잊었다. 머리가 멍해졌다. 그런 니키엘을, 오릭스가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최고급 융이 깔린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나른히 앉은 오릭스는 왕족의 앞에 선 성기사단 총장 같지 않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는 팔걸이에 걸친 팔꿈치를 접어 손가락으로 제 입매를 쓸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궁에 계시는 것이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그 말에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니키엘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사실 불편한 것이야 수없었다. 궁에서 머무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불편하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여러 가지가 그러했지만, 특히 짜증 나는 것은 키보드를 두드려 정리하면 될 일이었던 마물에 관한 자료들을 일일이 양피지에 깃펜으로 그리려니 진도가 나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불편한 점을 묻는다면 주인인 니키엘이 객인 오릭스에게 묻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점을 지적하기에는 애매한 일이라 그저 입꼬리를 늘려 웃음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뭐…. 지낼 만하오. 경께서는 여독이 풀리지도 않았을 텐데….”
힘들면 가서 쉬라는 말이었다. 상대의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반짝거렸지만, 아까부터 니키엘은 오릭스에게 묘한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니키엘의 인생은 대부분 잔잔하고 고요했다. 별안간 이세계에 뚝 떨어지듯 웬 허약 청년의 몸에 빙의하지만 않았어도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인생에 이런 자극적인 인물은 처음이었다. 수장들과는 또 달랐다.
‘더워…. 아니, 추운가? 손이 떨려.’
찻잔을 잡은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왜 긴장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까부터 온몸의 모든 신경 세포가 앞에 앉은 흑발 미남에게 쏠린 기분이었다. 그가 니키엘의 생전 볼 수 없었던 완벽한 미형이라? 그건 아닐 것이다. 이곳에 와서 니키엘은 미남을 무척 많이 보았다. 오릭스는 그들보다 떨어지는 생김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출나게 잘난 것도 아니었다.
‘아니면…. 어쩌면 저이가 내 취향의 미인일지도….’
이성애자였던 니키엘이라도 미남을 보는 취향쯤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속 소란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니키엘에게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요사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 호칭은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미천한 신을 부르실 때는 그저 냇이라 칭하여 주소서, 나의 전하시여.”
이곳 놈들이 오시니스의 왕족을 칭할 때는 꼭 나의 어쩌구시여, 하고 부른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붉어져 찻잔을 급히 들었다. 지진 난 듯 흔들리는 찻잔 때문에 모양새는 좀 빠지는 행동이었지만, 얼굴을 가리는 것에는 성공했다.
아니 정말 왜 이러는 거야. 니키엘은 속으로 욕을 짓씹었다. 처음 보다시피 한 상대를 앞에 두고 이렇게 벌벌 떨 일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간신히 대답했다.
“내, 냇이라고? 알겠소…. 그리 부르도록 하지.”
‘쪼다 새끼세요? 왜 말을 떨고 지랄이야.’ 니키엘은 속으로나마 저를 향해 강력하게 규탄했다. 니키엘의 그런 반응을 뚫어지게 보던 오릭스가 느른한 입매를 열어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긴장하십니까. 혹시 무언가 기억나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기억? 기억이라니. 뜬금없는 말에 니키엘은 긴장도 잊은 채 그를 마주 보았다. 사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한창 낮이었던 때가 옛날이라는 듯, 꼭 일식이 찾아온 것처럼 어두워지더니 그 어둠에 한껏 담가 뒀다가 꺼낸 듯 검은색으로 반짝이는 흑발을 지닌 남자가 가넷색 적안을 번뜩이며 니키엘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에 니키엘은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요하고도 질척거리는 눈빛이었다. 그의 앞에서 입고 있던 튜닉과 브레를 벗은 채 알몸으로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듯한 배덕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일었다.
어딘가, 말할 수 없는 곳이 무척 간지러워지는 그런 기분.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읏, 하는 신음을 냈다. 그런 니키엘을 바라보며 오릭스가 다시금 소파에 등을 기댄 채로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자세를 무너트렸다. 그가 앉은 자리가 꼭 왕좌라도 되는 양 주위의 공기가 삽시에 무거워졌다.
“뜨거운 거 못 먹는 건 기억하면서 정작 내가 누군지는 기억을 못 해? 그대는 여전히 매정하고도 끔찍하게 사랑스러워.”
오릭스, 아니 냇의 말은 니키엘의 청각을 통해 들어왔다가 대뇌에서 모조리 파쇄되는 기분이었다. 감각 기관이 1차로 수용한 정보를 뇌에서 억지로 지우는 느낌. 니키엘은 어느샌가부터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까 보니 개새끼랑 사이가 죽이더군. 각오는 했는데도 열이 받는 건 마찬가지야. 그도 그럴 것이, 그대는 나만의 빛이었잖아, 오시니스.”
뇌가 힘겹게 냇의 말을 지우고 있었다. 니키엘은 여러 가지 감각을 겪는 중이었다. 냇의 말을 듣자마자 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눈물이 터져 나왔고, 한쪽에 있던 이성은 저것은 네가 모르는 얘기라며 상대를 경계하라 윽박질렀다. 또 어느 한쪽에서는 그리워 죽겠으니 이대로 일어나 냇의 허리를 껴안고 그의 뺨에 키스하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 모든 충동은 빠르게 삭제되어 사라졌다.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처리되고 삭제되느라 뇌에 과부하가 올 것 같았다. 니키엘의 이성은 뭘 받아들이고 뭘 지워야 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는 사령관처럼 니키엘을 조종했다. 니키엘의 감성은 그러지 말아 달라며, 제발 저이를 또 한 번 내 가슴에서 지우지 말아 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눈물에 대고 채찍질하는 이성은 멈추지 않고 니키엘이 지워야 하는 기억만을 정확히 지우고 있었다. 사위는 여전히 일식이라도 온 것처럼 어두웠다. 냇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짐승 새끼들이라고 그대의 몸 이곳저곳에 저들의 페로몬을 잔뜩 묻혀 두었군.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어쩌지, 오시니스. 벌써부터 견딜 자신이 없는데.”
미안해, 내가 미안해. 그러나 니키엘은 사과조차 할 수 없었다. 그의 이성이 얇은 끈으로 니키엘의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비참해지니까. 대신, 이후부터는 꼭 냇이라고 불러 줘. 당신이 나를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만으로 나는 또 백년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갑작스레 방 안이 밝아졌다. 니키엘은 두 눈을 깜빡였다. 오릭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런, 피곤하셨나 보군요. 잠깐 잠에 빠지신 듯하여 부러 깨우지 않았나이다. 신은 이만 물러가겠으니, 배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존귀한 분.”
그는 그대로 일어섰다. 니키엘은 멍하게 그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래다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니키엘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공에는 여전히 금빛의 햇살이 따갑게 니키엘을 감시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