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 말고 구혼 (50)화 (50/130)

50화

‘뭐야, 왜 갑자기 친절해?’

의도는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다. 기사단의 말단 기사를 보내 줬어도 니키엘은 성심을 다해 스승으로 모실 자신이 있었다.

무릇 학생의 도리란 스승을 섬기며 가르침을 받는 것에 있다.

한 교수 같은 개자식만 아니라면 니키엘은 기본적으로 거쳐 온 모든 선생님들과 강사님들을 존경했다. 군대 조교까지 말이다.

율란이 싸가지가 바가지라고 한들 그가 가르쳐 줄 검술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율란 같이 엄숙한 인물들은 오히려 결벽적인 부분이 있어 니키엘이 자세만 갖추고 훈련에 임한다면 오히려 대충 가르쳐 줄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배움의 자세를 논하자면 니키엘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니키엘은 새로운 사제 관계에 들떠 맑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 때나 상관없소. 지금 당장도 괜찮고.”

율란은 니키엘의 말에 흘끗 바깥 태양을 바라보았다. 이제 초가을 날씨기는 하지만 불의 계절이 아직 끝나지 않아 햇빛이 낮고 몹시 뜨거웠다.

응접실 한쪽에 얌전히 기립해 있던 시종이 율란을 보며 애원의 눈길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이 뙤약볕에 나갔다가는 저 상아색으로 투명한 피부가 쩍쩍 갈라질 것은 불 보듯 자명한 일이었다.

율란은 평소의 약간 심드렁한 표정을 되찾은 채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가 일이 있습니다. 내일부터 하시죠. 아침과 오후에는 기사단 업무가 있어 어려운데 저녁에 따로 시간을 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전하.”

“당연하오! 하루종일 사사 받아도 상관없소!”

니키엘은 정말 그렇게 여기는 듯했다.

율란의 한쪽 눈썹이 다시금 살짝 치솟았다. 너무도 의외였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율란은 니키엘이 업계 최고 강사의 강의를 들을 생각에 기뻐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율란은 상파스라는 마물의 독에 당한 것처럼 술렁거리는 마음이 이상했다.

‘차에 뭘 탔나.’

그는 니키엘을 음산하게 바라보았지만 딱히 이상한 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인간의 악의적 감정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수장들은 누군가 저들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면 괴물 같은 후각으로 그를 판별했다.

니키엘에게서 그런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율란과 베네딕은 니키엘의 밝은 배웅을 받고 왕자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얻은 왕자의 검술 스승 자리를 덤으로 안고서.

그렇게 두 사람의 검술 강의가 시작되려고 했다. 폴은 안 그래도 점점 두꺼워지는 니키엘의 팔뚝이 이제는 아예 말 허벅지만큼 굵어지겠다고 푸념했다.

니키엘은 그런 폴의 잔소리는 듣지도 않고 왕자궁 주방장 벤디에게 오늘부터 고열량의 식사를 늘리라 지시했다.

검술은 무, 유산소 운동 모두를 병행해야 하는 고도의 체술일 것이다. 열량이 높은 것을 먹어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입 짧은 왕자의 궁에 배정되어 새 모이만큼 식사를 만드느라 재미없다고 생각하던 벤디는 갑자기 병상에서 일어난 왕자가 고단백 저탄수의 식단을 손수 짜 와 이대로 진행해 달라고 했을 때 잠깐 흥미를 느꼈다가 근래 들어 다시 시들해진 참이었다.

‘소금을 넣지 말라니. 추기경 예하께서도 그보다는 사치스러운 식사를 하실 텐데!’

왕자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산해진미 식재료를 오로지 삶거나 오일 없이 구워 내가야 했다. 만드는 재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녁부터 고열량의 식사를 올리라니. 벤디는 환호성을 질렀다. 최근 들어 건강해진 왕자에게 고열량 식사를 먹여 더욱 살찌우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지금도 꼬챙이 같으신걸!’

근량 증가를 위해 적절히 균형 잡힌 식단을 하던 니키엘이 들었으면 3개월간의 운동이 무소용이라며 땅을 칠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벤디의 기쁨은 니키엘의 혀 밑 기쁨으로 치환되었다. 니키엘은 그날 청둥오리 뒷다리살로 만든 콩피와 북해에서 잡아 온 게로 만든 타르트, 소고기 향신료 찜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얼굴 위에는 니키엘이 잠든 뒤 폴이 몰래 얹어 둔 장미꽃잎 보습제를 바른 채로 말이다.

기분 좋게 잠들었던 니키엘은 얼마 못가 깨어나야 했다. 품 안에 무언가 따듯한 것이 파고드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음, 뭐야….”

니키엘은 뒤척였다. 그의 얼굴 위에 얹어진 장미꽃잎들이 흐트러졌다. 품 안의 것은 니키엘에게 좀 더 파고들었다.

