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2000명의 기사라니. 인구율을 따져 볼 때 꽤 많은 인원의 기사들이었다. 보통 이 정도의 인원이 대회 준비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니키엘은 예년에는 어땠을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율란에게는 말 걸기가 싫어 입을 다물었다.
그를 흘끗 내려다본 율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올해는 전하께오서도 참석하시기에 인원을 늘렸습니다.”
응? 갑자기? 너 때문에 괜히 인원을 늘렸다고 눈치를 주는 걸까. 니키엘은 율란의 그 말을 ‘그러니까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왜 따라온다 나서고 지랄이야.’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율란이 그런 니키엘을 보며 작게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쯧, 혀를 찼다.
“…무기 상자를, 열어 보시겠습니까.”
갑작스레 친절하게 물어보는 율란을 보며 니키엘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말투는 여전히 딱딱하고 어조는 높낮이 없는 데다 직설적이었으나 그런 식으로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합리적인 성격에 니키엘은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지 꼴리는 대로 보여 주고 싶다 하는 거겠지, 하며 편하게 생각했다.
그때, 멀리 서 있던 오릭스가 다가왔다.
“무기를 보고 싶으십니까, 전하.”
그가 그렇게 말을 걸 줄은 몰랐던 니키엘은 의외라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대답했다.
“아, 그렇소.”
“이쪽으로 오시지요.”
오릭스는 여전히 호감이 가득 든 음색이었다. 목소리조차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느낌이 났다. 기시감이 계속되었다. 니키엘은 그의 얼굴을 빤히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그가 싱긋 웃으며 율란과 니키엘을 지나쳐 첫 번째 수레에 놓여 있는 상자 중 하나의 밧줄을 풀었다. 니키엘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베네딕에게 물으려다가 그가 두 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 있는 걸 보고 하는 수 없이 율란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총장께서는 은발에 흑안이 아닌 것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율란이 희한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니키엘은 그 말 그대로라는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성기사단의 모든 단원들이 은발에 흑안을 한다고 하지 않았소. 오릭스 총장은 흑발에 적안….”
거기까지가 니키엘이 말할 수 있는 단어였다. 혀가 굳은 듯 갑자기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니키엘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무기 상자를 들여다보고 있던 오릭스가 이쪽을 보며 씩 웃었다. 여전히 무척이나 낯익은 미소였다.
“성기사단의 기사들은 서임을 받자마자 은발에 흑안으로 변모합니다.”
율란이 니키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니키엘은 그럼 저 사람은 어떻게 된 거냐고 되묻고 싶었다. 모두라는 명제를 저렇게 뚜렷하게 위배하고 있지 않냐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니키엘의 혀는 여전히 굳은 상태였다.
“그것은 지멘츠 총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야. 아니잖아. 그는 흑발에 적안인걸? 니키엘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 대신 눈빛으로나마 그에게 제 뜻을 전달하고 싶었다.
그러나 율란이 내뱉은 말은 그가 예상한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그 역시 은발에 흑안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니키엘은 충격에 커진 눈을 하고 율란을 바라보았다. 굳어 있던 혀가 갑자기 풀렸다.
“그, 럼, 대공의 눈에는 그가 은발에 흑안을 하고 있는 걸로 보인다는….”
율란은 여전히 니키엘이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전하.”
이상한 일이었다. 니키엘은 믿기지 않아 다시금 총장을 바라보았다. 총장이 입술 위에 검지를 붙이며, 쉿, 하는 소리를 냈다. 한쪽 눈을 찡긋하여 윙크까지 건네고 있었다. 니키엘의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기를 살펴보러 가시지요.”
“…아니, 나는 됐소.”
율란의 말에 니키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왠지 총장의 옆으로 가기 싫어진 것이다. 저에게만 흑발에 적안으로 보이는 남자라니. 이상했다. 불현듯 뭔가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 나를 그렇… 는 건 도저히 참을… 없어.’
누군가의 음성이었다. 온전한 음성이 아니라 드문드문 끊겨 있어 무슨 말인지 정확히 떠올리는 것이 힘들었다. 그 음색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익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 그와 같은 말을 들었을까. 니키엘은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이의 음색이었다.
갑자기 노도처럼 밀려든 혼곤한 기억 속에서 니키엘이 정신을 놓고 두 눈만 깜빡이고 있자 율란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전하.”
“…….”
니키엘은 미처 대답하지 못했다. 율란이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때였다. 수레 곁에 서 있던 총장이 다가와 니키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디 미령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전하.”
“…아니, 아니오. 무기 구경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대공, 나는 이만 가 볼 터이니 먼저 물러남을 이해하시오. 총장께서도 왕궁에 무사히 도착한 걸 환영하오. 그럼 이만….”
