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60)화 (60/130)

60화

니키엘의 성격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니키엘은 싫어하는 사람은 무시하려고 애썼다. 그런 애를 쓰다 보면 정말로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하든 자연스레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미움에 에너지를 쏟지 않았다. 분노와 슬픔이 제 주인이 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며 살아왔다.

덕분에 니키엘은 레이먼의 태도에 툭 하고 전원이 꺼지듯 관심이 꺼졌다. 일그러졌던 표정이 급속도로 가라앉는 걸 바라보고 있던 레이먼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무언가 아주 소름끼치는 일이 일어난 것 같았는데 알 수가 없었다. 숨이 멎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레이먼은 차갑게 가라앉은 니키엘의 벽안을 내려다보았다.

아마빛 속눈썹이 차르르 떨리며 시선을 내려깐 벽안을 감쌌다. 다람쥐와 함께 맑게 웃고 있던 순수함은 그의 입꼬리에서 찾을 수가 없어졌다.

말린 장미 꽃잎을 으깨어 붓에 바른 뒤 뺨에 톡톡 친 듯 생기 있던 뺨에 냉엄한 기운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가 명랑한 어조로 말을 걸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콧날의 날카로움과 눈썹뼈가 주는 단호함이 어떠한 의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레이먼은 저도 모르게 짧게 탄성을 냈다. 그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니키엘의 행동이 더 빨랐다. 들고 있던 회나무 목검으로 레이먼의 팔뚝 옆을 꾹 밀어낸 것이다.

니키엘은 더없이 무감한 어투로 말했다.

“비키시오. 걸레는 이만 꺼져 줄 테니까.”

니키엘은 그대로 레이먼을 지나쳐 걸었다.

그때, 레이먼의 속 안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초조와 불안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 순식간에 꽃을 피워 냈다. 레이먼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저도 모르게 다시금 니키엘의 앞을 막고야 만 것이다.

“…실언, 하였습니다. 전하.”

그 말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은 갈 길을 갔다. 무시가 답이라고 느낀 상태에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어진 것이다.

레이먼이 그런 니키엘을 간청하듯 붙잡았다. 머뭇거리는 태도조차 갑자기 나타난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달구던 분노는 모두 가라앉은 뒤였다.

그가 초가을의 밤길에서 니키엘을 발견한 뒤로부터, 그의 마음속에서는 천 가지도 넘는 감정이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겪은 변화가 너무도 빠르고 다채로워 다 인식하지 못한 상태였다.

어느 누구 앞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았던 레이먼 볼트윅은 자신이 니키엘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도 잊은 채 말을 내뱉었다.

“깊이 사죄드립니다. 용서를 구해도 되겠습니까, 나의 전하시여.”

그 말만은 진심이었다. 레이먼은 지금 자신이 아주 볼품없는 사내처럼 행동했다는 걸 빠르게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아무런 관계도 아닌 상대에게 정조를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돌아볼 시간도 없이, 레이먼은 떠나는 니키엘을 붙잡기 바빴다. 잡은 손목을 통해 상당한 쾌감이 올라왔지만 그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니키엘의 안색을 살피기 바빴다.

니키엘은 그에게 덥석 잡힌 손목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나 이런 식으로 붙잡히네. 대체 이유가 뭐야.’

소설 속 세계에서 다시 눈뜬 뒤에 니키엘이 갖은 목표라고는 거창할 것이 없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에 따라 애먼 세계에 떨어진 불안과 초조에서 오는 공포와 번뇌들을 잊으려 노력했다. 오로지 운동을 통해서 말이다.

마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익히는 것도 즐거웠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 자신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안 들어. 하지만….’

오히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는 것이 더욱 불안했다.

지금 이대로 눈을 떴을 때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면 좋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부모님을 오래전 잃은 탓에 그곳에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기다리는 이가 걱정할까 봐 초조해지는 마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위기감은 있었다. 이대로 이곳에서 죽는다면, 자신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기억을 해 주는-.

“아-!”

거기까지 생각하던 니키엘은 갑작스레 머리를 짓이기는 듯한 두통에 무릎이 꺾였다.

“전하-!”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니키엘은 두통에 눈을 뜰 수도 없었다. 헛구역질이 몰려왔다. 아니 이미 위에 있던 것을 모두 토했는지도 모르겠다.

속이 뒤집히는 느낌과 함께 누군가 저를 붙잡았다.

단단한 품속이었다. 니키엘은 그대로 정신을 놓아 버렸다.

***

이건 꿈이다.

니키엘은 제 얼굴보다 큰 검은색 비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뱀의 것이라기에는 묘하고 도마뱀의 것이라기에는 크디컸다.

꼭 신화에 나오는 용의 비늘 같이 생겼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상했다. 신화에 나오는 용의 비늘이 대체 어떻게 생긴 건데?

그러나 니키엘에게는 그 생김이 완벽하게 떠올랐다. 저것이 용의 비늘이라는 확신도 있었다.

어둠에 잠긴 비늘들이 움직였다. 꼭 보름밤 달빛에 비춘 밤바다의 윤슬처럼 일렁거렸다. 니키엘은 숨을 삼켰다.

