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더 굶었다가는 근 손실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저 혼자 풍덩풍덩 화롯가 노쇠 솥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던 재료들은 막상 입에 넣어 보자 그럴듯한 맛을 자랑했다.
간이 약간 세긴 했지만, 왈츠를 추는 동안 졸아 붙어 그런 듯했다. 그것 외에는 감칠맛과 혀를 감싸는 부드러운 맛이 어우러져 꽤 즐거운 식사였다. 가끔씩 씹히는 소시지도 니키엘에게 기쁨을 주었다.
니키엘은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스튜를 먹었다. 혼자 남겨 두고 갔다는 말은 니키엘이 연구실을 둘러보아도 좋다는 말로 들렸다.
흥미가 생기자 평소처럼 느리게 식사를 하여 충분히 소화시키던 습관은 어디로 가고 눈알이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방안 이곳저곳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다 먹은 접시를 한쪽에 치워 둔 니키엘은 그대로 루시안의 연구실 탐방을 시작했다.
“어디 보자, 뭐 재미있는 게 있나.”
남의 연구실 자료를 마구 뒤질 수 없는 일이라 책장을 주로 구경했다. 루시안의 연구 주제는 무엇이며 무슨 책들을 레퍼런스로 쓰는지가 궁금했다.
“오, 재미있겠네.”
연금술에 기초가 되는 화학은 학부 시절 강의를 듣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도 화학의 기초가 성립되어 있는 듯했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자면 대부분 허무맹랑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책들을 살펴보는 것이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깨가 찌뿌둥해 기지개를 폈다.
그때였다. 무언가 툭, 하고 루시안의 책상 위에서 떨어진 것이다. 팔을 움직이다 저도 모르게 쳐 버린 듯했다.
“…이게 뭘까.”
연구 자료 중 하나인 것 같았는데, 타인의 것이니 읽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니키엘의 순백 같은 뇌가 정보를 쫙 빨아들였다.
니키엘의 머리는 유달리 좋은 편은 아니지만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의외로 흡수가 쉬웠다. 일단 이해만 하면 외우는 것도 곧잘 해내고는 했다.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 그렇지, 막상 노력하면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내는 것에는 무리가 없는 머리인 듯했다.
때문에 니키엘은 그 연구 자료 위에 쓰인 글자 몇 개를 본 순간, 무언가를 바로 떠올리고야 만 것이다.
“이건, 고로법….”
루시안이 간단한 메모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 것에 주제는 이세계의 고로법이었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연구인 듯했다.
용광로에 철광석, 코크스, 석회석 등을 넣고 쇳물을 만들어 철강을 제조하는 고로법은 인류의 문명을 크게 바꿔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이야기이고 아직 오시니스에는 일어나지 않은 일 같았다. 칼들이 하나같이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문명은 꽤 뛰어난데 아직 청동기라니…. 방법을 모르나….”
니키엘은 중얼거리며 연구 보고서를 뒤적거렸다.
그곳에는 고로법에 근접한 여러 방법이 쓰여 있었다. 구리를 다루는 것을 타파하고 철강으로 넘어가려는 조짐으로 보였다.
“고대 대장간은 목탄을 사용했었지, 아마.”
목탄에서 나오는 탄소가 쇳물에 다시금 섞여 들어 순도 높은 철광석을 생성하기는 어려워도, 청동보다는 나을 것이다.
니키엘은 적철광과 자철광에서 어떻게 하면 순도 높은 철강을 뽑아내는지 환원 반응식을 떠올리다가 몇 가지 식을 써 본 다음 그것의 결과들을 루시안의 깃펜을 빌려 연구 자료 위에 아무렇게나 써 놓았다.
“밥값은 했다.”
그러고는 마법석을 이용해 돌아가는 벽면의 시계를 보았다. 벌써 상체 할 시간이었다.
“이쯤 되면 레이먼도 돌아갔겠지.”
니키엘은 어깨를 으쓱이며 루시안의 연구실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오시니스 문명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대책을 마련한지도 모른 채 말이다.
***
역시나 삐익 하던 소리는 새 새끼의 호출 신호가 맞았다.
율란이 어디서 새 새끼를 잡아다 데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창공을 선회하며 전서구 역할을 하고 있는 꼴을 보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리프 후, 후만 먼저 니키엘 전하의 기적에 다가갔다 이거죠.’
루시안은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대며 차양을 만든 뒤 공중을 돌고 있는 새 새끼를 노려보았다. 원수 같은 뱀과 새 사이지만 의리가 존재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지카리는 니키엘을 독점하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저 커다란 덩치를 숨기고 뱁새만큼 작아져 시종일관 니키엘의 품에 안기려 하지.
그는 지카리가 예전에 그에게 니키엘이 변모하였다고 알려 주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혼자 쓱싹하려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저야말로 니키엘을 혼자 쓱싹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가 수정을 깎아 만든 것 같은 섬세한 손가락을 제 어깨 위에 올려 두고 곧 시작될 왈츠에 긴장한 숨을 가느다랗게 내뱉던 그 순간, 루시안은 이대로 니키엘을 납치해 어디로든 가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건 불현듯 깨달은 것으로, 그 전까지 루시안에게 그런 충동은 또 없었기 때문에 가히 생애 최초라 볼 수 있었다.
니키엘은 뱃속이 시커먼 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 루시안의 발을 밟았노라 민망한 얼굴로 사과했다.
