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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69)화 (69/130)

69화

한편, 니키엘은 커다란 망토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로 왕자궁 뒷마당으로 향했다. 발목을 삔 곳이 더욱 심해지나 어쩌면 걱정했는데 조심조심 걸으니 심하게 삔 건 아니었는지 아릿하던 통증이 많이 줄었다.

‘경비 허술한 거 봐라. 떼잉, 쯧.’

왕자궁 경비병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니키엘은 그대로 담장의 끄트머리를 철봉처럼 잡아 레그 레이즈의 동작을 응용하여 하복근으로 양다리를 들어 올려 담을 쉽게 넘었다.

그런 다음 율란의 망토를 벗어 던져 버리려다, 그래도 빌려준 물건이니 돌려줘야지 싶어 한숨을 내쉰 채로 망토를 둘둘 말아 챙겼다.

벤디가 열어 둔 주방 뒷문을 통해 들어가려는데 정수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즐거운 외출이셨나이까, 전하.”

“아, 존잼, 어라…?”

니키엘은 되는대로 대답하다가 놀라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폴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니키엘의 안색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폴이 저를 왜 기다리고 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그는 그대로 뒤를 돌아 튀어 나가려 했다. 다시금 도망치기 위해서. 그러나 폴은 녹록치 않았다. 주인 말은 귓등으로 듣는 왕자궁의 경비병들이 어느새 뒷문 담장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저 쓸모없는 것들….”

하는 수 없이 한숨을 쉬며 돌아가야만 했다. 폴은 비장한 미소를 지은 채 니키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 오늘은 스킨 케어의 날이었다. 니키엘로서는 도대체 왜 이런 걸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얌전히 포기한 니키엘을 욕실로 모셔 가며 폴이 말했다.

“오늘부터는 얌전히 마사지도 받으시고 얼굴 관리도 받으셔야 합니다요. 일단 목욕부터 하셔요.”

토벌 대회를 기념하는 무도회에 나가기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나 폴이 워낙 극성이라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 주자 싶었던 니키엘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보다, 무도회 춤 상대로는 투르운 공작이 올 거야. 당일에 손님맞이 같은 걸 해야 하나?”

그 말에, 폴이 놀라 걸음을 멈췄다.

“바, 방금 뭐라, 하셨….”

얜 또 왜 이렇게 놀라. 니키엘이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폴은 놀란 얼굴을 한 채로 다시 한번 재촉하여 물었다. 재차 물으니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라 니키엘이 입을 열었다.

“투르운 공작이 내 춤 상대라니까. 그날 공작이 왕자궁으로 에스컬레이터인지 에스코트인지 오냐고.”

“꺄악! 투르운 공작께서 에스코트를 해 주신다니! 이럴 때가 아니옵니다!”

그럼 어떤 때인데? 니키엘이 그렇게 묻기도 전에 폴이 미쳐 날뛰는 염소처럼 꺅꺅거리며 그를 끌고 가 욕실에 집어넣었다. 그는 비장하게 말했다.

“너는 전하의 손발톱을 맡고, 너는 전하의 머리카락을 맡거라, 너는 또 전하의 눈썹을 맡고….”

폴의 말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개중에는 니키엘의 코털을 맡은 시종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저러나 싶었는데 폴은 그 의문을 풀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니키엘을 욕조에 넣었다. 고난의 시작이었다.

그렇게 세 시간의 목욕, 네 시간의 피부 관리, 두 시간의 마사지를 끝낸 니키엘은 열심히 올려 둔 제 체력이 좆밥이라는 것만 깨달았다. 분명히 점심시간이 지나 돌아왔던 것 같은 왕자궁의 창문에는 이미 노을이 지다 못해 어둑해져 있었다.

니키엘은 지르지 않던 소리까지 질렀다.

“더는 못 해! 차라리 런지 1500개를 시켜라!”

지치고 질린 표정일지언정 삶은 달걀같이 매끈한 피부가 된 니키엘이 침대 위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석사 논문을 쓰기 위해 레퍼런스 논문들을 읽고 정리하느라 이틀 밤을 새웠을 때도 이보다는 덜 지쳤었다. 두 번 다시 못 할 짓이라고 생각하는 니키엘 앞에 폴이 웃으며 다가왔다.

니키엘은 지레 겁을 먹고 그가 뭘 권유하든 안 할 거라고 소리쳤지만, 폴은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것이 아니오라, 응접실에 볼트윅 공작 각하께서 와 계십니다요. 벌써 한참을 기다리셨어요.”

“…뭐?”

놀란 니키엘이 벌떡 일어났다. 레이먼이 왔다니. 니키엘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제 발등 위에 입을 맞추던 검고 아름다운 순록을 말이다.

‘그렇게 큰 순록을 또 어디서 보겠어. 북미 대륙이나 가야 볼 수 있을 텐데.’

거대한 순록은 무척이나 잘생긴 녀석이었다. 윤기가 자르르한 검은 털을 갖고 흑단같이 검은 뿔 사이로 저를 가뒀었다.

온순한 태도와 복종적인 입맞춤에 니키엘이 용기를 내어 순록의 뿔 사이를 쓸어 본 것이 올해 있었던 일 중 베스트 3안에 들었다.

