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그는 서슬 퍼런 어투로 짓씹듯 말했다.
“약혼자 후보감과 이 숲에서 단둘이 있었다는 게 발견되는 게, 고매하신 전하께서 원하시는 일인가?”
“나는 그게 아니라-.”
“두 눈이 제대로 달려 있으니 보이시겠지만 미령하신 판단력을 대신하여 말씀드리자면, 전하는 지금 벌거벗은 약혼자 후보감과 숲에 단둘이서만 계시던 참입니다.”
…미쳤나? 지금 그게 중요해? 사람이 쓰러졌고 니키엘은 그 사람을 도우려 전력을 다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까지 생각하던 니키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세계의 상식이 다소 근현대 한반도처럼 보수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남성이라는 인식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던 니키엘은 어느새 이 개 같은 보수 관념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니키엘을 향한 여론이 너무 안 좋기도 했기 때문이다. 폴만 해도 아직도 시종들 사이에서 걸레 왕자의 뒷바라지를 해 준다는 놀림을 듣는 모양이었다.
왕자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평판을 챙겨야 한다는 걸 차츰 깨닫고 있었다. 게다가 레이먼의 목에 부목을 대어 주느라 자신의 차림이 엉망이긴 했다.
이대로 벌거벗은 레이먼과 함께 숲을 나선다면, 아무리 그 옆에 율란이 있다고 해도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해했소.”
니키엘은 침통하게 대답했다. 그 태도에 율란의 한쪽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갔다.
숲 쪽에서 커다란 굉음과 함께 나무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는 소집 회의가 끝난 지 얼마 안 되었던 시각이었다.
새와 뱀 새끼의 싸움에 넌덜머리가 난 참이기도 했고 말 안 듣는 애새끼들의 보모가 된 심정으로 토벌 대회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기가 차 집무실 한편에 있던 근위대장의 브랜디를 멋대로 반병 정도 비우던 때였다.
그 정도의 술은 간에 기별도 안 가는지라 더 마실까 말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간 줄 알았던 지카리가 다시금 창가로 날아와 발톱으로 창을 긁어 대는 것이 아닌가.
참아 줬으면 됐지 얼마나 더해야 하나 싶어 오늘은 새 구이를 해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창문을 열었다.
그때, 멀리서 둔중한 소리가 들렸다. 그걸 들 순간, 율란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창을 다 연 다음 아래로 뛰어내렸다. 근위대 대장의 집무실은 2층에 위치 해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유연한 아킬레스건과 슬괵근은 율란이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율란은 그대로 시야각을 좁히기 위해 한쪽 눈을 감은 채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말아 다른 쪽 눈에 대었다.
왕궁 뒤편 숲 쪽에서 나무들이 연달아 쓰러지고 있었다. 지카리가 공중을 세 번 선회했다. 수장들 중 누군가에게 일이 났다는 표식이었다.
율란은 더 할 것 없이 그대로 달려 나갔다. 지카리 역시 뒤를 쫓아오는 듯하길래 공중을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지카리가 비행 방향을 틀어 반대쪽으로 날아갔다. 루시안을 부르러 가는 것이다. 그대로 허벅지 근육이 터질 정도로 달렸다. 가는 길에 마구간이 있었지만, 이럴 때는 율란이 직접 달리는 것이 더욱 빨랐다.
늑대로 돌아간 상태에서의 속도에는 못 미치더라도 그는 범인이 범접할 수 없는 속도를 자랑하고는 했다.
폐가 크게 부풀며 근육에서 일어나는 팽창과 수축 작용을 도와주었다. 발끝까지 산소가 공급되며 율란은 더 크게 도약했다.
숲을 향해 달렸다가, 숲 입구쯤에서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를 따라 대각선을 향해 달려 나갔다.
중간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율란은 혀를 찼다. 소리가 안 된다면 후각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멈춰 선 율란은 크게 흉곽을 부풀렸다. 호흡기로 숲의 청량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리고 그 끝에, 실마리가 얹어졌다.
‘연꽃 향?’
코를 찌르는 순록의 페로몬이 소중하게 감싸고 있는 아주 옅은 향이었다. 연꽃의 향. 아침이면 새로 피어오르는 수련처럼, 호수 위 요요히 떠 있는 연꽃의 푸른 향이었다.
‘이런 씨발-.’
욕을 짓씹었다. 뽈뽈거리고 돌아다닐 때부터 경고했어야 하는데. 궁에서는 웬만하면 광증을 일으키지 않는 수장들인지라 방심했다.
거대한 순록의 앞발에 밟힌다면 니키엘의 한 줌도 안 되는 목뼈는 그대로 부러질 것이다. 잔혹하게 밟힌 니키엘을 상상하는 순간 두 눈에서 불이 튀었다.
율란은 후각에 의존하여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 숲속에 정신 나간 순록 새끼와 단둘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욕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저 빠르게 달리고, 짐승의 영역 안으로 거대한 순록이 들어와 있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널을 뛰는 심박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율란은 점점 짙어지는 연꽃 향을 찾아 달렸다. 나뭇가지가 뺨에 스쳐 생채기를 입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때, 전나무들 사이로 니키엘이 있었다.
