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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64)화 (64/130)

64화

그런 대화를 하던 사이, 두 남자는 어느새 연무장에 붙어 있는 근위대 대장 집무실에 다다랐다. 루시안이 집무실 문에 노크했다.

노크를 하긴 했으나 상대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지, 루시안이 집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때까지 생각에 골몰해 있던 레이먼은 안쪽으로 들어가자마자 왠지 기분이 한층 더 더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율란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더러운 걸 본 사람들처럼 서로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집무실 안쪽 소파에는 건방진 새 새끼가 늘어져 있었다.

금발의 고수머리를 리본 하나로 묶은 채 회색 눈을 도르륵 굴리며 나머지 수장들을 지켜보다가 벌떡 일어나 루시안의 옷깃을 잡더니 코를 묻고 킁킁거렸다.

“징그럽습니다. 떨어지십쇼.”

루시안이 그런 지카리의 이마를 짚어 쭉 밀어냈다.

성년이 지난 지 꽤 되었는데도 성장이 멈춰 버린 지카리는 다른 수장들보다 조금 작았다. 아마 니키엘과 비등비등할 것이다.

가볍게 날기 위해 뼛속을 비우는 것은 작은 새나 하는 짓인데 지카리는 꼭 자신이 맹금류가 아닌 뱁새 등 작은 새 흉내를 내고는 했다.

무해한 척해도 짐승은 짐승이다. 보아라, 지금도 회색의 눈을 번뜩이며 날카로운 말을 꺼내지 않았는가.

“난다. 루시안, 니키엘의 향.”

역시.

레이먼은 제가 레이먼에게 맡았던 냄새가 니키엘의 연꽃 향유가 맞았다는 것에 불쑥 불쾌감이 치솟았다.

그것은 지카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새의 회색 눈에서 온도가 뚝뚝 떨어지더니 뱀을 노려보기 시작한 것이다.

까딱하다간 날카로운 발톱과 튼튼한 부리로 뱀 가죽을 벗겨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루시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프 후가 니키엘 전하의 향에 대해서 그토록 자신합니까? 어째서? 지근거리에서 꽤 오래 맡은 사람처럼 단언하는군요.”

그의 말은 살짝 억지였다. 네 명의 수장들은 모두 짐승의 터럭을 뒤집어쓰고 사는 이들이었다. 그 정도 냄새는 단 한 번만 맡아도 기억할 수 있었다.

지카리와 레이먼이 루시안의 어깨 위에 닿았던 니키엘의 손에서 옮겨 붙은 미미한 향을 알아차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루시안은 논리적으로 굴지 않는 것들은 모두 가치가 없다는 듯 행동하곤 했던 지난날들을 싹 잊은 듯,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지카리를 찍어 누르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새빨간 루비 같은 눈동자에서 불길이 뚝뚝 떨어졌다. 영역을 침범받아 화가 난 짐승의 것이었다.

“그만.”

그때, 율란이 그들을 만류했다.

레이먼은 어쩐지 속이 울렁거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는다고 생각하며 입을 연 율란을 바라보았다.

율란은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잉크병을 닫았다. 그러고는 책상을 슥 훑듯 두 손을 책상에 짚은 채 상체를 살짝 기대며 나머지 수장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새끼나 저 새끼나 할 것 없이 백합의 향을 어디 새기고 다니듯 기억하고 있다는 거 같은데.”

“…….”

“왜 그렇게 됐을까?”

그 물음의 뜻은 이러했다.

네 명의 수장들은 영혼이 미천하기 그지없는 왕과 왕족들에게 실망하여 그들에게 권력을 나눠 주지 않기 위해 니키엘과 접촉하지 않기로 암묵적 협의했다.

물론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니키엘에게 닿는 즉시 나머지 수장들의 철퇴를 맞을 것이다, 라고 한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들은 그 암묵적 협의를 몇 년간 꽤 잘 지켜 왔다. 바로 니키엘이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본래의 그들이었다면 니키엘이 기억을 잃든 말든 상관없이 그와 접촉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의 유무와 관계없이 니키엘은 왕의 꼭두각시였다.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허리를 끌어당겨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싶어 하는 걸 왕이 알아차린 즉시, 네 수장들은 왕이 쳐 둔 거대한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니키엘을 피했었다. 그런데 요 근래, 각각 모두가 니키엘과 접촉하고 있는 듯했다.

율란은 자신이 니키엘의 검술 선생이 된 것은 말하지 않은 채 루시안과 지카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디서 백합과 접촉했지?”

얌전히 있으랬더니 하루에도 부뚜막을 골백번 올라 다니는 엉덩이에 뿔난 고양이. 율란은 니키엘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이를 아득 갈았다.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그 고아한 연꽃 향을 여기 있는 수장들 모두가 알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전의 니키엘이었다면, 수장들은 그가 무슨 향의 향유를 쓰는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애초에, 지카리가 니키엘에게 접근할 리도 없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모두 니키엘의 향유가 어떤 식으로 고혹적인 향을 풍기는지 알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꽤 심각했다. 이런 식이면 왕이 니키엘에게 접근한 수장들을 눈치챌 수도 있었다.