그의 사과를 빌미로 더한 것을 뜯어내고 싶었던 뱀은 입을 다물고 그저 다정한 척 웃어 보였다.
아직은 이 충동이 너무 거대해 그 이름을 알 수가 없으니 잘 다스려 쓸 만하게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성큼 다가가기에는….
“긴장하신 듯해 보였지.”
장밋빛 뺨을 물들인 채 당황에 두 눈을 깜빡이며, 니키엘은 루시안의 스텝을 천천히 쫓아왔다. 그를 리드하는 것이 자신이라는 저열한 만족감이 루시안의 뱃속 수컷을 자극했다.
저에게 그런 음험한 감정이 있을 거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가 니키엘의 생각에 정신없이 침잠할 때, 옆에 와서 선 레이먼이 시큰둥하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오늘따라 성격이 그렇게 나빠 보이오?”
니키엘을 떠올리는 도중에 시커먼 순록의 굵직한 목소리를 듣는 게 꽤 불쾌하여, 루시안은 입을 다물었다.
평소에는 상식인인 척, 새 새끼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로 응하는 루시안은 제 기분이 조금만 틀어지면 바로 다른 이의 말을 무시한 채 대답하지 않고 머저리 보는 듯한 눈빛을 돌려주고는 했다.
지금이 딱 그런 눈빛이었기 때문에 레이먼은 기가 막혔다. 답지 않게 쪼개며 걷고 있길래 불렀더니 기분 나쁜 기색을 하는 뱀 새끼가 어이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지금 율란의 호출에 의해 관리 부처 옆에 붙은 연무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예 근위대의 연무장을 장악한 것인지, 율란은 제 일터도 아니면서 근위대 대장의 집무실로 그들을 불렀다.
레이먼은 말없이 걷다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있어 루시안에게 물었다.
“새 새끼는 요즘 왜 그렇게 상태가 좋은 거지? 이 계절에는 원래 새들 따라 남녘으로 날아가고 싶다고 개지랄을 떨잖아.”
겨울이 되기 전 먹이를 많이 챙겨 먹고 남녘으로 향하고 싶다고 말했다가 매번 율란의 퇴짜를 맞는 지카리는 굴하지 않고 잠적했다.
가을부터 시작되는 토벌 대회를 불참하고 남녘으로 향하겠다는 지카리를 두고 율란은 쓸데없는 소리라 일축하고는 했다.
지카리 하나가 빠지면 정예군 2000명가량이 빠짐과 같으니 재고의 여지도 없는 부분이었다.
지카리는 늘 짝짓기 시즌이 심해지는 여름쯤에 우울의 극을 찍어 율란을 피해 다녔다. 율란은 그 때문에 애를 먹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공중을 선회하며 수장들에게 소집 회의가 있는 걸 알린 것이 아닌가.
“밀밭에 낱알을 잘못 먹은 거 아냐? 쥐약을 뿌려 둔 걸 먹었다거나.”
“검독수리가 왜 낱알을 먹습니까.”
루시안은 레이먼이 한심하다는 투로 대꾸하며 걸었다. 레이먼은 괜히 실실 말을 붙였다. 그에게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니키엘이 루시안의 페로몬을 묻히고 다니는 걸 마주친 적이 있었다. 레이먼은 비이성적으로 화가 끓어올랐었다.
그 때문에 평소 하던 생각을 가감 없이 내뱉었고, 니키엘의 서늘해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게 더 내 취향이었는데 말이지….’
냉엄하게 굳은 벽안으로 저를 바라보는 니키엘의 시선에 레이먼의 아랫배에 불이 붙는 느낌이었다.
독주를 삼킨 듯 속이 홧홧해지기도 했다. 이성을 차린 레이먼은 니키엘에게 정중하게 사과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 중이었지만.
‘뱀 새끼랑 붙어먹었나.’
그렇게 생각하자 이번에는 오장육부가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뱀의 가죽을 벗겨 죽인 뒤 니키엘을 볼트윅 공작 저택에 가둬 두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든 것이다.
‘가둬 둬? 가둬서 뭐 하게?’
니키엘처럼 천하의 쓸모없는 이를 가둔다고 해 봤자 자수를 시킬 것도 아니고 바구니를 엮게 할 것도 아닌데 가두긴 왜 가둔다는 말인가.
레이먼은 제 무의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뭐가 이상한지에 대해서는 딱히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먼은 생각을 포기하고 루시안을 향해 물었다.
“요즘 백합과는 회동이 잦나 봐?”
“…….”
루시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불쑥 튀어나온 뱀의 페로몬이 루시안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공격적인 페로몬이 옅게 느껴졌다.
‘내가 무슨 질문을 했다고 불쾌해할까….’
이쯤 되니 레이먼은 정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루시안이 니키엘의 몸 이곳저곳에 제 페로몬을 묻혀 영역 싸움하는 동물처럼 굴기 시작한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지금도 만나고 오는 길인가? 옅게 전하의 향유 향이 나는데.”
“말조심하십쇼.”
평소처럼 무시하거나 제 세계에 빠져 대꾸하지 않을 줄 알았던 루시안이 날 선 목소리로 대꾸하자 레이먼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뭔가 있구나 싶었다. 그 걸레가 또…. 니키엘에게 그런 언행에 대해 사과할 때는 언제고 레이먼은 또 한 번 니키엘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