저 멀리서 빌어먹을 태양이 뜨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 보는 목소리가 그런 니키엘을 비웃으며 속삭였다.

네 이름은 니키엘 오시니스다.

네 이름은 니키엘 오시니스다.

네 이름은 니키엘 오시니스다.

아니야. 내 진짜 이름은 -고 나는…. 난…. 머릿속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것 봐, 기억나는 것이 없지? 너는 니키엘 오시니스이다. 다른 어떤 이름도 네 무덤에 쓰이지 못할 것이다.

그때 익숙한 다른 목소리가 니키엘의 등을 밀어내듯 말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그대는 참 겁이 없어. 물론 그대의 짐승은 그대의 그런 점까지 사랑해 마지않지만 말이지.

누군가 니키엘의 뺨에 입을 맞췄다. 애정이 가득 든 입맞춤이었다.

그러나 니키엘은 도리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목소리가 다시금 속삭였다.

얼굴 보니까 좋긴 한데, 다시는 무모하게 이 아래까지 내려오지 마. 또 한 번 이런 짓을 하면 이 무저갱 속에서 내 알을 낳아 주겠다는 말로 바꿔 듣겠어.

장난스레 말한 목소리가 니키엘을 떠밀었다. 니키엘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에 비명을 질렀다.

아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느낌이기도 했다.

“헉-!”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니키엘은 숨을 몰아쉬었다. 강렬한 기억이 악몽처럼 니키엘에게 달라붙어있었다. 그는 그의 기억이 시키는 대로  천천히 조음했다.

“나시우 오시니스….”

“전하-!”

그리고 그때, 폴이 침실의 문을 열며 들어왔다. 깨어난 니키엘을 보고 울먹거리는 얼굴을 한 채 말이다.

폴은 니키엘이 바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뛰쳐나가, ‘전하께오서 깨어나셨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아마 의원을 부른 듯했다. 니키엘은 미약한 두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폴을 바라보았다.

폴이 한층 더 울먹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꼬박 이틀을 누워 계셨어요!”

“…내가?”

아직 현실감이 돌아오지 않아 멍하게 중얼거리자, 폴이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신 뒤 조심스레 물었다.

“…저, 전하. 혹시 제가 누구지요? 제 이름이 펄, 풀, 팔 중에 무엇인지요…?”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폴이잖아.”

니키엘이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쳐다보자 폴이 두 손을 맞잡은 채 하늘을 향해 경배했다.

“오, 솔리우스시여 감사합니다! 저는 전하께서 또 전처럼 기억을 잃고 원래의 전하로 돌아가신 건 아닐까 하고….”

…어지간히 진짜 니키엘 밑에서 일하기가 싫은가 보군. 니키엘은 고개를 절레 젓고는 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틀 전, 레이먼 공작께서 전하를 업은 채 왕자궁으로 들어오셨어요. 풀숲에서 쓰러지셨다는데, 그러게 훈련은 저와 함께 마차로 가자고 했잖아요!”

“…아아.”

그 말을 듣자마자 레이먼이 놀란 얼굴로 저를 붙잡던 모습이 떠올랐다.

…놀랐겠네. 니키엘은 약간 민망하여 뺨을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볼트윅 공작가로 감사의 서신을 보내. 덕분에 잘 깨어났다고.”

“안 그래도 전하께서 깨어나셨다는 말에 내내 기다리고 있던 공작가의 전령이 방금 출발했습니다.”

“뭐? 전령? 아니, 대체 언제-.”

니키엘은 그제야 폴이 소리친 것이 의원을 부른 것이 아닌 공작가의 전령을 향한 것임을 깨달았다.

폴의 설명에 의하면, 전령은 지난 이틀간 교대로 왕자궁에 머물며 그가 일어나기만 하면 바로 공작가로 소식을 들고 출발한 채비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잦아들던 두통이 다시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어휴, 저 웬수. 니키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 좋아. 알겠으니까 먹을 걸 좀 가져 와.”

“예예, 전하. 시장하시지요?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폴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니키엘은 앉은 상태에서 고개를 쑥 빼 폴이 사라지는 걸 보다가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 보기 불편한데 전령은 왜 여기서 먹이고 재운 거야. 또 무슨 개같은 말을 지껄이려고.”

레이먼이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와봤자, 이번에도, ‘걸레 주제에 자주 아프시군요, 비실 걸레군요.’, 하는 빈정거림만 쏟아 낼 것이다.

정말 문란하게 살았다면 도리어 억울할 것이 없었을 니키엘로서는 이제 막 일어난 참에 레이먼의 잘난 낯짝을 견디고 싶지도 않았다.

때문에 니키엘은 도주를 감행했다. 왕자궁에는 시종이 별로 없는 편이었고, 그동안 무도회에 입을 옷들을 수선하라 수선을 피우는 폴을 피해 도피해 온 니키엘로서는 탈출이 쉬웠다.

그렇게 니키엘은 늘 그렇듯 또 한 번 왕자궁에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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