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니키엘 역시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손목이 잡히자마자 레이먼이 전기라도 감전된 사람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던 감촉이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잡힌 게 너무 싫어서 부들부들 떨었던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랄도 가지가지….’
어이가 없어 니키엘은 쯧, 혀를 찼다. 때마침, 차 시중을 들려던 시종이 응접실로 들어오려다가 레이먼이 자리를 비운 것을 보고 놀라 폴을 바라보았다.
니키엘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시종을 불렀다.
“그냥 나나 한 잔 줘. 갑자기 나타나서 왜 저러는 거야.”
차나 마셔야지 싶어졌다. 별안간 저런 식으로 제게 이상하게 구는 것이 한두 번 아닌지라 왜 저러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러게요. 갑자기 왜 저러시지…. 괘념치 마셔요, 전하.”
그러나 폴의 생각은 달랐는지, 레이먼의 무례에 니키엘의 기분이 상했을까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그 이후에도 니키엘은 굉장히 화가 난 척을 하며 제 안색을 살피는 폴로부터 마물에 관련된 책 하나를 가져오라 심부름시킬 수 있었다.
피부 미용에 안 좋다며 해가 지면 책을 못 읽게 하는 시종도, 그날만큼은 니키엘에게 책을 가져다주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니키엘의 승리인 셈이었다.
***
다급하게 왕자궁을 나섰던 레이먼은 혼란에 빠졌다.
“읏, 씨발….”
이제는 아예 손끝까지 붉어진 느낌이었다. 허벅지 한쪽 천이 팽팽하게 당겨져 브레의 중간 부위부터 살짝 젖어 있었다.
난감함과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함에 젖은 채, 레이먼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직도 몸이 덜덜 떨리는 중이었다. 그런 흥분감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왕자궁으로 향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자신이 느꼈던 것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연꽃 향이 정말로 니키엘의 것인지, 그의 향유 냄새가 맞다면 도대체 어떻게 광증에 미쳐 버린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제 머리를 만질 수 있었는지에 대해 물어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전율에 가까운 감각에 척추가 찌릿하다고 느낀 것은 레이먼이 기다리던 응접실로 니키엘이 들어 온 순간이었다.
그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달궈졌다. 아주 어릴 때부터 익혀 온 수도식 인사는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레이먼은 첫사랑 앞에 선 시골뜨기처럼 니키엘을 눈앞에 둔 채로 어벙벙한 얼굴로 떨기 바빴다. 니키엘은 순순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이먼은 그 눈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그곳에서 더 있었다가는 큰일 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당장 방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레이먼을 지배했다. 그러나 걸음도 여의치 않았다. 브레의 한쪽 허벅지 부근이 몹시 묵직해 걷는 것이 불편했다.
혹시나 그 수상한 걸음걸이를 들킬까 봐, 자연스레 행동이 조심스러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니키엘에게 손목이 붙잡힌 것이다.
그 뒤부터는 노도처럼 밀려오는 감각 때문에 몹시 곤란해졌다.
“하, 씹-.”
방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레이먼은 수치심과 당황스러움에 더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고양감이 미칠 듯이 몰아쳤다.
입을 열지도 못했다. 열린 입술 사이로 어떤 욕망이 불쑥 나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레이먼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그렇게….
아니, 더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한 번 왕궁 한복판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레이먼은 기껏 왕자궁을 방문하고도 얻어 낸 수확 없이 몸을 돌려 저를 기다리고 있던 마차로 향해야 했다. 마부가 제 허벅지에 묻은 수상한 얼룩을 눈치챌까 봐 프록코트로 그것을 가리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다가 마차에 새겨진 가문 인장을 보고 욕을 짓씹었다.
“…제길.”
왕자궁에 방문할 때면 늘, 혹시나 누군가 자신의 방문을 눈치챌까 싶어 가문의 인장이 없는 마차를 이용했는데 오늘 있었던 일에 어지간히 정신이 없었는지 사슴뿔 인장이 새겨진 볼트윅가의 마차를 그대로 타고 나왔던 것이다.
아침에 사냥부로 출근할 때 타고 온 마차이긴 했지만 그걸 그대로 올라탄 채 이곳으로 향한 건 다소 멍청한 짓이었다.
레이먼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마차 벽을 두어 번 노크하여 마부에게 출발 사인을 주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온종일 왕자만 기다리다가 차도 얻어 마시지 못한 채 튀어나와 버린 제 행동이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레이먼이 어떤 생각에 빠져 있든 상관없다는 듯, 마차는 열심히 달려 저택에 멈춰 섰다. 가주의 귀가를 마중하기 위해, 집사와 사용인들이 나와 있었다.
마차에서 내린 레이먼은 프록코트의 앞섶을 여미며 난감한 기색을 감추려 노력했다. 그때, 미네르비나 바이스 남작이 앞을 나섰다.
“각하.”
“…자네가 여기 웬일이야.”
미네르비나와 에블린은 볼트윅 공작가의 가신들인 동시에 사냥부의 관료들이었다. 사냥부 행정관이자 바이스 남작인 미네르비나는 은발의 미인으로, 낮에 있던 일에 대해서 듣기 위해 공작가 저택을 방문한 듯했다. 때마침, 그녀가 다가와 물었다.
