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그의 금안이 여러 가지 것들을 훑었다. 헤집어지고 있는 바구니, 난감한 얼굴을 한 자신의 가신 베네딕, 그리고 차분한 얼굴로 서 있는 니키엘까지.
금색에는 여러 가지의 것이 있다.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태양도 그러하고 사금을 녹여 순도 높게 주조한 금도 그러하다.
율란의 것은 후자에 가까웠다. 찬란하게 빛나는 것은 전자든 후자든 동일하나, 율란의 것은 금속의 차가운 성질을 지닌 빛에 가까웠다.
냉엄해 보이는 눈동자가 차례대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훑자 모두들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오로지 단 한 명, 니키엘 오시니스를 제외하면 말이다.
율란이 쯧, 혀를 차며 말했다.
“음식? 갖은 짓거리를 다 하는군. 전하께오서 재작년 제게 먹인 개의 발정제로는 성에 안 차셨나 봅니다.”
니키엘은 그렇게 말하는 율란을 가만히 보았다. 율란은 예의 그 심드렁한 무표정이었다.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얼굴.
짧은 한숨이 나왔다. 첫술에 배부를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생각 보다 타격이 있는 편이었다.
게다가 니키엘은 베네딕의 말에 제가 직접 음식들을 기미 하겠다고 말했으면서도 어쩐지 율란이 보면 이 황당한 사태를 종식시켜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식으로 짜증이 날 리가 있나.’
화가 나는 건 아닌데 살짝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었다. 바구니 안에는 기사단원의 수색으로 인해 심하게 헤집어진 음식물들이 가득했다.
어렸을 때부터 밥을 신성시하라고 교육받는 한국에서 나고 자란 니키엘에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게다가 주방장 벤디의 노고를 생각하면 더더욱.
음식을 기미 하겠다고 먼저 나선 이유도 더 이상의 수색으로 음식의 모양이 흐트러질까 봐 저어되어서였다.
그것들은 모양이 흐트러져도 최상의 맛을 발휘하겠지만 자긍심 높은 주방장 벤디는 음식을 일단 눈으로 즐길 수 있게끔 최선을 다하는 요리사였다.
그의 노고를 무로 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결국 다 헤쳐진 데다가 그 정도는 가납할 줄 알았던 율란이 기가 막힌다는 듯 말하자 살짝 짜증이 치솟을 수밖에 없던 것이다.
니키엘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것들은 그냥 평범한 음식이요. 대공이 생각한 것이 아니….”
“평범한 음식에 평범하지 않은 짓들을 했던 것이 누군데 깜찍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나의 전하시여.”
…아니 그러니까 그게 내가 한 일은 아니래도. 니키엘의 맥이 탁 풀려버렸다.
아침부터 열심히 준비했을 벤디에게만 미안했다.
니키엘은 더 대꾸하지 않고 옆에서 데굴 눈만 굴리고 있는 폴을 향해 말했다.
“마차에 다시 가져다 두어라. 안 받으신다하니 강제할 수 없음이야.”
“그렇지만, 전하….”
“어서.”
니키엘이 아침부터 주방을 들락거리며 저녁에 가져갈 음식들을 여러 번 챙기는 장면을 보았던 폴이 말꼬리를 흐렸으나, 니키엘은 차분히 말한 뒤 율란을 향해 싱긋 웃었다. 그린 듯 아름다운 미소였다.
“가져다 왕자궁에서 기르는 개에게 주거라. 우리 집 개들은 그 주인이 주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먹지 않니. 그런 충성스러운 개들만이 주인의 사랑을 받음직 하지.”
“전하…!”
율란의 앞에서 그에게 개보다 못하다고 말하는 함의를 읽어 낸 베네딕이 발끈해 소리쳤다. 그러나 이번에는 율란이 그의 부하를 만류했다.
“됐어. 다들 이만 퇴근하도록. 전하께오선 저를 따라오시지요.”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니키엘을 슥 내려다보더니 그를 지나쳐 걸으며 말했다. 니키엘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곧 율란을 따라 걸었다.
상관과 모시는 주인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부하와 종은 멍하니 있다가 서로에게 눈을 흘기며 멀어졌다.
‘쪼고만 게 흘겨보면 다인가. 망나니 왕자나 모시는 주제에.’
‘이래서 북부인들은 쪼잔하다니까!’
각자 속으로 무슨 욕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
잠깐 치솟았던 짜증은 연무장 가운데로 향하는 동안 소강 되었다. 애초에 니키엘은 부정적인 감정을 오래 담고 있을만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어렸을 적부터 참을성이 많다는 평을 많이 들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아픔을 겪는 것이 싫어 그 원인을 찾아 없애거나 화를 내는 등의 감정이 날뛰는 감각이 싫어 빠르게 잊어버리는 탓에 참을성이 많아 보이는 것뿐이었다.
때문에 니키엘은 이번에도 자신이 당했던 취급을 재빠르게 잊었다. 굳이 짜증을 내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니키엘이 연무장 한복판에 섰을 때는 어느새 가지런한 얼굴과 태도가 된 상태였다.
