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율란이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씨발, 근데 우리 자작님께서는 시이렌 목청을 삶아 드셨나.”
시이렌은 청아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 인어들로 뱃사람들을 노래로 유혹하여 암초에 부딪히게 만드는 마물들의 이름이었다.
목소리만큼 아름답지는 못하여 외모를 조롱하면 뱃사람들의 고막을 터트릴 정도로 크게 우짖고는 아가미를 뜯어 자살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율란의 말에 호프만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다시금 항변하려는 때였다.
검은 가시 기사단의 단장이자 이테렌의 영주, 대공 율란 발트의 그 음산한 표정을 알고 있는 기사단원들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단장을 말리러 뛰쳐나갔다.
가까이 있던 베네딕 솜즈가 가장 빨랐다. 베네딕은 폭주한 경주마의 눈을 가려 진정시키듯 율란의 시야에서 호프만을 가리며 과장되게 웃었다.
“하하! 그럼 저 잡것들은 이만 추국장으로 보내고 검은 가시 기사단은 대련을 준비하겠습니다, 단장님!”
“뭐? 아니, 좌장군 그게 무슨, 읍-!”
달려온 기사단원들이 눈치 없이 허공에 삿대질을 하는 호프만의 입을 막고는 어깨동무를 하여 빙글 돌리며 말했다.
“어, 어? 뭐라구요, 근위대장님? 막내 왕자님을 모욕한 만큼 저 잡것들을 호되게 처벌해야 한다구요? 아, 동감입니다.”
“읍, 읍-!”
내뱉는 말이 가로막힌 채 끌려가듯 어깨동무를 당한 호프만이 읍읍, 거리는 동안 어리벙벙하게 서 있던 근위대 대원들이 이상함을 느끼고 무기를 들려던 찰나였다.
나머지 기사단원들이 재빠르게 그들의 입을 막고 호프만에게 했던 것처럼 어깨동무를 하며 강제로 악수까지 시도하는 동안, 근위대원들은 꼼짝없이 끌려가 입이 막힌 채 악수를 강요당해야 했다.
근위대원들과 호프만은 일제히 당황했다. 그들은 내심, 검은 가시 기사단을 율란 발트라는 늑대 괴물 뒤에 숨은 시골 머저리들이라고 여겼었다.
밤낮없이 훈련에 매진하는 것도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기사란 모름지기 명예를 잃지 말아야 했다. 명예란 차림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기사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연무장을 구르는 용병과 같은 짓거리는 지양해야 했다.
오시니스 왕국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외적의 침입 없이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다.
마물이 기승을 부려 말썽이긴 했지만 그것들은 이번 대에 동시에 네 명이나 태어난 괴물 수장들로 인해 금세 잠잠해지고는 했다.
마물 사이에 풀어두면 그 괴물 같은 것들이 알아서 마물들을 주신에게 제물로 올려 보내니 기사단들이 하는 일은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 근위대 대원들 중, 그들이 막무가내로 어깨 동무를 하고 악수를 하며 입을 막는 걸 반항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헉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완력의 차이였다. 그렇게 기사단원들은 친한 척 근위대원들을 포박하다시피 하여 조용히 만들었다.
그 사이, 니키엘을 모욕했던 나머지 세 명은 입에 밧줄이 물려 진 채 그대로 끌려 나가 버렸다. 그들은 근위대원들을 연무장 흙바닥에서 빠르게 몰아내고는 등을 뻥 차 쓰러트렸다.
잡혀 있던 손과 목덜미, 어깨 등이 아파 반항하지 못하는 사이 연무장에서 쫓겨난 것이다. 기사단원들은 그렇게 근위대를 몰아내고는 빠르게 2열 종대 하여 단장 앞에 기립했다.
율란이 그 꼴을 보고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왜 말리고 지랄들이야. 다 죽여 버리려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베네딕이 기겁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단장님이 막내 왕자 전하의 검술 선생을 뽑으라고 하셨으니, 신속하게 진행하고자 함입니다. 흠, 흠…. 그럼 대련을 시작해도….”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베네딕은 일단 내뱉고 봤다. 율란은 금색 눈으로 베네딕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10년 감수했네.’
‘근위대 새끼들 눈치 없어서 곧 죽게 생겼다. 얼차려 받다 죽은 놈들도 국장 치러 주냐?’
‘주겠냐?’
단원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베네딕이 1조부터 어서 시작하라고 공지하려던 때였다.
율란이 손을 슥 들어 그것을 저지시켰다. 그러고는 방금 전, 니키엘을 모욕한 세 놈이 끌려간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것들은 내가 직접 담글 테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전해.”
“…넵.”
주군을 더 말릴 수는 없는 일이라, 베네딕은 하는 수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몇 분 사이에 급격하게 피로해 보이는 베네딕의 손짓에, 종자 하나가 황급히 추국장으로 뛰어 내려갔다.
***
율란 발트가 근위대 대원들을 이유 없이 추국한 뒤 작위를 빼앗아 국경 지대에 성벽을 쌓는 노역으로 보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니키엘은 아침을 먹다가 폴이 비장한 얼굴로 속닥거리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 더럽잖아. 거슬렸나 보지.”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 콸콸 샌 경우라고 생각했다.
