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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58)화 (58/130)

58화

그 수가 몇 되지 않았으나, 황금과 두뇌를 두루 갖춘 루시안에게는 바로 일어설 수 있는 훌륭한 재원들이었다.

그렇게 루시안은 투르운 가문에 완전히 또아리를 튼 거대한 뱀이 되었다.

무서운 얘기였다. 자신의 비밀을 적에게 노출한 뒤, 그들의 시체와 비밀을 한 땅에 묻어 버린 대범함을 두고도 청초한 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니.

니키엘은 그 간극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에게 제가 알고 있다는 단서를 주지 않으려 말을 고심했다.

“음, 아니…. 사람들이 모두 공이야말로 이 시대의 천재라고 하니까.”

뜬금없는 칭찬에 루시안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니키엘이 보기에 그 표정은 ‘왜 갑자기 친한 척 칭찬이야?’ 하는 뜻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루시안이 생각하고 있는 건 다른 것이었다.

니키엘의 입술 사이로 저에 대한 칭찬이 나온 순간, 루시안은 짧게 전율했다. 루시안은 그것이 제 수컷으로서의 만족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짝짓기 상대인 뱀에게 인정받은 수컷 뱀의 뿌듯함이라는 걸 말이다.

‘대체 왜 이런 감정이….’

게다가 아까부터 자꾸만 짝짓기를 앞둔 뱀의 페로몬이 제게서 흘러나왔다. 그는 당황스러웠다. 어떤 여인을 봐도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루시안이 놀란 것은 여러 가지의 이유에서였다. 첫째, 니키엘을 자신의 짝짓기 상대로 규정짓고 있는 제 안의 짐승을 깨달은 점. 둘째,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고작 말 몇 마디로 전율할 정도로 단순한 수컷의 본능이 살고 있다는 점. 셋째, 제 칭찬이 흘러나온 니키엘의 입술이 미치도록 예뻐 보인다는 점이었다.

‘앞니로 살짝 물면 그대로 살캉거릴 것 같은데….’

베어 물면 달큼한 즙이 나올 것만 같은 입술이었다. 보고 있자니 자꾸 넋을 잃게 되어 루시안은 겨우 시선을 돌렸다.

그런 생각까지 드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정력의 상징인 뱀으로 화하는 루시안은 역설적이게도 그동안 자신을 두고 무성욕자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내린 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욕정이 일어 본 적이 없었다. 여성도 남성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수장들도 비슷한 것 같긴 했지만 루시안은 유달리 더욱 욕구가 없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에의 흥분하는 이상 성욕자도 아니었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귀부인을 보아도, 조각처럼 생겼다는 영식을 보아도 떨리지 않는 마음과 들지 않는 욕구에 자연스레 자신을 무성욕자로 생각했었다.

심지어 왕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니키엘조차 루시안의 마음을 떨리게 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전의 니키엘’은 말이다.

그런데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속을 알 수 없는 저에 대한 칭찬 몇 마디만으로 니키엘은 너무도 간단히 루시안에게 수컷으로서의 만족감을 선사했다.

‘이런 바보 같은….’

그러한 깨달음에 의해 루시안의 얼굴이 다시 한번 붉어졌다. 열이 올라 빨개진 귓등을 가릴 새도 없었지만, 눈치가 빠른데도 유독 둔한 구석이 있는 니키엘은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혹시 석영과 흑요석, 얼석1)을 일정 배율로 혼합할 수 있겠소?”

그리고 이제 막 상대에게 빠진 모든 수컷이 어리석듯, 당대 최고의 마법학자, 가명으로 낸 연금술학 논문이 학계에 최고 권위를 인정받은 젊은 천재 학자 루시안은 니키엘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제 마음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루시안을 생각하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그의 성격과는 억 광년이 떨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루시안은 니키엘에게 빠진 자신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자신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금속을 일정 비율로 배합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못할 것도 아니었다. 루시안의 빠른 응답에 니키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많이 웃어 주지도 않았는데 또 한 번 만족감이 노도처럼 밀려와 루시안을 적셨다. 해변가에 서 있다가 갑작스러운 파도에 젖어 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있던 루시안은 뒤늦게 왜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건 무슨 연유로 물으십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물건이 있어서…. 설계도를 가져다 줄 테니 공께서 금속들을 배합해 줬으면 하는데…. 사례비는 드릴 테니까-.”

“제 연구소로 내일 오전까지 오시면 됩니다.”

니키엘은 딱딱한 얼굴로 빠르게 말하는 루시안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적극적인 태도라 대체 어디서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냐고 물으면 대답해 줄 말이 없었던 니키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소. 그럼 내일 아침에 보겠소.”

