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66)화 (66/130)

66화

“헉-!”

니키엘은 놀라 숨을 삼켰다. 소름이 끼쳤다. 저를 쫓던 순록은 생태학을 전공하여 그들의 생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니키엘조차 낯설다 생각될 정도로 너무도 거대했다.

순록은 니키엘을 빤히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제가 나무 기둥에 머리를 박고 있다는 것도 잊은 것처럼, 꼭 니키엘에게 시선을 빼앗긴 듯이 말이다.

위기를 직면한 니키엘의 신체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한꺼번에 솟구친 나머지 도리어 반사 작용들이 모두 멈춘 바람에 굳은 채 숨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거대한 순록은 여전히 니키엘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밤하늘보다 깊고 어두운 두 눈이 집요할 정도로 니키엘을 응시했다.

만약 그렇게 긴박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순록의 생김에 시선을 빼앗겼을 것이다.

흑단같이 검은 뿔과 윤기가 흐르는 검은 털에 뒤덮인 잘생긴 순록이었기 때문이다. 강인해 보이는 다리와 거대한 흉곽 또한 가히 왕궁 숲의 주인이라 불릴 만했다.

웅장한 순록의 생김에 니키엘은 도리어 시선을 빼앗겼다. 제가 처한 상황이 어떤 것인지 잠시 잊은 채 살면서 흔히 볼 수 없었던 경이로움에 매료되었다. 순록은 그만큼 아름답고 강인해 보였다.

크기가 집채만큼 컸을 뿐만 아니라 무리의 알파 수컷을 손쉽게 차지하고도 남을 만큼 강건해 보였다.

감상은 짧았다. 순록이 니키엘을 향해 앞발을 디딘 것이다.

“어, 어…? 지금 이쪽으로 오는….”

눈으로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아름다움도 순록이 니키엘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하자 금세 휘발되어 날아가 버릴 감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저를 향해 달려오려는 바로 그 순간, 니키엘도 몸을 돌려 반대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니키엘은 전력을 다하여 기다랗게 자란 전나무들 사이로 마구 달렸다. 신발을 제대로 된 걸로 신고 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폴이 매번 권유하는 비단신을 신고 왔더라면 그대로 굴러 버렸을 수도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쉴 새 없이 들려왔다. 가을을 맞이하기 직전의 숲은 낙엽이 적어 그나마 지면이 미끄럽지 않았다.

근래에는 비가 적게 내려 이끼들도 힘을 잃은 상태라 니키엘이 도망치기에 최선의 상태였다.

문제는 순록에게도 마찬가지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뒤쪽에서 거대한 사슴과의 동물의 숨소리가 들렸다. 너무도 가까이 들리는 듯해 등골을 뒤덮은 소름이 가시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숲을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인명 피해가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갈등의 극치였다. 지금 당장 밖을 빠져나가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그대로 저 나무 기둥 같은 뿔에 꿰어 죽을 것 같고 그렇다고 이대로 숲을 달리기에는 금세 따라잡혀 앞발에 밟힐 것만 같았다.

이도저도 못 하는 사이 순록의 발굽 소리가 더욱 가까워져 왔다. 평야에서 달렸다면 니키엘은 다섯 걸음도 채 가지 못한 상태에서 붙잡혔겠지만, 기다랗고 촘촘하게 자란 전나무들 사이를 달리는 순록의 거대한 뿔이 가지들 사이로 자꾸만 걸리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사슴과의 수컷에게 뿔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일인지 모르겠다.

뒤에서는 여전히 우직끈하며 쾅하고 나무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저놈의 순록 뿔은 무슨 철강으로 되어 있는지 전나무 기둥에 걸릴 생각은 하지도 않고 부딪치는 즉시 부러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으아악-!”

잘 달리던 니키엘이 무언가를 잘못 밟고 앞으로 고꾸라진 것이다. 달리는 것에 가속도가 붙어 앞으로 두어 번 구른 니키엘은 전나무 기둥에 등을 부딪치며 멈췄다.

“헉….”

절로 신음이 나왔다. 눈앞에 별이 보였다. 위기감보다 그 짧은 고통이 더 먼저 뇌리를 강타했다. 아무래도 발목을 잘못 디뎠는지 살짝 삐끗한 것 같았다.

통증도 심했지만, 발목으로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올라왔다. 바깥쪽 복사뼈 아래와 발등이 빠르게 얼얼해지다가 이내 시큰거렸다.

그 통증들을 이겨 내느라 바빴던 니키엘은, 끙, 하고 앓은 뒤에야 제가 처한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순록이 거대한 흉곽을 들썩이며 지척에서 니키엘을 내려다보고 있던 것이다.

“아…. 미치겠네….”

어머니, 아버지, 불효자 심장 마비로 죽었을 때 그대로 황천 건널 것을 이제야 찾아뵙겠네요.

창백한 안색으로 니키엘은 중생을 구원하신다는 지장보살님을 찾았다.

‘지장보살님, 중생 한 명 또 갑니다. 다음 생에는 책 속 인물에게 빙의 같은 건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이 빌어먹을 책 이전에 읽었던 건 식인종 섬에 갇힌 어느 남자의 이야기였단 말입니다!’

