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최근에 마물들이 왕궁으로 침입한 일이 있었지 않소. 내 몸 정도는 내가 지키고 싶었을 뿐이오. …혹, 이번에는 검술 선생과 붙어먹을 작정이냐고 이죽댈 작정이면 차라리 입을 다무시길.”
정말 열 받게도, 율란은 입을 다물었다. 딱 그렇게 이죽댈 생각이었던 듯했다.
뻔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린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니키엘은 열이 받다 못해 맥이 딱 풀려 버렸다.
“그렇게 나를 못 믿겠거든 대공이 내 검술 선생을 골라 주면 되지 않겠소.”
“내가 왜.”
“왜는 무슨 왜야! 그럼 남이사 난잡하게 놀든 수도사처럼 살든 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데!”
“누가 시비를 걸었습니까, 나의 전하시여. 저는 그저 걸레가 풀숲에 떨어져 있길래….”
“으악, 그만! 아무튼 공이 직접 검술 선생을 골라 주시오. 그렇게 쫓아다니면서 내 정조 걱정을 해 줄 만큼 충성심이 높다면, 내가 호신하겠다는 걸 말릴 일도 없겠지!”
니키엘의 그 말에 율란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김에 아예 무도로 그 더러운 욕구를 다스리시는 편이 낫겠군.”
“그래. 나 완전 대걸레니까, 검술 선생이나 보내 줘. 대공이랑 말하면 저혈압 환자도 금세 회복하겠군!”
“져혀랍? 이 뭡니까.”
혈압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세계인지라 자동으로 한국어로 들린 것인지, 율란은 짐짓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뭉개진 발음으로 ‘저혈압’을 말하는 것이 약간 웃겼다.
하지만 너무 열이 받은 상태라 웃을 생각도 하지 못한 니키엘은 그냥 몸을 홱 돌려 왕자궁으로 향하며 말했다.
“일국의 대공이란 자가 무식하긴! 그 정도도 모른단 말인가!”
혼잣말을 크게 하는 사람처럼 지껄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왕자궁을 향해 경보했다. 뒤에서 쫓아오는 기색은 들지 않았으나 니키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혈압이란 단어 자체가 이세계에 없는 개념이니 그가 알아듣지 못함은 당연한데도, 무식하다고 쏘아붙이니 속이 다 후련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하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다람쥐 몇 마리가 니키엘의 가는 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오종종한 것들이 나란히 서서 사람이 오는데 피하지도 않고 니키엘을 빤히 보고 있었다. 동물을 좋아하는 니키엘은 열을 냈던 것도 잊은 채 가던 길을 멈췄다.
“너희 여기 사니?”
그러고는 다람쥐가 대답할 리도 없는 것을 물었다. 너덧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니키엘을 구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드문 길도 아닌데 야생 동물이 낯을 가리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니키엘이 허리를 굽히고 그들을 들여다볼 때였다. 저 멀리서 토끼 몇 마리가 깡총거리며 뛰어와 다람쥐들처럼 니키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 너희들도 나 구경 왔니?”
이번에도 그들이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물은 니키엘이 쭈그려 앉았다. 그들은 니키엘이 자세를 낮춰도 도망가지 않고 기웃거렸다. 토끼들은 심지어 더욱 바짝 다가오기까지 했다.
니키엘이 손을 내밀자 다람쥐 몇 마리가 그의 손가락을 앞발로 잡고 킁킁거렸다.
“와, 뭐지. 나 인기 좋은데.”
토끼들은 이제 아예 니키엘을 둘러싼 채로 빙글 돌다가 니키엘의 무릎 위로 올라가고 싶어 했다.
제 머리를 그의 허리에 비비기도 했다. 안아 주자 품 안으로 냉큼 뛰어 들어왔다.
그렇게 한 마리가 안기자 다람쥐고 토끼고 할 것 없이 죄다 덤벼들었다.
“어, 잠깐, 얘들아-.”
작은 동물들이라도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덤빈 데다가, 그들을 다치게 할 수 없어 힘을 빼고 있던 니키엘은 뒤로 살짝 엉덩이를 찧듯 바닥에 털썩 앉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도 소둥물들은 니키엘의 어깨를 타고 오르거나 품 안에 안겨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꼭 아까 전 검독수리가 하던 행동 같아 의아함을 느낄 무렵이었다.
물론 검독수리가 했던 행동보다 산뜻하고 귀엽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 품 안에 있던 토끼 하나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니키엘의 어깨 너머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람쥐들이 우르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겨 있던 토끼가 버둥거리길래 놔줬더니 그 역시 꽁지 빠지게 도망가기 바빠 보였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어 뭔가 싶었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야생의 것들이 달려드나? 그러니까 내 말은, 기억을 잃은 후에도 이렇게 짐승들이 달려드냐는 말이야.”
“그런 건 아니오.”