책은 빼앗겼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니키엘이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려던 때였다. 루시안이 한 번 더 니키엘의 팔목을 붙잡았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니키엘은 그 말에 붙잡힌 제 팔목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접촉을 피하던 거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잡힌 팔목을 향하자 루시안이 놀란 듯 손을 떼어 내고는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지야. 그리고 내가 세 살 난 어린애도 아닌데 설마 내 궁도 찾아가지 못할까. 강렬한 햇빛이 공에게는 좋지 못할 테니 신세 지고 싶지 않소.”

그 말에는 루시안도 멈칫했다. 강경하게 말하는 니키엘에게, 내가 괜찮다니까? 하고 박력 있게 말할 만한 자기 확신이 부족한 탓이었다.

애초에 루시안은 오늘 너무도 저답지 않은 짓들을 많이 하고 있었다. 루시안이 천천히 잡고 있던 니키엘의 손목을 놓았다.

뱀의 꼬리가 그의 손목을 감았다 놓는 것처럼 서서히 스르륵 놓아주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서로의 손가락이 살짝 엉겼다가 떨어졌다.

그게 약간 이상한 느낌을 들게 해 움칠 떨었지만, 니키엘은 계획대로 등을 돌렸다.

책을 빼앗기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가 나쁘지 않으니 나중에라도 몰래 보여 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루시안에게 금속을 배합해 달라는 이유가 있다고. 그걸 깨달으면 루시안도 내 부탁을 마냥 거절하지는 못할걸.’

니키엘은 도서관에서 외부로 향하는 복도의 대리석을 밟아 나가며 작게 키득거렸다.

그의 등 뒤에 시선이 진득하게 붙어 있는 건 모른 채로 말이다.

***

“올해 춤 상대는 어떻게 하시기로 하셨습니까?”

소파에 드러누워 마물 관련 서적을 읽으며 배를 긁고 있던 니키엘은, 폴의 물음에 어엉? 하고 멍청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도회 춤 상대 말입니다.”

폴은 니키엘이 기억 못할 줄 알았다는 듯이 짧게 한숨 쉬며 대답했다. 니키엘은 두 눈을 깜빡였다.

“춤 상대가 필요해?”

“작년까지는 마음 맞는 분과 함께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해는 그럴 기회가 없으셨으니…. 혹시 네 가문 수장분들과 무슨 이야기가 되어 있으신가 해서요.”

부쩍 쌀쌀해진 가을밤을 위해 조금 더 두꺼운 천의 커튼을 달고 있던 폴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니키엘은 다시금 배를 긁적였다.

마음 맞는 분과 함께 했다는 얘기는 난봉꾼인 진짜 니키엘의 그 당시 연애 상대를 데리고 갔다는 말 같았다. 올해는 기억을 잃는 바람에 그럴 기회가 없었다는 설명이었다.

춤 상대가 있어야 하나?

자신이 무도회 춤을 출 수 있는지도 모르는데 춤 상대라니. 너무도 비현실적인 말이었다. 흠, 하고 목을 울리던 니키엘이 바로 앉아 고민했다.

그러다가 폴에게 물었다.

“혼자 들어가면 안 되나?”

“…공개적인 망신입니다요.”

그러나 진짜 니키엘은 비공개적인 망신을 꾸준히 당해 왔는데 공개적으로 한 번 더 당해도 뭔가 달라질 것이 있을까.

니키엘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춤 상대라니.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네 명의 수장들도 각자의 상대를 대동하는 건가?”

“그건 아니에요. 일반적으로 수장님들의 파트너는 전하, 단 한 분뿐이니까요. 전하께오서 다른 상대와 함께 무도회장에 들어오실 수는 있어도 수장님들께서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썩어도 준치라고, 심지어 대공보다는 서열도 낮은 막내 왕자지만 왕족을 예비 혼약자로 둔 상태에서 다른 상대와 함께 공식적인 자리에 참가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니키엘은 다시 벌러덩 누워 버렸다. 아무나 시간 비는 놈에게 요청하여 그러겠노라 하는 놈과 입장하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급할 것 없다고 생각하며, 니키엘은 폴이 가져다 준 대추야자를 베어 물며 과즙에 젖은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튜닉에 문지른 뒤 다시금 책장을 넘겼다.

운동과 책을 보는 것 외에는 게을러지는 니키엘을 흘끗 본 폴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왕자의 최측근으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니키엘의 검술 수업이 다시금 시작되었다.

편안한 튜닉과 브레로 갈아입은 니키엘은 어느새 친해진 회나무로 만든 목검을 휭휭 휘두르며 왕자궁을 나와 쭐레쭐레 연무장을 향해 걸었다.

첫 방문 이후로는 마차를 타지 않고 산책하듯 걸었다. 짧은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니키엘은 걷는 것을 더 선호했다.

연무장으로 향하는 숲길을 지나다보면 다람쥐들과 토끼, 새들이 따라오며 지저귀고는 했기 때문이다. 꼭 자신이 *즈니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작은 동물들과 쓸데없는 대화를 하며 걷는 것이 니키엘에게 새로 생긴 취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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