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돌아 버린 사슴으로 화한 상태라, 숲에 나는 독버섯을 생각 없이 처먹었을 수도 있다. 니키엘의 신성력으로 말미암아 광증의 물리적 후유증 없이 깨끗하게 깨어났으니 두문불출할 이유가 독버섯 섭취 외에는 없다고 여겨졌다.
어쨌든 그가 자리를 비운 터라 검은 가시 기사단의 기사단장인 율란이 총장을 맞이하러 나가는 것이 맞았다. 이 새끼나 저 새끼나 온통 귀찮게 하는 놈들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율란은 집무실을 나서 왕궁의 신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을 얼쩡거리는 백금발을 본 것이다. 율란은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가, 그게 정확히 어떤 마음인지 몰라 억눌렀다.
가슴이 조금 들뜨는 기분이었는데 낯설어 밀어 두었다. 대신 율란은 표정을 굳힌 채 다가갔다.
“오늘 치 검술 연습은 끝내고 얼쩡거리는 건가?”
“으악, 깜-! 짝 놀랐지 않소, 공.”
소리를 꽥 지르려던 니키엘은 가까스로 진정한 뒤 율란을 쏘아보며 뒷말을 작게 속삭였다. 니키엘의 뒤편에 율란이 서 있는 터라 얼굴에 살짝 그림자가 졌다. 키 차이는 반 뼘 정도인데도 어깨넓이와 덩치 차이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갑작스레 나타난 율란을 흘겨보고는 대꾸했다.
“연습 같은 걸로 날 혼낼 생각은 마시오. 나는 매우 성실한 편이니까. 못 미더우면 왕자궁의 시종들에게 물어봐도 좋소.”
율란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불행히도 니키엘은 그 광경을 보지 못했다.
“자신 있다 이거지. 좋습니다. 오늘은 제가 직접 전하의 연무를 봐 드리겠습니다.”
“…아니, 나는 얼라리요로도 충분한데.”
순식간에 곤란해졌다. 알레윈도 충분히 좋은 스승이었다. 율란이 가르침에 있어 허투루 대하는 이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심적인 부담감은 알레윈이 훨씬 덜했다.
니키엘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던 알레윈은 니키엘이 검만 쥐어도 훌륭하다며 감탄했다. 어지간히 빡대가리일 줄 알았나 보다 생각하면서도 그의 칭찬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기본만 해도 잘한다, 멋지다 칭찬하니 니키엘의 성취욕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그러나 율란은 니키엘의 그 말을 무시했다.
“오늘은 제 일과가 바쁜 편이니 저녁을 드신 후 연무장에 오셨으면 합니다.”
“아니, 나는 얼라리랑….”
“그보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아, 사람 말을 굉장히 씹네? 니키엘은 어이가 없었지만 더 뭐라 했다가는 말려들 것 같아 얌전히 물음에 답했다.
“그냥 뭐, 신전에서 사람들이 왔다길래 궁금해서. 철기들도 왔다고 하니….”
“…그러십니까.”
율란은 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니키엘은 그의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졌지? 이해할 수 없었다. 늑대종의 짐승들이 예민한 성질을 갖고 있던가?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약간의 어색함에 헛기침했다.
뭔가를 생각하던 율란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기사단 총장은 성직에 임하여 사사로운 연애는 금지된 신분입니다.”
“뭘 어쩌라는….”
니키엘은 말을 하다 말고 짜증이 솟았다. 그러니까 지금 율란은 니키엘이 기사단 총장을 꼬시러 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마를 짚고 숨을 훅 내뱉다가 짓씹듯이 말했다.
“총장인지 뭔지 하는 사람이 연애를 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리고 대공이야말로 행실을 바로 하는 게 낫지 않으시겠소?”
율란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솟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 묻는 듯해, 니키엘은 사금이 반짝거리는 강가와 같은 율란의 눈을 또렷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리 우리의 물밑으로 약혼에 대한 전재가 깔려 있다 한들, 대공께서는 내게 마음이 없고 나 역시 대공을 혼약의 상대로 생각하지 않음인데 어째서 내게 행실을 바로 해라 마라 참견인 것이오. 대공이 나의 손위 형제도 아님이요, 부친도 아니고 내 배우자는 더더욱 아닐진데,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고 계신 듯하여 묻소.”
“…….”
율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렸다. 뭐라 화를 낼 줄 알았기 때문에 그런 반응은 기대하지 않았던 니키엘은 약간 뜨끔했지만 속은 시원했다. 말을 꺼낸 김에 쐐기를 박아야겠다 생각하여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닌 사이에 서로 무시하고 살면 될 일을 굳이 나서서 참견하는 것이 대공의 심신 안정에 좋지 않을 것 같아 말하는 것이니….”
“그만.”
노기에 찬 음성이었다. 니키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왜 화를 안 내나 했다.’
속으로 짧게 생각한 니키엘은 율란이 원하는 대로 입을 다물어 주었다. 율란의 턱은 악다문 채로 교근이 불뚝 튀어나와 있었다. 생각보다 화가 많이 난 것인지 스산한 짐승의 페로몬이 니키엘의 코끝을 스쳤다.