빌 수 있는 것은 다 빌어 본 찰나였다. 순록이 움직여 니키엘에게 더 다가왔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었다. 짐승의 페로몬이 도처를 압박하듯 조여 오기 시작했다. 흑요석처럼 검은 눈동자가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니키엘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 발굽에 밟히면 얼마나 아플까. 그냥 바로 즉사했으면.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 알았다면 유산소 좀 열심히 해서 심폐근을 강화시켜 둘걸. 더 잘 달릴 수 있었는데.

그리고 그때, 태산같이 둔중한 발굽이 땅에 넘어져 있던 니키엘의 발 앞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놓였다. 이제는 딱 죽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니키엘은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러다 흠칫 놀라는 수밖에 없었다. 발등에 살짝 더운, 그리고 부드러운 감촉이 들었던 것이다.

“…어?”

그는 놀라 감았던 두 눈을 슬며시 떠보았다. 그러고는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순록이 니키엘의 다친 발목 위로 입을 맞추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니키엘은 숨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니키엘은 마치 감옥의 철창처럼 순록의 뿔 사이에 갇혀 버렸다.

“…아.”

탄성밖에 나오지 않았다. 순록은 마치 신실한 종이 주인의 발등 위에 키스하듯 니키엘의 발목에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었기 때문이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짐승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경건한 태도였다. 그 광경은 니키엘의 마음 속 그 어딘가를 자극했다.

마치 제 것을 되찾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상할 정도로 고양감이 차올랐다. 니키엘은 천천히 손을 뻗어 순록의 뿔 옆을 만져 보았다.

윤기가 날 정도로 곱던 검은 털 위로 손바닥을 스치는 기분이 오묘했다. 니키엘의 손길이 기꺼운 듯 가만히 있던 순록이 살짝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흑요석 같은 두 눈이 니키엘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아무런 말도 필요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지고지순한 눈빛이었다. 인간과는 소통의 체계가 다른 짐승에게서는 볼 수 없던 눈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쉬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순록의 몸 위에서 검은 덩굴 같은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어…?”

놀란 니키엘이 순록에게 다시금 손을 뻗으려던 순간이었다.

순록이 크게 울부짖으며 앞다리를 일으키더니 공중을 향해 두어 번 발길질 하며 괴로워했다. 투레질을 심하게 하느라 주위의 전나무들이 뿔에 부딪쳐 나무껍질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니키엘은 놀라 팔을 머리 앞에서 엑스자로 교차했다. 팔뚝에 나무껍질이 스쳐 지나며 만든 자잘한 상처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순록은 크게 울었다. 허공에 발길질을 하기도 하고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전나무들을 뿔로 부셔 댔다.

앉은 상태로 뒤꿈치로 바닥을 득득 긁어 몸을 뒤로 물리려했다. 발목이 시원찮아 얼마 가지도 못했지만, 가만히 있기에는 앞발에 밟혀 그대로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검은 기운이 한 번에 쑥 사라지더니 순록의 몸이 순식간에 레이먼으로 돌아왔다.

“볼트윅 공-!”

니키엘은 놀라 그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레이먼은 의식을 잃었는지 그대로 쿵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공!”

그를 불러 보았지만 이미 의식을 완전히 잃은 듯했다. 니키엘은 그에게 달려갔다. 시큰거리던 발목의 통증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레이먼은 알몸인 채로 여기저기 상처가 나 있었다. 달리다 다친 듯했다. 마지막에 땅으로 쓰러질 때 무릎부터 꿇은 채 바닥에 닿았으니 목뼈나 척추에 이상은 없을 것 같았다.

혹시 몰라 나뭇가지 여러 개를 같은 크기로 부러트린 뒤 제 튜닉을 찢어 그 안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한 다음 아래, 위 양단을 접은 걸 레이먼의 목덜미에 댄 후 앞에서 졸라맸다. 그런 다음 몸을 바로 뉘어주었다.

워낙 덩치가 커 니키엘에게도 살짝 버거웠지만 말이다. 그렇게 니키엘이 사람을 부르러 가야 하나 싶었을 때였다.

발자국 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니키엘은 뒤를 돌아보았다. 전나무 사이로 보이는 것은 율란 발트였다.

“대공-!”

저 원수가 반가워 보일 지경이었다. 니키엘은 레이먼의 옆자리에서 급하게 일어섰다. 튜닉의 앞부분을 찢은 탓에 복부가 훤히 드러났지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율란의 미간에 골이 패이며 빠르게 다가오더니, 걸치고 있던 망토를 풀어 니키엘에게 메어 주었다.

“무슨, 나는 필요 없소. 그보다 볼트윅 공이…!”

“전하께서는 어서 이 숲을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뭐…?”

그 말에 반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명 피해가 날까 죽어라 뛰어다닌 사람한테 저런 태도라니.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색내는 것은 아니지만 순록이 저를 추격하는데도 여태껏 안 보이던 이가 이제야 찾아와 저런 말을 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율란이 서늘한 눈으로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뭐라 하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눈빛이 서늘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용암처럼 뜨거운 불길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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