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어어, 도토리 모으는 중이구나? 맛있어? 나도 도토리묵 좋아하는데. 등산 다녀와서 도토리묵 무침에 막걸리 한 사발 하면 기분도 좋고…. 운동 후 음주는 수분 손실로 이어지지만 그래도 맛있으니까…. 나? 나야 뭐 우리 학교 뒷산 좋아했지. 관악산이라고. 산세가 약간 험하긴 한데 요즘은 다 둘레길도 있고….”
니키엘은 제 어깨 위에 다람쥐 한 마리를 태운 채 회나무 목검으로 들풀들을 툭툭 치며 걸었다.
학식과 정신 연령에 맞지 않게, 자연 속의 니키엘은 약간 초등학생처럼 순수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동물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깨끗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본인은 이런 점을 자각하지 못해, 옆자리 친구에게 말을 걸듯 다람쥐에게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종알거리며 걷던 니키엘은 그런 자신을 누군가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간만에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난 기분으로 시시콜콜한 얘기를 떠들 뿐이었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레이먼 볼트윅은 곧 있을 마물 토벌 대회를 준비하며 사냥부에서 해야 할 것들을 채비시킨 뒤, 왕궁 숲이 밤에도 안전할 수 있도록 자신의 동물 페로몬을 나무 등에 묻히고 올 계획이었다.
거대한 순록이 지키는 왕궁 뒤쪽 숲을 쳐들어올 간 큰 마물은 없지만, 지난번 사태를 생각하면 방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가 건재하다는 표식으로 목덜미에서 나오는 수컷 순록의 페로몬을 묻혀 두면 토벌 대회에 떠나있는 동안에도 왕궁의 숲은 안전할 것이다. 마물이 자주 태어나는 해질녘에 숲으로 향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그런 와중, 니키엘이 연무장으로 향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근래에 율란 발트에게 검술을 배우고 있다 했지.’
수하의 보고서에 의하면 니키엘은 토벌 대회에 갈 결심을 굳힌 듯했다.
그의 토벌 대회 참가를 반대하던 율란이 어떻게 마음을 바꿨는지를 알 수 없었지만 레이먼에게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은 신탁이 내려온 대로 행동해야 토벌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신력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신탁을 위배했을 시, 법황은 축성 기도를 해 주지 않을 것이고 축성 기도를 받지 못한 토벌 대회 참가 기사들은 후미부터 빠르게 마물들의 공격을 받게 된다.
물론 니키엘이 토벌 대회에 참가하는 위험성도 크지만, 일단 신력으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이 중요했다.
레이먼은 제 부탁을 들어준 것인지 알 수 없는 니키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니키엘은 레이먼이 제 뒤를 쫓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흥얼거리듯 다람쥐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니, 나눠 먹어야지. 그리고 겨울이면 체온이 떨어지니까 서로 같은 굴에서 꼭 껴안고 겨울잠을 자도록 해. 응? 웬수 같은 놈이랑 어떻게 껴안냐고? 목숨이 달렸는데 자존심이 중요해? 그냥 껴안고 자. 괜히 얼어 죽으면 어떡하려고, 용감하게 살지 마.”
다람쥐에게 하는 말치고는 심오한 내용이었다. 니키엘은 한동안 더 다람쥐에게 잔소리를 했다.
많이 먹어 둬 지방을 찌우라는 둥, 남의 밤나무는 노리지 말라는 둥, 그러고 보니 검독수리 한 마리를 보지 못했냐는 둥, 그 검독수리에게 먹이를 많이 주었으니 너희들은 노리지 않을 거라는 위로도 함께였다.
레이먼의 미간이 살며시 구겨졌다.
‘저게 대체 무슨 대화야.’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니키엘의 어깨에 타고 있던 다람쥐가 그를 돌아보았다.
“…….”
“…….”
다람쥐와 레이먼의 시선은 공중에서 부딪쳤다. 둘은 짧게 침묵하였으나, 그다음 레이먼은 아주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다람쥐가 레이먼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니키엘의 목덜미와 귓불 등에 머리를 들이밀고는 비비적거렸기 때문이다.
‘저 하찮은 미물이 지금….’
레이먼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왠지 모르게 다람쥐에게 무시당하고 있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는 이런 거 못하지?’하고 뻐기는 느낌이었다. 레이먼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떠다녔지만, 가슴은 착실하게 열 받고 있는 중이었다. 왜 화가 나는 건지 깨닫지도 못한 채 말이다.
레이먼은 미간을 찌푸렸다. 작은 동물은 꼬리를 쫑긋거렸다. 니키엘이 하하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간지러워,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알겠어. 나중에 궁으로 놀러 와, 대추야자도 있고 밤도 있어. 친구들 다 데려와도 돼.”
다람쥐의 뻐김이 더욱 심해졌다. 마치, ‘너는 초대받은 적 없지?’ 하고 말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바람을 타고 떠밀려 오는 냄새에 레이먼은 아까와 비교할 것도 없이 분노에 치받았다.
거대한 순록이 분노하여 짙은 페로몬을 내뱉기 시작하자 놀란 다람쥐의 털이 쫑긋 서더니 금세 니키엘의 어깨를 박차며 도망쳤다.