저 하나면 괜찮겠지 싶어 검술 선생이 되는 걸 허락했던 율란은 위기의식을 느꼈다. 토벌 대회를 의논하기 위해 짐승들을 불러 모은 것인데 더 큰 사항이 있었던 것이다.

루시안이 아직도 제 멱살을 잡고 있던 지카리의 손을 억세게 떼어 내며 짜증을 냈다.

“어디서 접촉한 게 무슨 상관입니까, 전하와 제 사생활인 것을.”

그 말에 나머지 셋의 시선이 모두 루시안에게 몰렸다. 그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옷 주름을 툭툭 펴며 말했다.

“백합의 구근만 견제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애초에 그게 문제였으니.”

백합의 구근이라 함은 왕을 뜻하는 그들 나름의 은어였다. 그 말에 레이먼의 미간이 콱 구겨졌다.

“그럼 지금 뭐, 왕자 전하랑 혼례라도 올리시겠다는 건가, 투르운 공?”

“아니 될 것 있겠습니까.”

루시안이 심드렁하게 말한 순간이었다. 지카리가 주먹을 단단히 쥐더니 루시안의 턱을 가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고개가 돌아가며 몸이 밀렸던 루시안이 금세 세력을 회복한 뒤 불꽃이 튀는 안광을 빛내며 지카리의 턱에 주먹을 꽂아 돌려주었다.

빠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두 사람 다 봐줄 생각이 없었는지 각자의 뺨에 시퍼런 멍이 올라오며 부어올랐다. 율란이 검집으로 책상을 내려쳤다.

“나가서 싸워. 찻잔 깨지니까.”

회의는 시작도 못 하고 파회의 분위기로 치달았다. 레이먼은 에휴, 한숨을 내쉬며 앉았던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때, 지카리가 커다란 새로 변해 루시안을 내리 눌렀다. 율란이 짜증을 냈다.

“지키! 저거 안 보여?!”

율란이 검집으로 가리킨 벽면에는 ‘실내에서 비행 금지’라는 표어가 쓰여 있었다.

지카리가 점점 줄어들며 날개가 일으키는 바람 역시 줄어들었다. 검독수리의 거대한 발톱 아래 깔려 있던 루시안이 지카리가 작아지자마자 새의 발목을 움켜쥐고는 멀리 던져 벽에 메다꽂았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간 지카리가 벽면에 닿기 전 놀랍도록 부드러운 날갯짓으로 천장으로 방향을 틀어 휙 날아올랐다.

레이먼은 하품을 하며 집무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분위기를 보니 오늘 더 이상의 회의 진행은 불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볼트윅 공.”

“…….”

율란이 레이먼을 불러 세웠다. 깍지 낀 손으로 후두부를 받친 채 한량처럼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레이먼이 뒤를 돌아보았다.

율란은 지카리의 날개바람으로 어지럽혀진 양피지들을 정리하며 말했다.

“자네도 백합과 접촉이 있었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이렇게 배알이 뒤틀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레이먼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예, 대공 각하. 어제도 백합과 헐도록 떡 쳤습니다.”

그 말에 아직도 서로의 목을 쥐고 싸우던 지카리와 루시안, 양피지를 정리 중이던 율란까지 움직임을 뚝 멈췄다.

루시안이 지카리의 정수리를 손으로 내리 누르며 살기를 내뿜었다. 독 오른 뱀이 내뿜는 페로몬이 집무실 안에 자욱해졌다.

“뭘 했다고 하셨습니까, 공.”

물음 자체는 정중했다. 루시안의 루비 같은 눈동자 안에 박혀 있던 검은 동공이 위로 쪽 찢어졌다.

율란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만해, 투르운 공. 저 말이 사실일 리 없다.”

레이먼은 율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요. 백합한테 직접 물어보십쇼.”

그러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묘하게 기분이 더러워 웃고 있던 얼굴이 금세 가라앉았다.

율란이 왜 니키엘의 일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을까.

아무리 왕을 견제하려 다른 수장들을 단속하기 위함이라고 해도, 율란은 니키엘에게 철저히 무관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향유 냄새가 어떤 향을 품고 있든, 또 그 향을 누가 맡아 본 적이 있든 율란에게는 그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율란은 지카리가 루시안에게 따져 묻는 말에 바로 반응했다. 마치 향유의 향을 맡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그게 무슨 의미일까.

레이먼의 단전에 불로 지진 거대한 돌덩이가 내려앉는 듯했다. 열이 받아 그런 것인지 아까부터 몸 상태가 이상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레이먼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사냥부 관저로 향했다.

가는 길에도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느낌이 드는 날에 재수가 좋았던 적이 없어서 레이먼은 바로 숲으로 달려가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증이 발목 밑에서 스멀스멀 똬리를 틀고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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