1위는 박사 학위를 딴 순간이고 2위는 사랑스러운 검독수리가 제 품에 안겼을 때였다. 순록이 제 머리를 쓰다듬게 해 준 것도 그렇게 값진 경험들 사이에 들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평소처럼 뚱한 기색으로 그를 쫓아내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결국 니키엘은 레이먼을 만나기 위해 옷을 갈아입었다. 그 전에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해가 졌는데 공작과 내가 만나도 되는 건가?”

“저와 차 시중을 드는 아이가 따라 들어갈 겁니다요.”

폴이 웬일로 그런 기특한 질문을 하냐는 듯이 보며 웃었다. 니키엘은 흠, 하고 목을 울리고는 간단하게 입었던 옷가지를 점검했다.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소박하지도 않은 오시니스식 실내복으로 귀족들이 즐겨 입는 형식이었다. 니키엘은 천천히 응접실로 가 폴이 문을 열어 주는 것을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니키엘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레이먼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급작스러운 움직임에 니키엘이 놀라 움찔 떨었다.

‘뭐야, 문짝만 한 놈이 갑자기 일어서니까 쫄, 아니 놀랐잖아.’

니키엘은 쫄린 티를, 아니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싱긋 웃었다.

“어찌 귀한 궁에 누추한 분이 다 찾아오시었소. 공을 저녁에 뵈니 그냥저냥 반가우려다 만 것 같소.”

반갑지 않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레이먼은 니키엘의 얼굴만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멍하니 선 채로. 눈동자가 살짝 풀린 것 같기도 했다.

니키엘에게 인사를 건넬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왜 저럴까, 저 걸레무새가.’

오늘은 웬일로 시비조차 걸지 않았다. 인사를 할 때도 비꼬는 말만 해 대던 남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니키엘은 희한하다고 생각하며 그를 관찰했다. 순록으로 변할 때 긁힌 상처가 다 나은 듯 레이먼의 뺨은 깨끗해 보였다. 그게 살짝 안심이 되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레이먼은 니키엘을 뚫어지게 응시하느라 넋을 놓고 있는 듯했다.

“이보시오, 공….”

더는 그대로 두면 안 되겠어서 앉아나 차나 들라 말하려던 참이었다. 레이먼의 귓등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커다란 보폭으로 소파를 지나쳐 금세 니키엘을 지나쳤다.

“죄송합니다, 전하. 급한 일이 생겨….”

중얼거리는 변명은 잘 들리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신중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곧은 목소리로 제게 욕을 내뱉던 또박또박한 발음이 아니라, 무언가 공황에 빠진 듯 정신을 놓은 목소리였다.

레이먼은 이제는 목덜미까지 빨개져 있었다. 니키엘은 혹시 레이먼이 아직 광증에서 다 헤어 나온 것이 아닌 걸까 싶어졌다. 이대로 그를 그냥 보냈다가 거대한 순록으로 화한다면, 숲이 먼 왕자궁에서는 필히 인명 피해가 날 것이다.

“그러지 말고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가시오. 오래 기다리셨다 하던데 그냥 보내려니 마음이….”

그냥 보내려니 괜찮았다. 전혀 마음 쓰이는 구석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아직 광증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였다면 지금 이렇게 보내는 것이 오히려 위험해 보였다.

‘신성력이라도 나눠 줘야 하나? 손잡는 걸로 어떻게든 되겠지.’

니키엘이 보기에 레이먼은 예쁜 구석이 없어도, 이대로 순록으로 변하면 또 큰일이 날지 몰랐다.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손을 잡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의 순록으로 변할 때의 모습이 계속해서 생각나 약간 안쓰럽기도 했다. 정말 괴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수장들은 다 그런 고통을 안고 사는구나.’

니키엘은 레이먼과 율란이 그렇게 까칠하고 싸가지가 없는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원래 병자들은 착하기가 힘들다.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고통을 인내하느라 모든 참을성을 그쪽에 쓰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스레 신체 건장한 남성 두 명을 병자 취급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니키엘은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신성력을 나눠 주기 위해 앉아서 진정하고 가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읏….”

손목이 잡힌 레이먼이 잡은 니키엘이 더 놀랄 정도로 크게 몸을 떨었다.

니키엘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덜미부터 귓등, 얼굴까지 말도 못 할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냐고 물어야 하는데 입술만 달싹거려졌다.

‘…난데없이 손을 잡아서 저러나. 그게 기분 나쁜 거였다면 평소처럼 걸레니 뭐니 해가며 사람 속을 뒤집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고.’

그는 무언가를 인내하듯 커다란 어깨를 가끔씩 떨면서 니키엘에게 손목을 내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차마 빼지 못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예 니키엘 쪽은 돌아보지 못하고 있는 레이먼이 나머지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의 분위기가 하도 이상하여 니키엘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볼트윅 공, 무슨 일이기에….”

“…실례하겠습니다, 전하.”

그는 그대로 손목을 뿌리치더니 황급히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니키엘은 황당하여 응접실에 남아 있던 폴을 바라보았다.

폴도 두 눈이 동그래진 채로 왜 저래, 하는 눈으로 레이먼이 나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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