압박감이 상당했다. 살기라고 하기에는 묘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것 같아 주춤 걸음을 물리려다가 배짱 있게 가자는 생각으로 참아 냈다.
율란이 돌연 픽 웃었다. 아무리 조소라 한들, 그가 그런 식으로 입꼬리의 호선을 올리는 건 드문 일이라 니키엘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배회했다.
수려한 입술선이 올라가 망치와 정으로 세심하게 조각한 듯한 얼굴에 숨을 불어넣은 듯 생기 있어 보이게 만들었지만, 정작 황금색의 두 눈동자에서는 불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니키엘은 그렇게 그의 속 안에서 피어오른 짧은 미소가 아닌 비릿한 조소를 처음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게 분노라는 것만 알았지, 율란이 지금 어떤 마음인지는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고매한 입맛에 나 같은 개새끼는 혼약 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게 아니라-.”
니키엘의 말뜻은 그게 아니었다. 네가 먼저 나를 싫어하니 나도 너에게 관심이 없고, 서로 관심 없는 두 사람이니 그냥 편하게 소, 닭 보듯 지내는 것이 둘 모두에게 편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남성과의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니키엘이지만, 만약 정말 이대로 사건의 흐름이 좆같이 흐른다면 정말 남자와 결혼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그중에서도 율란만은 제게 관심이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레이먼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니키엘은 자신이 호감 있는 상대에게 그렇게 막 대하는 애정도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을, 이라는 좌우명 아래에서 그 어떠한 성격적 결함 없이 연구와 운동에만 매진해 온 삶이 아니던가. 니키엘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이 줄 수 있는 질척함과 슬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오르는 정염이 존재해 왔다는 걸 몰랐다.
뭔가 부정하려던 니키엘의 말을 끊고, 율란이 짓씹듯 말했다.
“마구간지기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말밖에는 안 들려.”
니키엘은 이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소! 세상 사람 다 붙어먹어도 대공께 손 벌릴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시오. 원하던 것 아니었소?!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
니키엘의 대답에 율란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등을 돌리며 말했다.
“돌아가시지요. 검술 수업 시간에 뵙겠습니다.”
엿이나 먹어라! 니키엘은 율란의 등 뒤에 가운뎃손가락을 올려붙였다. 게다가 돌아가라니. 누구 마음대로! 니키엘은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다. 전에 같으면 싸우기 귀찮아 그냥 뒤돌아 갔겠지만, 오늘은 오기 때문이라도 그냥은 못 가지 싶었다.
그대로 빠르게 걸어 율란을 앞질렀다.
“내가 대공이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사람인 줄 아오? 상관하지 말고 서로 갈 길 가자고.”
“하….”
율란이 기가 막히다는 듯 저를 지나친 니키엘의 등 뒤에 한숨을 내뱉었다. 니키엘은 상관하지 않고 걸었다.
왕족을 위해 왕궁에 마련된 신전에 왕족이 방문한다는데 율란이 아무리 대공이라 한들 말릴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그냥 들쳐 업고 왕자궁으로 달려가 내동댕이치면 어쩌나 싶었는데 율란은 아무런 말 없이 느린 걸음으로 니키엘의 등을 쫓았다.
율란이 지시한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베네딕은 신전으로 향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꼭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가 씩씩거리며 앞서 걷고, 그 뒤를 험악한 인상으로 따르고 있는 대형견 같았기 때문이다.
‘두 분이 웬일로 함께 계시지.’
신전으로 향하는 길에 니키엘이 동석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던 터라 짧게 당황했던 베네딕은 걸음을 재게 놀려 율란의 뒤로 따라붙으며 니키엘에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솔리우스의 은총이 머리 바로 위를 가리키고 있는 즐거운 오후입니다.”
오른손을 왼 가슴팍에 붙이며 고개를 살짝 숙인 베네딕은 오시니스의 오후 안부 인사말을 덧붙였다. 니키엘이 그런 베네딕을 돌아보며 스산하게 말했다.
“경은 내가 지금 즐거워 보이오?”
“아, 그것이….”
“정확하오. 즐거워 죽여 버리고 싶군. 상관이고 부하고 아주 옳은 말만 해 대는 통에 오시니스의 미래가 밝기만 하오.”
니키엘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사실 성격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여유롭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 그렇지, 니키엘은 갈굼에 특화된 군대와 자연대 연구원 출신이었다.
김 이병, 숨 쉬냐? 이병이 숨도 쉴 수 있나? 와 군대 많이 좋아졌다. 살만해? 이병 때부터 숨 쉬는 기분은 어떤 기분이냐? 꿀 빠느라 너무 즐거워 보인다.
와 같은 군대식 내리 갈굼을 겪으며 제대하여 꼰대들의 종합 선물 세트인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갈굼을 모르면 그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짜증이 나니 숨겨 두었던 갈굼 실력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 봉변당한 베네딕이 어쩔 줄을 모르자 니키엘은 흥, 하고 콧바람을 분 뒤, 마저 걸었다.
그사이 신전 건물의 코앞까지 도달한 세 사람은 대리석으로 된 앞마당에 흰 주갑을 입은 기사단이 도열 해 있는 걸 마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