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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61)화 (61/130)

61화

그러나 막상 나오니 갈 곳이 없었다. 사실 니키엘은 이 궁정에서 유일하게 할 일이 없는 고급 백수였기 때문이다.

검술 연습을 빼먹은 것이 마음에 걸려 율란을 찾아가 사죄할까도 생각했지만, 그가 여전히 토벌 대회 참여를 반대하고 있는 실정에서 멀쩡히 걷다가 쓰러졌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일지 불 보듯 훤했다.

‘그 꼴을 하고도 따라오겠다고? 전하께서는 비루먹은 말에게 먹일 최소한의 양심도 없으십니다.’

율란의 이죽거림이 생생하게 재생되는 것만 같았다. 니키엘은 너무 싫어 몸을 떨었다.

물론 소식이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지만 그는 그저 잠시 뚜껑을 덮어 두고 싶었다.

오늘은 왠지 누군가와 대거리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니키엘은 품 안에 품고 있던 설계서를 바라보았다. 어설프게 그린 선글라스 도안이었다.

“안경사는 아니지만 20년 동안 안경을 쓰고 살아온 경력으로 만든 설계서니까 나름 쓸 만하겠지.”

니키엘은 히죽 웃은 뒤 마법부 건물로 향했다. 루시안이 있기를 기대하며 말이다.

이틀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루시안에게 말해 음식을 얻고 물을 얻어 마실 계획이었다.

‘공복에 유산소는 근 손실 오는데.’

하룻밤 정도면 모르겠지만 이틀 내내 공복인 상태면 근 손실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왕자된 체면으로 가다가 멈춰서 풀을 뜯어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니키엘은 부지런히 걸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도착했을 거리가 유독 멀리 느껴졌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차근히 걸은 결과, 니키엘은 간신히 마법부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앞을 지키고 있는 경비원들이었다. 백금발에 벽안 자체가 니키엘의 신분패였지만 마법부 건물은 보안 기밀상 왕태자도 출입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한낱 막내 왕자인 신분으로는 넘기 힘든 문이었던 것이다. 그 생각은 하지 못했던 니키엘은 짐짓 뻔뻔한 얼굴로 경비병에게 말을 걸었다.

“수고가 많네.”

“니, 니키엘 전하-! 왕국의 충, 충실한 종, 게슈타프가 인사-.”

“됐어. 인사는 됐네. 나도 경들이 반가워.”

출입문 양쪽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바짝 긴장하여 허리를 바로 세우는 것을 보며 니키엘은 흠, 헛기침을 했다.

“그, 보안상 내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음은 아네만, 혹시 그렇다면 투르운 공작에게 내가 왔다는 말을 전해 줄 수 있겠나?”

“네…! 바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든 경비병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니키엘은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시안이 저를 반길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 뒤, 위쪽에서 소음이 들렸다. 니키엘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수리 위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향해 말이다.

건물의 가장 위층의 바로 아래층 창문을 통해 루시안이 니키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설탕 같은 백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머리를 내려 주오, 라푼젤…?’

루시안은 꼭 기다란 탑에 갇힌 공주가 저를 구하러 온 기사를 바라보는 열렬한 눈으로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인사도 없이 뚫어지게 보는 시선에 저도 멍청하게 위를 보고 있는 때였다. 루시안이 그대로 창문을 통해 뛰어내린 것이다.

“…공!”

놀란 니키엘이 소리침과 동시에 산들바람과 함께 루시안이 가뿐하게 니키엘이 서 있던 옆자리에 착지했다. 가볍고 우아한 동작이었다.

니키엘이 놀란 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무슨…?”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니키엘의 물음에도 대답하지 않은 루시안이 비교적 다급하게 물었다. 니키엘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소….”

“올라가시지요.”

대답을 듣자마자 루시안은 니키엘의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았다.

졸지에 품 안으로 빨려 들어간 니키엘이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무언가 그들의 몸을 가볍게 떠안아 루시안이 방금 뛰어내렸던 창문으로 그를 밀어 넣었다.

니키엘은 이게 마법인가 싶으면서도 너무 재미있어 한 번만 더 해 달라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그가 창문으로 안전하게 들어가자 루시안 역시 커다란 몸을 구긴 채 안으로 들어왔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게, 루시안은 살짝 상기된 얼굴이었다. 니키엘은 그가 그런 얼굴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나름의 추측을 해 보았다.

‘…점심으로 맛있는 스프가 나왔나?’

루시안은 니키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제 옷매무새를 정돈하더니 바람에 흩날린 머리카락 역시 정돈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니키엘의 머리카락도 정돈해 주었다. 그리고 뒤늦게 양해를 구하는 말이 뒤따랐다.