얇은 하얀색 튜닉과 베이지색 브레를 입은 니키엘이 가만히 서 있는데도 율란은 그쪽을 향해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목검을 고를 뿐이었다.
니키엘에게는 등진 상태였는데 검은색 튜닉을 입은 등 위로 탄탄한 견갑골이 드러나 옷을 팽팽하게 만들고 있었다.
‘…3대 몇 칠까?’
니키엘이 지금 당장 궁금한 것은 그게 다였다. 벤디가 고생한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해 준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다. 니키엘은 부정적인 감정은 빨리 털어 버릴지언정 원한과 은혜를 쉽게 잊는 남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반드시 벤디의 원수를 갚아 주겠어.’
사과로 만든 브랜디 한 병을 훔쳐 두었다가 고된 일과를 끝내고 기분 좋게 마시고 있던 벤디가 들었다면 어리둥절할 말이었지만 니키엘의 결심은 아무튼 그러했다.
그것 외에는 딱히 남아 있는 사감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율란 발트라는 남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싸가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촌지를 주는 것까지는 실패했지만 연무장에 입성하는 건 실패하지 않았다. 촌지가 통하지 않는 타입의 선생이라면 성실으로 증명하면 되는 것이다.
니키엘에게 성실이란 옷과 다름없었다. 늘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때, 율란이 니키엘을 향해 가벼운 목검을 던졌다. 공중에서 그것을 받아 든 니키엘이 목검을 바라보았다.
가벼운 회나무로 만든 목검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맨 처음 검과 친해지기 위해 장남감처럼 갖고 노는 것에 가까웠다.
“궁에 이런 가벼운 목검도 있소?”
기초적인 검이었기 때문에 실력자들만 모아 둔 궁의 연무장에 있을 리가 없는 검이었다. 의아해 물었는데도 율란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니키엘에게 턱짓을 하는 것만으로 무언의 명령을 했을 뿐. 니키엘은 성격 머리 한번 참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며 목검을 고쳐 쥐었다.
“어깨에 힘을 빼고. 시선은 한 군데 고정한다. 적의 공격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지켜야 하는 급소가 어디지?”
“…목?”
정답이라는 듯, 율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러운 반말에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는 목검 하나를 들고 돌아와 검을 쥔 채 서 있는 니키엘의 팔꿈치 아래쪽을 툭 치고 다리 사이를 검 끝으로 겨눠 벌리게 만들기도 했다.
말없이 검 끝으로만 알려 주는 자세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욕감이 들었을 테지만 니키엘은 늘 범상치 않았다.
‘나, 재능 있는 건 아닐까?’
대한민국 최상위 대학의 자연 과학대에 진학하기 위해서, 니키엘은 중학교 때부터 고3까지 늘 1등만을 해 왔다.
어디를 진학해도 차석 이하의 자리로는 내려오지 않았던 니키엘에게는 단 한 가지 흔들리지 않는 자뻑 증세가 있었다.
무언가를 배우기만 해도 그 자신이 그 분야에서 굉장히 월등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자뻑 증세였다. 잘생긴 얼굴로 새로 눈 떴으니 외모에 자신감을 가질 법도 한데 니키엘이 관심 있는 것은 여전히 무언가를 향한 성취뿐이었다.
때문에 니키엘은 지금 방금 처음으로 검을 잡아 본 주제에 자신도 곧 소드마스터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그 어찌 보면 순수한 감탄이 니키엘의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어 훨씬 생기 있어 보이게 했다.
“…….”
율란은 그런 니키엘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 니키엘은 그런 율란을 향해 다음 것을 알려 달라는 듯 눈을 빛냈다.
쯧, 혀를 찬 율란이 검을 쥐었다. 그저 검을 쥔 것뿐인데 자신과는 다른 자세가 나오자, 니키엘은 금세 율란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의 인간성이 아닌 검술 스승으로서의 능력에 한정된 존경이었지만 말이다.
니키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상관없다는 듯, 율란이 허공에 목검을 휘둘렀다. 싀익, 하고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대차게 났다. 니키엘에게까지 그 여파가 날아올 정도였다.
바람이 거세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날카로웠다. 심지어 율란이 니키엘의 정면을 향해 목검을 휘두른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대단하오, 대공!”
니키엘은 절로 감탄했다. 투명한 파란색의 눈동자를 반짝 빛내며. 그런 니키엘을 흘끗 본 율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내려치기를 400번 하면 된다.”
“오, 알겠소. …근데 이제 아예 반말하기로 했소?”
“난 내가 가르치는 놈들한테 존댓말 안 해. 경칭이 듣고 싶으면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도 된다.”
“뭐, 스승님이 그렇다 하면 그런 줄 알아야지.”
니키엘은 그렇게 대답하며 씩 웃었다. 율란은 한쪽 눈썹이 슬며시 올리더니 흠, 하고 목을 울렸다.
그러나 특별히 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고 다시 한번 니키엘을 향해 확인했다.
“400번, 할 수 있겠어?”
“내가 할 것 같아 시킨 것 아니오? 일단 해 보겠소.”
니키엘은 씩 웃었다. 아마 율란은 니키엘이 400번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엄살을 부릴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니키엘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