제게도 그렇게 성격이 더럽게 굴더니, 같은 군 소속인 근위대 대원들에게도 그 지랄을 떨어 대는구나. 북부의 미친개라는 멸칭이 딱 어울리는 작자였다.
“아닙니다. 대공께서는 오히려 이유 없이 부하들을 혼내거나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번 소문이 크게 난 거라구요.”
“예, 예, 그러시군요. 지엄하신 대공각하의 노고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요.”
대신 변명해 주는 폴의 말에 니키엘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오시니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네 명의 수장들을 존경하고 경애했다.
귀족들이야 저들의 이권 다툼 때문에 네 명의 수장들을 끌어내리지 못해 혈안이 되어 있지만, 보통의 왕국민이라면 수장들을 우상화하고는 했다.
그럴 만도 했다. 마물의 출현이 생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평민들에게 그들을 처치해 주는 수장들의 인기가 드높은 것은 당연한 얘기란 말이었다.
니키엘은 심드렁한 얼굴로 은 스푼을 놀리며 크림수프를 떠 마셨다.
건더기가 없는 먹거리는 운동한 뒤에 금세 배가 꺼지기 때문에 선호하지 않는데, 왕자궁 주방장 벤디의 솜씨가 매우 좋아 먹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입만 한다는 것이 그릇을 싹싹 비운 니키엘은 단백질을 채우기 위해 간을 최소화하여 구운 청둥오리의 다리살을 포크로 찍으며 말했다.
“그래서 내 검술 선생은 구해졌대?”
“예, 어제 오후 늦게 검은 가시 기사단의 베네딕 솜즈 좌장군으로부터 오늘부터 수업을 바로 시작하시겠냐는 연통이 왔습니다. 전하께서 말씀해 두셨던 것처럼 이르면 이를수록 좋다 답변하였습니다.”
“수고했어. 그래서 수업은 언제부터래.”
“아침을 드신 뒤 바로 시작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검술 선생이 왕자궁에 미리 방문해 있는 상태입니다.”
“벌써?”
니키엘은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술 선생이라도 선생님이신데 기다리게 했다니 유교 나라에서 온 니키엘로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예로부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한다 했거늘, 그도 모자라 기다리게 만들다니 매우 황송 그 자체였다.
니키엘은 빠르게 식당을 뛰쳐나가며 냅킨을 들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쫓아오는 폴의 손에서 그것을 받았다.
“얼굴에 오리 기름을 잔뜩 묻히고 어디를 가신단 겁니까! 오늘은 몸치장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그 꼴로 누굴 뵈시려고 이러셔요!”
“스승님을 기다리게 하는 게 실례지. 그리고 난 잘생겨서 안 닦아도 괜찮을 거야.”
정확히는 니키엘이 아니라 ‘니키엘’의 얼굴이 잘생긴 것이었지만, 그게 그거였다.
니키엘의 얼굴은 한 달 동안 안 닦고 안 빗어도 우수에 차 보일 정도로 아름답고 매끈하게 생겼다. 그 얼굴의 이점을 십분 활용하겠다는데 폴은 늘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았다.
니키엘은 그런 폴을 무시하며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가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응접실 문 앞에 서, 헥헥거리는 폴에게 턱짓했다. 노크를 한 뒤, 니키엘이 당도했음을 아뢰라는 뜻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간단한 궁중 예법이 혼란스러웠으나 저자 안나락 프라임의 귀족의 예법, 황실 정통 예법, 이라는 두 권의 책을 독파하고 나자 꽤 자연스러워졌다.
오히려 ‘진짜 니키엘’보다 기품 있어 졌다는 평을 듣는 요즘이었다. 폴은 그제야 숨을 다 골랐는지 문에 대고 노크를 한 뒤 외쳤다.
“왕자 전하 드시옵니다.”
니키엘은 약간 설레는 마음으로 폴이 문을 열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누가 왔을까. 검은 가시 기사단은 평 단원이라도 실력이 매우 좋았다.
원작을 읽으며 니키엘이 가장 좋아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검은 가시 기사단이 마물을 해치우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잘 훈련된 기사들로 마물의 특성을 파악하여 정확하게 해치우고 혼란에 빠진 왕국민들을 구휼하여 새 삶으로 인도시켰다.
정의로운 부분이 많아 니키엘은 그들의 에피소드를 읽을 때마다 즐거웠었다.
직접 겪은 그들의 상관 율 모 씨의 성격이 개 같다는 점도 그들의 호감도를 올리는 요소 중 하나였다.
한 교수 같은 사이코패스 밑에서 박사를 마친 니키엘은 상관의 성질머리가 싸가지 바가지일 때 부하 직원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막 기사 작위를 딴 이라도 좋으니 검은 가시 기사단 단원들 중 하나를 검술 선생으로 맞이해 그들의 무용담을 조금 청해 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니키엘이 맞이한 것은.
“또 보는군.”
검은 가시 기사단인 건 맞는데, 그러니까 기사단장 본인인 율란 발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