니키엘은 두 남자가 자신을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르게 뒤돌아섰다. 율란이 그에게 뭐라 소리치는 것이 들렸지만 그 말뜻이 와닿지 않았다.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들은 것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다. 니키엘은 빠르게 자신의 궁으로 환궁했다. 그날, 니키엘은 처음으로 검술 수업을 빠졌다. 저녁도 거른 채 씻고 누워 밤새 눈을 뜨지 않았다.
언제 잠이 든 건지 모르게, 깊은 호수와 같은 꿈에 잠겨 들었다. 꿈속에서는 또 한 번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니키엘을 원망하고 있었다. 니키엘이 모든 걸 잊었다며 슬퍼했다. 그를 달래 주고 싶었는데, 자신이 무엇을 잊었는지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를 달랠 수가 없었다.
***
아침에 일어난 니키엘은 간밤에 자신이 꽤 이상한 행동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그랬을까. 니키엘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에 빠져 봤지만, 해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괜히 심란했다. 심란할 때는 아드레날린을 빨리 끌어 올릴 수 있는 유산소가 가장 좋았다. 삐었던 발목 부분이 약간 어색하기는 했지만 가벼운 경보 정도는 괜찮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그렇게 침실을 나선 니키엘은 꽤 넓은 왕자궁 정원을 경보로 돌다 말고 누군가와 마주쳐야 했다.
여전히 흑발에 적안인 사내, 오릭스 지멘츠였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그의 인사는 간략했다. 솔리우스의 은혜 아래 산다고 생각하는 오시니스인들은 웬만해서는 아침, 점심, 저녁 인사를 모두 태양의 고도에 따라 다르게 말했다.
정해진 인사는 없으나 태양에 대한 찬가와 섞은 인사를 하길 즐겨 했다. 하물며 신전에서 온 성기사단의 총장인데 더하면 더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다 할 꾸밈없이 단출하기만 한 인사가 신기하기도 했다.
그렇게 태양신에 대한 인사말을 생략하는 이들은 그냥 인사말 자체를 니키엘에게 건네지 않는 율란이나 레이먼 정도였다. 루시안도 처음엔 그런 인사를 생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꽤 사이가 가까워진 건지 만나기만 하면 손등에 쪽쪽 입을 맞추며 왕족에게 할 수 있는 최고 예우의 인사를 하면서도 별다른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그 인사가 너무 특이한 나머지, 니키엘은 기사단 총장인 오릭스가 왕자궁에 방문한 목적에 대해서는 조금 늦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얼어 있던 니키엘은 천천히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안녕하시오, 총장. 그보다, 왕자궁에는 어쩐 일이오?”
조금 더 부드럽게 물을 걸 그랬다고 자책했다. 먼저 궁에 찾아오는 이들이라고는 레이먼이나 율란이 다였는데, 그들은 올 때마다 좋은 낯빛이 아니었는지라 해사하게 웃는 미남자가 저를 보고 인사하자 무의식적으로 답인사가 딱딱하게 나간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니키엘은 흠, 하고 헛기침하며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이제 가을이 완연한 시점이지만은 운동할 때는 땀이 나 얇은 튜닉을 입고 온 것이 마음에 걸렸다. 땀에 젖어 등에 달라붙어 있는 얇은 모슬린 천 때문에 그가 제게서 땀 냄새를 맡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니키엘이 이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겪는 ‘수줍음’이라는 감정이었지만, 그 감정이 뭔지 아직 자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오릭스는 여전히 그 이국적인 생김을 하고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차 한 잔 주시지도 않고 용건부터 물으시다니. 어제 그렇게 가셔서 서운한 것은 신뿐인가 싶습니다.”
그가 그렇게 대놓고 말하자 니키엘은 화들짝 놀랐다. 예의를 지켰어야 했는데 그의 등장이 너무 뜻밖이라 냅다 용건부터 물었던 것이다.
니키엘은 갑자기 귀경한 아들에 놀라 ‘네가 여긴 어쩐 일이라니?’ 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가, 그 아들이 밥을 안 먹었다는 말을 듣고 놀라 펄쩍 뛰는 노모처럼 후다닥 달려가 시종을 불러왔다.
“잠깐만, 계시오! 지금 얼른 차를 대접하겠소! 응접실은 저쪽이오. 이리 오시오.”
당황한 니키엘은 우왕좌왕하며 그를 불렀다가 시종에게 차를 내오라 했다가, 아니 먼저 총장 예하를 응접실로 안내하거라, 하고 명했다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릭스가 작게 미소 지었다. 니키엘은 그 미소를 흘끔 보고는 귓등이 붉어지는 것 같아 괜히 양쪽 귀를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