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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말고 구혼 (57)화 (57/130)

57화

갑작스러운 빈맥성 부정맥을 앓기라도 하는 걸까? 니키엘은 루시안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약간 병약캐였던 것 같은데….’

천재 마법사인 루시안은 광룡의 저주로 인해 뱀으로 변하는 저주에 걸렸는데, 불행한 점은 이 뱀독이 혈관을 타고 흘러 인간의 신체로 변한 상태에서는 늘 몸이 골골거린다는 것이었다.

이세계에 백발과 흰 피부, 붉은 눈동자를 지칭하는 용어가 따로 없는 듯하지만 니키엘은 루시안이 알비노임을 알 수 있었다.

알비노 유전병을 앓고 있는 이들이 선천적으로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는 것에 더하여 광룡의 저주 때문에 항상 혈관에 뱀독이 돌아다니니, 루시안 역시 늘 골골거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광룡의 저주가 루시안의 신체를 뼈대가 굵고 근골격계가 훌륭해지게끔 성장시켰다.

덕분에 잔병치레는 없는 듯했지만, 간혹 한 번씩 니키엘처럼 각혈하고는 했다. 적어도 원작에서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세계의 루시안도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여기서도 알비노인 걸 보면 원작 설정을 따라간다는 건데…. 하긴 근력이 강한 것과 건강한 건 다른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그가 제 손목을 낚아챘을 때 느꼈던 어마어마한 힘을 떠올리며 니키엘은 루시안의 안색을 살폈다.

뱀독 때문에 부정맥이라도 온 것이면 심폐 소생술을 해야 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과호흡 증상인 것 같지도 않아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참이었다.

루시안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니키엘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도 내린 채였다.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그 틈을 타 니키엘이 재빨리 서고 밖으로 나가려던 때였다.

그의 허리를 휙 낚아챈 루시안이 이번에도 니키엘을 끌어안다시피 하여 그의 등 뒤에 꽂혀 있던 책을 잡아 뽑은 것이다.

“앗-!”

“…이 책은 압수입니다, 전하.”

여전히 붉은 안색으로, 루시안이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루비를 닮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열기를 품고 니키엘을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니키엘로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왜 저렇게 일주일 굶은 사람이 저녁 정찬이 차려진 테이블을 바라보듯 보는 거지…? …그러고 보니 보아 뱀 같은 것들은 사람도 먹을 수 있잖아…. 나를 저녁거리쯤으로 여기는 건가?’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세계에 식인 문화가 있다는 점은 듣지 못했는데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어딘가 문헌을 찾아보면 광룡의 저주에 미친 수장 중 하나가 왕족을 잡아먹고 해주하려 들었다는 미친 기록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니키엘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나는 보기보다 맛이 없네.”

“무슨 말씀을? 되었으니 이제 그만 이곳에서 나가 보시길 바랍니다, 전하.”

루시안은 그 사이에 제 안색을 되찾았다. 어서 나가라는 듯 책으로 니키엘의 등을 푹 찌르기까지 했다. 그 무례한 태도가 저에게 닿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는 율란이나 레이먼과 비슷하여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았는데…. 착각인가.’

어쨌든 책까지 빼앗기고 그 책으로 등을 푹 찔렸으니 기분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니키엘은 끈질긴 성격이었다. 마음먹은 것은 해내고야 마는 지독한 구석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니키엘은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약속하며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소, 알겠데두. 나 원 참, 간만에 독서 좀 해보려고 했는데 이렇게 가로막혀서야. 공의 사재로 산 책도 아니면서 이렇게 아끼다니, 어이가 없군!”

“…….”

루시안은 니키엘의 투덜거림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고를 먼저 나서는 니키엘을 따라 밀폐 서고를 나왔다.

밀폐 서고 안쪽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 촛불이 켜져 있었는데, 책장 밖으로 나오자마자 햇빛이 창을 통해 쏟아졌다.

도서관의 책들을 위해 일조량을 제한하고 있는 서고임에도 갑작스러운 자연광에 니키엘이 살짝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뒤따라 나온 루시안이 책장을 더듬거리며 조심히 걷고 있었다.

“…….”

니키엘은 그를 돌아보고는 문득 깨달았다. 루시안의 눈이 햇빛에 약할 거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을 말이다.

멜라닌 색소가 없는 그의 루비 같은 눈동자는 자외선에 취약할 것이다. 루시안은 눈이 좋지 않아 창문이 없는 방에 칩거하다 보니 폐가 좋지 않아 기침이 잦은 편이기도 했다.

원작에도 나와 있는 설정들을 떠올린 니키엘은 약간 머쓱해졌다.

뿔이 난 상태라 그를 두고 가 버리려고 했던 니키엘은 가만히 루시안이 빛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루시안 역시 더듬거리던 팔을 내려놓고 정자세로 걷기 시작했다. 니키엘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그…. 오늘은 햇빛이 강한데 어떻게 외출하였소?”