여전한 반말이었다. 그는 대공이고 저는 막내 왕자 나부랭이니 저쪽이 서열이 높긴 했지만 그래도 열이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왕족인데 반말은 너무한 거 아니야? 상호 경칭 정도는 해야지.’
니키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러고 율란을 봤는데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니키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숯으로 그린 듯 진한 눈썹 아래 빛나는 황금 눈이 니키엘을 샅샅이 벗기듯 훑고 있었다. 왜 그런 시선으로 보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흠칫 놀란 니키엘을 향해, 율란이 다시금 말했다.
“어쩌면 정말 호신이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왜 갑자기…? 픽픽 비웃을 때는 언제고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니 조금 꺼림칙해졌다. 이유를 묻자 율란이 그를 흘끗 보고는 등 돌아 걸으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신성력을 갖고 계셔 말 못하는 짐승들이 신성력에 끌려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고, 마물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호위를 보내 드릴 테니 얌전히 좀 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떡 치다가 객사하고 싶지 않으면.”
뭘 쳐? 저, 저런 싸가지…. 니키엘은 저벅저벅 걸어가는 태산 같은 등을 바라보며 가운뎃손가락을 올렸다.
얇은 검은색 튜닉을 입은 율란은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아예 돌아보지 않을 것 같길래 두 손 다 중지만 치켜들고 쌍으로 날려 주었다.
니키엘을 발견하여 잠시 말을 나눴다 뿐이지, 급히 할 일이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대공쯤 되는 작자가 혼자 돌아다니는 것이 이상하기도 했다.
니키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율란이 마지막에 한 말을 되새겼다.
짐승들이 신성력에 끌려 니키엘에게 다가온 것처럼 마물도 그럴 수 있다니. 이번 대회에 참가하기로 한 니키엘로서는 애로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물들이 신성력에 이끌려 달려든다면, 그들이 니키엘에게서 무얼 원하든 상관없이 니키엘에게는 해가 될 수 있는 법이었다.
니키엘이 인간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니키엘은 율란이나 레이먼처럼 검을 다룰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루시안처럼 마법에 능통한 것도 아니었다.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없으니 불안한 것은 사실이었다. 당장 호신술을 배운다고 해도 말이다.
‘게다가 이 몸, 약간 몸치거든….’
설상가상으로 진짜 니키엘의 몸은 몸치이기까지 했다. 근력 운동을 하는 것과 운동신경은 크게 관련이 없지만, 반사 신경을 필요로 하는 무예는 다른 얘기였다.
니키엘은 약간 짜증이 났다.
“몰라, 죽든지.”
인생사 쉬운 게 없는 법인지, 하루아침에 낯선 나라에 뚝 떨어져 왕자가 되었는데도 고생길이 저를 피해 가는 법이 없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도 뭔가 쉽지가 않았다. 방탕하게 놀면 그만이겠지만 니키엘이 생각하기에 이 몸은 운동을 그만두면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질 것이었다.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게다가 원래 제 몸이 죽었음을 확신했기에 이세계에서라도 살아가자고 생각했지만 사실 니키엘은 살짝 염세를 느끼고 있었다.
그만큼 노력해서 살았는데 보답 없이 또 낯선 곳에 떨어져 다른 노력을 더 해야 하다니. 지겨울 수밖에 없었다.
니키엘의 모순적인 성격이 이곳에서 빛을 발했다. 이왕 태어났으니 열심히 사는 것일 뿐, 당장 죽는다고 해도 미련이랄 것이 없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로 열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니키엘의 우울은 늘 수면 밑에 잔잔하게 깔린 상태라 해안을 침범해 들어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우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다만, 니키엘은 우울을 다루려고 노력했다. 방파제를 쌓고 등대를 올려 우울의 파도가 저를 침몰시키지 않게끔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노력한 다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면 그냥 잠겨 죽는 것이 속 편했다.
그렇게 니키엘의 모순이 완성되었다. 노력하여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지만,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미련은 없는 상태. 그것이 니키엘이 갖고 있는 보편적 심리 상태였다.
그 때문에 마물이 제게 어떤 위협이 되더라도 상관없었다. 몸이 다치면 불편하겠지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외상은 신성력으로 치유가 가능하니까.’
내과적으로 무척이나 골골거리는 니키엘의 신성력 넘치는 신체는 단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팔, 다리가 잘리더라도 시일이 지나 잘린 부분이 썩지 않는 이상 신성력으로 그 부분을 다시금 봉합할 수 있는 것이다.
회복이 되니 다치는 걸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아픈 건 어떻게든 지나간다. 어쨌든 호신술 선생을 보내 준다고 했으니 다시 왕자궁으로 돌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마주친 새가 제 품에서 날아가 버린 건 아쉬웠지만, 작은 동물들의 반응으로 미뤄 볼 때, 동물들은 율란 발트를 무서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야성의 감이 기민한 검독수리도 율란의 기척을 느끼고 미리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하여간 도움이 안 돼요.”
니키엘은 투덜거리며 걸었다. 새와 놀지 못한 걸 무척이나 아쉬워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