“엇, 친구야, 왜 그래!”
갑작스러운 다람쥐에 도망에 놀란 니키엘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바람에 제 뒤에 서 있던 레이먼을 그제야 발견한 것이다.
니키엘은 놀라 잠깐 흠칫 했다가 입을 열었다.
“…볼트윅 공?”
니키엘의 인사에 레이먼이 싱긋 웃었다. 봄바람을 문 듯 달큼한 미소였는데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니키엘은 분노하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야,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와서 저렇게 화난 표정을 짓고 있어…?’
보통 다른 사람들은 대개 레이먼의 그런 표정을 보고도 그가 화났음을 짐작하지 못했다. 늘 그랬듯이 레이먼의 미소는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 미소 뒷면에 숨겨진 그의 새파란 불꽃같은 분노를 아주 손쉽게 읽어 낼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매우 화가 나있는 참이었고, 그 분노의 화살은 정확히 니키엘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니키엘은 그 분노를 자신이 느낄 수 있다는 걸 특별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것은 레이먼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그것이 갖는 의의를 알지 못 하고 있는 상태였다.
니키엘은 레이먼의 미소에 가려지지 않는 분노를 꿰뚫고도 그것이 다른 이는 읽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몰랐고, 레이먼은 니키엘이 제 분노를 정확히 읽어 낸 것을 몰랐다.
이 밤에는 아직 서로에게 도달하지 못한 것이었다.
때문에 레이먼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니키엘에게 인사했다.
“전하의 충실한 신, 레이먼 볼트윅이 인사드립니다.
그가 건넨 것은 완벽한 궁정식 인사였다. 니키엘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화답할 수밖에 없는 완벽함이었다.
“…좋은 밤이오, 공작.”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려던 것을 멈추고 레이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죽여주게 달큼해 보이는 미소는 그대로였다.
그가 그렇게 웃을수록 니키엘이 느끼고 있는 것은 공포뿐이었지만 말이다.
‘진짜 무섭다. 왜 저렇게 웃어?’
니키엘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상관없다는 듯, 레이먼이 니키엘에게로 성큼 다가와 물었다.
“요즘에는 뱀 새끼와 친하게 지내시는 모양이군요?”
그 물음에 니키엘의 벽안에 짧은 의문이 떴다 이내 명료해졌다. 아마 루시안을 말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지? 니키엘이 입을 열었다.
“공이 그걸 어찌 아오?”
“왜냐면, 씨발, 전하의 온몸에 뱀 냄새가 덕지덕지 묻어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이니까요.”
니키엘은 잠시 멍해졌다. 여전히 사근거리는 말투, 여전히 친절해 보이는 미소였는데도 불구하고 중간에 끼워져 있는 욕설이 놀랍도록 빠르게 청각 기관을 강타한 탓이었다.
“…방금 공께서 내게 씨발, 이라고….”
“묻는 말에나 대답하셨으면 합니다. 뱀과 만나셨습니까?”
이번에도 아주 정중한 어조였다. 말 자체가 불손하기 그지없을 뿐이지.
평소 니키엘의 성격이라면 이 새끼 뭐지? 하고 반감부터 들었을 텐데, 그 박력에 밀려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레이먼에게서 제 영역이 짓밟힌 것에 분노한 거대한 순록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이 니키엘을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짐승과 유독 친한 니키엘은 말이 통하지 않는 그들과 오감으로 소통이 가능했다.
개중에는 동물들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의 후각 자극도 있었다. 그들이 슬픈지 기쁜지 후각을 통해 느끼는 것이다.
선천적으로 발달한 니키엘의 후각은 동물들의 감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문제는 니키엘이 이 사실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때문에 니키엘은 숨을 멈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레이먼의 페로몬 향을 들이 마시고 있었다.
짙은 페로몬이 폐부를 적셨다. 순록이 분노하는 것은 제 영역에 들어온 낯선 침입자가 묻혀 놓은 페로몬 때문이었다. 니키엘은 그 영역이라는 것이 자신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그것은 레이먼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왜 이렇게 열이 뻗치지.’
온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는 구렁이새끼(루시안은 독을 가진 뱀이라 구렁이가 아니었다)의 페로몬이 역겨울 정도였다.
그것도 열렬한 구애에서 나오는 페로몬이 아니었다. 이것은 수컷 뱀이 구애 성공 뒤 뱀 굴에서 교미를 할 때 나오는 페로몬의 향이었다.
니키엘의 어깨와 가슴팍, 허벅지 앞면에 묻어 있는 걸로 보아 접촉이 있다는 뜻인데 도대체 어떻게 행동하면 독뱀 주제에 세상사 관심 없다는 듯 구렁이처럼 살아가는 루시안에게 이런 페로몬이 묻어올 수 있나 싶어졌다.
“마음에 드나 했더니 또 걸레짓을 하고 돌아다녔군.”
그렇게 생각하니 그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내 멍하니 있던 니키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나 했는데 이제는 아예 쫓아와 멸시하는구나 싶어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