“오늘 낮에 광증 때문에 괴로워하셨다고 에블린이 그러던데 괜찮으십니까?”
“음….”
레이먼은 그녀의 물음에 목을 울리듯 대답하고는 습관처럼 집사에게 프록코트를 벗어 주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는 코트 주머니에서 무언가 천 같은 것을 꺼내 움켜쥐었다.
“바쁜 일 아니면 내일 얘기하지. 다소간 피곤한데.”
“피곤이요?”
미네르비나가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되물었다. 레이먼이 신체의 피로를 호소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마물을 잡기 위해 나흘간 한 시간 이내로 자고 두 끼밖에 챙기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이었다.
뭔가를 생각하던 미네르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광증 때문에 피곤하신가보군요.”
…그건 아니었다. 광증에 대한 피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자신이 광증 때문에 궁정 한복판에서 거대한 순록으로 변한 지 채 하루가 지나지도 않았는데 피로는커녕 몸이 가벼워 남의 응접실에서 웬 등신 같은 짓만 했다.
갑자기 안색이 바뀌어 버린 레이먼을 보던 미네르비나에게 의문이 생길 때쯤, 레이먼이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아무튼 피곤한 건 사실이니, 자네도 돌아가도록 해.”
“하지만 오늘 일에 대해 말씀을 해 주셔야 기록을….”
“내일 하자고.”
레이먼은 그대로 등을 돌려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미네르비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누이에 대한 일 때문에 대외적인 평판을 신경 쓰는 레이먼은 사용인들 앞에서는 제 성격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아는 이는 에블린과 미네르비나, 그리고 나머지 수장들 정도뿐이었다.
평소와 같았으면 사용인들의 시선을 의식하여 봄바람 문 얼굴로 사근히 웃으며 말했을 레이먼이 오늘은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 멍하기 그지없었다.
미네르비나는 에블린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각하께서는 광증에 있었던 일은 말도 안 하시고 어딜 가신 거야? 보고서 작성해야 하는데.’
‘몰라. 너갱이 빠져서 나가던데. 첫사랑이라도 만났나 보지.’
첫사랑? 미네르비나는 그 말을 비웃었다. 레이먼은 사랑을 모르는 남자였다. 귀부인들과 아름답게 연애를 해도 질척거리는 사랑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남을 사랑할 만큼 인간을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원래보다 광증의 시기가 빨라진 탓에 혹시 몰라 얼른 기록해 두기 위해 볼트윅 공작가의 저택까지 달려왔던 미네르비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마부가 잡고 있던 말의 고삐를 건네받아 등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날, 공작의 침실에 켜진 마법석은 아주 느리게 꺼졌다.
***
레이먼은 그렇게 왕자궁을 떠난 뒤 다시 방문하는 일은 없었다. 니키엘은 그 나름으로 바빴다. 피부 관리를 하랴, 폴의 잔소리를 한 귀로 넘기랴, 마물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공부 역시 최대한 해 놓아야 했다.
거기다 더하여 검술 수업까지 있었다. 바쁜 와중이긴 하지만 검술 수업을 좋아하는 니키엘은 어제부터 율란이 바쁘다는 이유로 알레윈에게 강습을 듣고 있었다.
알레윈 역시 기사단의 우장군이라 니키엘 같은 초보자가 배우기에는 넘칠 만큼 훌륭한 스승이었다. 때문에 무척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에도, 전 스승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예의상 물어보았다.
“이보게, 얼라리 공. 발트 대공은 요즘 꽤 바쁘신가보지?”
또 한 번 얼라리라고 불린 알레윈이 다소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대답했다.
“…예, 전하. 아무래도 토벌 대회 준비 때문에 바쁘십니다. 준비할 것들이 많아 그러신 듯합니다.”
“그렇군.”
니키엘은 깔끔하게 대답하고는 짚단으로 만든 인형의 목덜미 부근에 목검을 찔러 넣는 동작을 반복했다.
덕분에 살짝 초조해진 쪽은 얼라리, 아니 알레윈이었다.
‘전하께서 나를 찾으시거든…. 아니, 됐다.’
율란이 알레윈을 니키엘에게 보내며 한 말이었다.
말수가 적어 아예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를까, 말을 하다만 적은 처음 보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알레윈은 자신의 상사를 바라보았었다.
그는 곧 몸을 돌려 다른 일들을 처리하는 듯했지만 알레윈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각하께서 부쩍 왕자 전하를 신경 쓰신단 말이야.’
전에는 부러 길거리에 오물을 쳐다보지 않는 것처럼 관심을 끄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알레윈은 자신의 입방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조심스레 니키엘을 향해 말했다.
“…신전에서 축성을 입은 철기들이 들어와서요. 아시다시피 마물 사냥에는 철기 사용이 가장 중요한….”
“뭐?”
니키엘은 그 말에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철기가 있다고? 청동으로 만든 무기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어?
놀란 니키엘이 알레윈에게 다시금 물었다.
“축성? 신전에서 철기를 보냈다는 말이야?”
“…예. 매년 그래 왔습니다.”
알레윈은 배움이 짧아 상식이 다소 부족한 막내 왕자를 위해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나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신전에서 철기를 축성하는 것 정도는 어린애들도 아는 상식이라는 뜻의 표정이었고, 니키엘은 그것을 바로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