결국 잠에서 깨어난 니키엘은 눈을 찌푸리며 제 품을 파고들었던 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엇, 너는….”

그러고 흠칫 놀랐다. 품 안에 새가 날아와 있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반사적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초가을 날씨에 밤은 쌀쌀한 편이라 폴이 창문을 꼼꼼히 닫아두었는데 어디로 날아온 것일까. 게다가 창문은 현재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닫힌 상태였다.

니키엘은 잠결에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졸려 두 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냥 새를 토닥이며 살짝 껴안을 뿐이었다.

“이불 덮어, 춥다, 추워.”

니키엘은 새에게 이불을 덮어 주며 토닥였다. 새는 어리광을 부리듯 한 번 더 니키엘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곧, 수마가 덮쳤다. 밤하늘을 베어 내어 길게 만든 장막 같은 잠이었다. 꿈조차 찾아올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침대 옆 콘솔 위에 둔 자리끼를 통하여 무언가가 니키엘의 꿈속으로 침범했다.

이제는 외간 남자를 끼고 자는군.

외간 남자? 니키엘은 잠결에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외간 남자는커녕 내간 남자도 없었는데 이제는 외간 남자를 끼고 잔다니.

니키엘은 부정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 저를 꽉 껴안고 있는 체온을 느꼈다.

‘누구…?’

단단한 맨살의 팔 근육이 니키엘을 옭아맨 채로 팔베개를 해 주고 있었다. 따뜻한 품이 기껍기는 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낯설었다.

상대의 단단한 품이나 근육질의 팔 등이 도저히 이성의 것이 아닌 저와 같은 남성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니키엘의 혼란을 종식하려는 듯,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처연하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그래. 그대는 이제 아예 나를 잊었나 봐. 침대에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 걸 보면. 언젠가는 그대도 나를 버리고 외도할 줄 알았지만 그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는데.

아니, 아니다. 자신은 바람 같은 건 피운 적도 없었다. 니키엘은 목소리의 말에 부정했다.

방금 전까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 있던 이질감 따위는 까맣게 잊고 그의 말에 변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당신을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고, 내 침대에 누워 있는 저 자식이 누군지도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모른다고?

그러나 목소리는 용케 니키엘의 속마음을 알아들은 듯했다. 니키엘은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옭아맨 품 안에서 나오려고 발버둥도 쳤다.

목소리는 흐음, 하고 낮게 목을 울리더니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럼 왜 저 새 새끼는 그렇게 싸고도는 거지? 그대와 저것들이 접촉해야함은 맞지만 그 외의 것들을 나누는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군. 비참해. 육체도 없이 밤을 떠돌며 한 잔 물의 양으로 그대가 나를 간신히 보고 싶어 한다는 것에 위로받는 내가.

니키엘의 두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가 자신을 비참하다고 말하는 걸 들으니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안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목소리일 뿐이었다.

내 육체는 허상으로만 그대의 눈앞에 나타날 수 있어. 우리는 닿을 수도 없고 입을 맞출 수도 없지. 그대는 그대의 종을 잊은 것 같고, 태양은 내일도 빌어먹을 동쪽에서부터 떠오를 테지. 나는 점점 미쳐 가는 것 같아.

아아, 아아-. 니키엘은 오열했다. 눈물이 쉼 없이 흘렀다. 너무나도 그를 껴안아 주고 싶었다.

혼자 두어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그의 높다란 콧대와 짙은 눈썹 끄트머리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밤하늘처럼 검디검은 머리 타래에 얼굴을 파묻고 숨 쉬고 싶었다.

왜 저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걸까. 니키엘은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

울지 마. 그대의 짐승도 그대를 위로하려 하는군.

그리고 그때, 치리리 거리는 소리가 났다. 품 안의 새가 우는 소리였다.

“헉-!”

니키엘은 그와 동시에 깨어났다. 눈물에 푹 젖은 뺨을 한 채로. 갑작스레 두 눈을 뜬 니키엘은 천장을 보며 헉헉거렸다.

부드러운 날개가 니키엘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더라? 아주 소중한 누군가에게 지독한 실수를 한 기분이었는데.

그 실수가 무엇이었지? 그는 누구였지? 니키엘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자신의 그 큰 실수는 그를 잊은 그 자체가 아닐까 싶어졌다.

그러나 대체 누구길래? 니키엘은 혼란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 이름이-.”

니키엘은 자신의 진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대한민국에서 그 이름으로 출생하여 호적에 오르고 그 이름으로 대학에 졸업했던 바로 그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헉, 허억-.”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니키엘은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흉곽을 들썩거렸다. 폐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공기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 폐의 첨단으로만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입고 있던 옷을 쥐어뜯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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