뜬금없는 물음을 들었다는 듯, 루시안이 백설 같이 희고 고운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답했다.

“직접 제조한 마법 물약이 있습니다. 그걸 넣으면 한낮에도 잠시 동안은 야외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군.”

루시안은 무언가를 골몰하는 니키엘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그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한 채였다.

아마빛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청명한 벽안이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루시안은 하마터면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물어볼 뻔했다.

니키엘이 눈치 못 채고 있는 사이, 그가 숨기고 있던 책을 받아 책장에 무사하게 꽂아 넣은 뒤 밀폐 서고를 여는 책장에 간단한 폐쇄 마법까지 걸어 두었으니 제 볼일은 거기서 끝인데 어쩐지 자리를 뜰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혼자 오셨으니 왕자궁까지 호위가 필요할지도 모르고.’

언제부터 니키엘의 호위 따위를 신경 썼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루시안은 그런 모순에는 집중하지 않은 채 팔짱을 낀 채 저 혼자의 생각에 집중하고 있는 니키엘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루시안이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여름의 아찔함을 그대로 담은 빨간 장미 꽃잎을 입술 사이에 물었다가 그 빛깔을 그대로 간직한 듯 오동통한 입술이, 루시안의 애를 그만 태우겠다는 듯 달싹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루시안은 니키엘이 그 침묵을 직접 깨겠다는 듯 말을 시작하려 하는 것에 저 자신이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 채 숨죽여 그 말을 경청하려는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기대에 부응하듯, 니키엘이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공께서는 금속의 배합에 무척 능하시지 않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루시안은 수려한 미간을 좁혔다. 니키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루시안의 전공은 마법학과 연금술이었다. 비슷한 학문이라도 마법사들과 연금술사들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그러나 루시안은 두 학문에 아주 능통했다.

문제는 니키엘이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니키엘은 루시안의 좁혀진 미간을 슬쩍 바라보고는 속으로만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이 놈의 오지랖…. 루시안한테 내가 알고 있다는 걸 티 내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원작을 읽은 니키엘은 루시안이 어떻게 역심을 품은 가신들을 어린 나이에 장악할 수 있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마법에 있어서 천재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루시안은 연금술을 독학하여 광물에 대한 해박한 이해도를 갖고 있었다. 그래봤자 주기율표를 거꾸로도 외울 수 있는 현대인 니키엘에게는 못 미치지만 가히 서대륙 최고의 연금술사라고 자칭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루시안은 이런 점을 이용하여 어느 정도 머리가 커진 다음, 역심을 품은 가신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 앞에서 구리로 황금을 주조하는 것을 성공시킨다.

그때까지 루시안은 그저 방계 출신 공작의 소생으로, 자신들의 아이를 다음 대 투르운 공작에 올릴 생각만 하고 있던 방계 귀족들과 가신들이 저들끼리 싸우느라 잠시 자리에 앉혀 둔 인형일 뿐이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루시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모한 것이다.

그는 모두의 앞에서 능력을 선보인 다음, 제게 충성을 맹세한 순으로 그의 자택에 황금을 실은 수레를 보냈다.

금으로 그들을 지배하고자 함이었다. 하루아침에 루시안은 허수아비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때도 루시안은 아직 온전한 성인의 육체가 아니었다.

그는 가신들에게 아부를 하듯 황금을 준 뒤, 그들 사이를 이간질하기 시작했다.

‘A가신이 B백작의 흉을 보며, 저에게 B백작보다 충성할 터이니 황금 1000억 킬리어치를 요구했다.’

‘B백작이 A가신은 역심을 품었으니, 이를 밀고한 자신에게 황금 1500억 킬리 어치를 하사하길 바란다고 했다.’

순진한 두 눈동자를 깜빡이며 뱀이 속삭인 말들은, 가신들과 방계 귀족들은 그들의 주인이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며 뱀의 혓바닥이 두 갈레로 갈라져 있음을 깨닫지 못 하였다.

그렇게 루시안은 저들끼리 치고 박느라 바쁜 쭉정이들 사이에서 성장하여, 자신의 사재로 기록된 볼품없는 야산 하나를 황금이 나는 광산으로 둔갑시킨 뒤 왕의 인가를 받고 직접 주조한 황금의 1할을 세금으로 바친 뒤 대부호로 거듭났다.

그 후 루시안은 제가 연금술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가신들이 저들끼리 싸우다 죽어 버리면 살아남은 상대에게는 암살자를 보내 처치했다.

그렇게 굵직한 숙청 작업 끝에 투르운 가문에 남은 것은 역심에는 관심 없던 한미한 가문들이나, 기본적으로 공작가에 충정심을 갖고 있던 귀족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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