“…헉, 허억….”
율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니키엘이 있었다. 그는 레이먼의 뺨을 쓰다듬으며 이마를 걷어 주기도 했다.
전나무들 사이로 들이치던 햇빛이 잠시 물러갔음에도, 니키엘은 숲의 한가운데에서 더없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백금발 위로는 원형의 광채가 떠오른 것 같기도 했다. 믿을 수 없는 후광(後光)이었다.
아마도 착각일 것이 분명한 그 빛무리에 율란의 심장이 조여들었다. 누군가의 손에 심장이 쥐여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 겪는 감정들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그의 손길에 뺨을 내어 준 레이먼이 미치도록 부러워졌다. 왜 그런 감정이 생겼는지,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율란은 저도 모르게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니키엘의 발등에 입을 맞춘 뒤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다시없을 안식을 취하고만 싶었다.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정했다가는 제 모든 것이 무너져 니키엘로 하여금 재조립될 것만 같았다. 자신을 잃고 저 손에 모든 걸 맡기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리고 그때, 율란의 두 눈에 그제야 레이먼의 몰골이 들어왔다. 그는 생채기가 가득한 채로 나체인 상태였다.
광증을 앓다가 짐승으로 화한 뒤 다시 돌아오게 되면 당연히 입고 있던 옷 같은 것들은 광증에 녹아 사라지지만, 이 순간만큼은 불길이 치솟았다.
‘저 씹새끼.’
욕이 튀어 올랐다. 오히려 그런 광증의 순간에서는 아무리 레이먼을 향해서라도 적의를 불태워 본 적이 없는데 말이다.
율란은 그제야 그들에게 인기척을 내었다. 니키엘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미는 것에 기쁘다 느껴지는 것도 잠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휑하니 드러난 하얀 복부를 보고 또 이성이 반쯤 날아갔다.
대체 저 꼴로 둘이서 뭘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레이먼이 기절한 상태인 건 상관없었다. 지금이라도 찬물을 부어 깨운 뒤 턱에 주먹을 연달아 꽂아 주고 싶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니키엘로 인해 여러 가지 감정을 한꺼번에 느끼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한 상태였다.
율란은 망토를 벗어 당장 니키엘의 등에 둘러 주었다. 그런 뒤 그와 같은 경고를 한 것이다. 다행히, 니키엘은 납득한 듯했다.
“…이해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전하.”
“그럼…. 볼트윅 공은….”
“더 신경 쓸 게 남아 있나?”
왜 레이먼을 챙기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말이 불퉁하게 나갔다.
니키엘은 그런 율란을 빤히 올려다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고 손을 내저었다.
“되었소. 대공이 알아서 할 일이지. 나는 조용히 왕자궁 쪽으로 향할 터이니 더 걱정마오.”
지금이라도 새 새끼를 불러 에스코트를 부탁하면 되겠지만, 율란은 아무 말 없이 니키엘이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걸 바라만 보았다.
제 망토에 묻은 페로몬이 니키엘의 몸을 감싸고 있는 듯해 묘한 만족감이 들었다. 니키엘은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지만, 율란은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꾸준히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가 아예 숲을 나섰다는 것이 멀어진 연꽃 향으로 느껴졌을 무렵이다. 율란은 쯧 혀를 차고는 검지와 엄지를 입꼬리에 걸치고는 휙, 휘파람을 두 번 불었다. 일이 소강 되었다는 신호였다.
지카리를 위한 신호이기도 했다. 루시안을 데리러 갔던 것인지 지카리는 빠르다고도 느리다고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천천히 날아왔다.
전나무 숲 위에서 휭휭 도는 지카리를 향해 율란이 소리쳤다.
“이 새끼 입을 옷 가져 와.”
그러자 지카리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 마침내 참새만 해졌다. 심부름을 시키니 귀찮고 짜증이 나 아주 오래 걸릴 예정이라는 무언의 뜻이었다.
하나같이 짜증 나는 새끼들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카리는 곧이어 근위대 건물을 향해 사라졌고 율란은 다시금 땅에 엎어져 있는 멍청한 순록을 내려다보았다.
율란은 망설이지 않고 레이먼의 뺨을 후려갈겼다. 짝-, 하고 크게 난 소리에 숲속의 새들이 날아갈 정도였다.
“이제 일어나.”
그는 무감한 어조로 말한 뒤 다시금 뺨을 연달아 쳤다. 레이먼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곧이어 눈을 떴다. 으윽, 하고 제 양 뺨을 부여잡았다.
“이게 무슨, 뺨이 왜 이렇게 아픈 거야-.”
“나무에 부딪쳤나 보군. 정신 차렸으면 지카리가 옷을 가져올 때까지 잠시 있도록 해. 난 바쁘거든.”
“…뭐? 아니, 망토도 없어?”
레이먼이 턱을 양옆으로 움직이다가 놀라 말했다. 정신을 차린 레이먼은 약간 얼떨떨해 보였다. 멍청한 얼굴이라고 생각하며 율란은 등을 돌린 채 뒤도 안 돌아보고 숲을 빠져나갔다.
열이 받았는지 순록이 크게 율란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율란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