“실례.”

그 말에 니키엘이 피식 웃었다. 먼저 손을 뻗고 그 다음 실례라고 말하는 태도가 진중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던 루시안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시안은 그런 니키엘의 웃음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일전에 보았던 것처럼 루비 같은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니키엘은 어쩐지 간지러운 기분이 되어 웃음을 거뒀다. 그런 다음 입술을 말아 문 뒤, 천천히 말했다.

“음, 바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지난 이틀간 내 몸이 좋지 않았소.”

“미령하셨다는 전갈을 들었습니다. …병문안도 갔었구요. 침대 옆 콘솔에 둔 작약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니키엘은 그런 게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꽃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병문안과 꽃, 둘 모두 고맙소, 공. 그때 못한 이야기를 할까 하고….”

“안으로 드시지요.”

루시안은 초조한 기색으로 계단 위를 가리켰다. 니키엘은 한 층 더 올라가야 하는 건가 싶어 그를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어딘지 민망한 얼굴을 한 뒤 금세 표정을 지운 채 말했다.

“…눈이 좋지 않아 창문이 없는 방을 연구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 내가 온 것도 그 때문이오.”

니키엘은 잘 됐다 싶어 먼저 나선형의 계단을 올랐다. 뒤에 서 있던 루시안이 멈칫했다 따라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위층에 올라간 니키엘은 그가 당도한 곳이 오시니스의 국왕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마법부 장관의 연구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방 안의 어지러운 생김에 놀랐을 뿐.

‘깔끔하게 생겨서 연구실은 정돈이 안 되어 있네.’

머리는 무척 좋지만, 생활 전반에 있어 어딘가 나사 빠진 듯 행동하던 후배가 떠올랐다. 루시안도 그런 천재 타입인 듯했다.

니키엘은 루시안이 권하는 ‘소파였던 것’에 천천히 앉아 그가 차를 내려오려 하자 한마디 덧붙였다.

“먹을 것도 좀…. 일어나서 바로 왔더니 시장하오.”

“바로, 오셨다는 말씀입니까?”

루시안이 놀란 얼굴로 니키엘을 바라보았다. 그가 그렇게 격한 반응을 할 줄 몰랐던 니키엘은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금세 심각한 얼굴이 되더니 손을 공중에 움직였다. 그의 간단한 손동작으로 어디에 붙어 있던 건지도 몰랐던 찬장이 저절로 열렸다.

그곳에서 작은 크기에 무쇠솥이 절로 걸어 나와 화로에 제 몸을 얹었다. 곧이어 그 안에 물이 차오르더니 다른 찬장에서 소시지와 토마토, 샬롯과 육두구 등이 날아와 공중에서 저절로 잘라진 뒤 솥 안으로 들어갔다.

“…와.”

감탄한 니키엘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루시안이 또 한 번 약간 민망한 얼굴을 하더니 말했다.

“금세 스튜가 완성될 겁니다. 시장을 견디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스튜가 완성되는 시간이 가장 고대 되는 법이지. 그럼 그동안 이것 좀 봐 주었으면 하오.”

니키엘은 품 안에서 바로 도안을 꺼냈다.

도안에는 유리의 재료인 석영에 흑요석을 배합하여 검은 유리로 만든 뒤, 그 위를 얼석, 즉 니켈을 입혀 자외선을 차단할 수 있게끔 한 렌즈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 있었다.

안경테는 상아를 조각한 것으로 코받침과 안경다리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었다. 루시안은 천천히 도안을 읽어 본 뒤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의 귓등이 어쩐지 새빨갛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게 화롯불에 비춘 탓인 것 같기도 했다. 니키엘은 그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열었다.

“보면 알겠지만, 그걸 쓰면 마법 물약 없이도 햇빛 아래서 맨눈으로 다닐 수 있을 것이오. 만드는 건 순전히 공의 몫이지만은-.”

니키엘이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루시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니키엘에게 말했다. 손에 들린 도안이 살짝 구겨진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 끝이 힘을 준 나머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토벌 대회의 무도회.”

“…응?”

“춤 상대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문득 어딘지 모르게 간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루시안의 얼굴 때문이었다. 새빨갛게 변한 귓등이 화롯불에 비춘 탓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목덜미까지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 또한 화롯불처럼 일렁거렸다.

니키엘은 그의 눈빛에 묘한 열기가 저를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저절로 깨달았다.

때문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무도….”

그 말에, 루시안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니키엘은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꽃의 개화 장면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청초한 꽃망울이던 백색의 장미가 바깥 꽃잎부터 투욱 벌어지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순간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니키엘은 멍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아주 정중한 청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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