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간지러움이 극심해져 니키엘의 체온까지 올라갔을 무렵이었다. 니키엘은 어찔한 시야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었다.
새는 그런 니키엘을 두고 갑자기 고개를 치켜들더니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꼭 제 영역권을 어지럽히는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말이 잘 나오지 않아 한 번 더듬은 니키엘이 팔꿈치와 팔뚝을 풀숲에 대고 상체를 반쯤 일으켰을 무렵이었다.
길 쪽을 바라보던 새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니키엘의 뺨에 제 부리를 비비더니 그대로 날아올랐다.
새의 날개가 크게 날갯짓하며 날아오르자 바람이 불었다. 놀란 니키엘이 눈을 감았다 뜨자, 새는 이미 창공 위에서도 사라진 뒤였다.
아무리 빨라도 날아가는 것 정도는 보일 텐데 깃털 하나 보이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게 무슨….”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어, 니키엘은 달뜬 뺨을 하고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때였다. 부스럭 소리가 나며 인기척이 들린 것이다. 니키엘은 풀숲에 넘어져 입고 있던 옷에 수상한 주름이 간 제 꼴이 어떤지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
그리고 그곳에 서 있던 것은 연무장에서나 보일 법한 검은 가시 기사단 특유의 검은색 튜닉과 브레를 입고 있는 율란 발트였다.
니키엘은 머리에 풀잎이 붙은 줄도 모른 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율란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니키엘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니키엘의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풀잎이 묻은 백금발의 머리 타래, 뒤로 넘어가는 바람에 흐트러진 새하얀 튜닉, 오월의 장미처럼 달아오른 뺨과 누군가 등으로 누른 마냥 짓뭉개진 풀숲까지.
“이런, 씹….”
율란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욕을 지껄였다. 별안간 욕을 얻어들은 니키엘은 몸을 일으키려다 놀라,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율란을 바라보았다.
“공, 지금 욕을 한 게요?”
“이 걸레 같은…. 일어서.”
뭐…? 그 순간 니키엘의 너갱이가 서기 202X년의 대한민국까지 날아갔다가 되돌아왔다.
별안간 걸레라고 욕을 먹은 이유를 모르겠다. 니키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지금 뭐라 했소? 사람 면전에 대고 뭐? 거얼레에?!”
니키엘은 말을 늘려 가며 율란을 맹비난했다. 지가 서열 1위 중세시대 일짱이면 다야? 사람을 보고 면전에다 걸레라고 하다니.
물론 니키엘도 율란에게 욕을 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속으로 생각만 했던 욕인데다가 입 밖으로 내뱉은 적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율란은 벌써 몇 번이나 니키엘의 면전에 대고 욕을 뱉었다. 나는 이성을 차려 하지 않은 행동을 저놈만 하는 꼴을 봐야 하다니. 니키엘은 정말 화가 났다.
그 때문에 뜻밖의 곳에서 율란을 마주치는 바람에 당황했던 것도 잊고 허공에 검지를 찌르며 삿대질을 했다.
“공이 대공이면 단가?! 공도 오시니스 왕국의 왕국민일진데 왕실을 향한 충성심도 없이 지금 뭐 하는 거야!”
비단 충성심이 쥐뿔만큼 없더래도 상식적인 인간이면 눈앞에서 욕을 하는 짓거리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따지려던 참이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율란이 니키엘에게 성큼 다가온 것이다. 그 기세에 놀란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등에 딱딱한 나무 기둥이 부딪쳤다.
얇은 튜닉만 입어 까칠한 껍질이 그대로 느껴졌다. 니키엘이 뭐 하는 짓이냐고 다시금 말하려는데 율란이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꼭 타오르는 얼음 같았다. 무척 냉정한 시선인데 그 안에 담긴 분노가 절절 끓어오르는 느낌이었다.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율란이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왕실을 향한 충성심?”
“…….”
“대낮부터 풀숲에서 누구랑 붙어먹느라 제정신이 아닌 자가 이 나라의 왕자인데, 전하께서는 꽤 뻔뻔하게 제게 그런 것을 요구하시는군요.”
뭘 먹어? 니키엘은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생각하느라 빠르게 대꾸하지 못한 채 미간을 좁혔다.
율란은 그런 니키엘의 장밋빛 뺨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참으로 파렴치하십니다. 이곳이 한갓진 곳도 아니고, 궁인들도 지나다니는 길인데 어떻게 여기서 이런 짓거리를 하실 생각을 하셨습니까.”
“그게 아니라, 지금 무슨 오해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니키엘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율란 발트에게 진짜 니키엘의 이미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것 같았다. 그저 새와 놀다가 넘어졌다고 말할 참이었다.
율란이 그런 니키엘을 비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해? 무슨 오해. 상대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었다는 오해 같은 거? 안 하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걸레인 건 오시니스 귀족 남성들의 아랫도리는 전부 다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니키엘의 퓨즈가 파삭하고 끊겨 버렸다. 보자 보자 하니까 사람을 보자기로 보는 새끼가 여기 있네.
니키엘은 참지 않고 되받아쳤다.
“오시니스 귀족 남성이라면, 공도 그 범주에 드는 건가?”
“뭐?”
“나를 보고 아랫도리를 벌떡 세우냐 이 말일세.”
거기까지 말한 니키엘은 율란을 쏘아보았다. 오시니스의 귀족 남성이라고 했으니 너 또한 나를 보고 발정하냐는 뜻이었다.
율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가, 닿을락 말락 바짝 붙어 있던 상체를 뒤로 물리고는 표정을 지웠다.
그러고는 사무적인 어투로 여전히 니키엘을 모욕했다.
“천박한 나의 전하시여. 풀숲에서 그런 얼굴을 하고 다니시면 모두가 전하가 여전하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갑자기 새가 달려들어서 넘어진 거라니까?!”
결국 참다못한 니키엘이 꽥 소리를 질렀다. 율란은 니키엘의 그 말을 듣고도 그다지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니키엘의 가슴팍을 흘끗 내려다보는 시선도 불온하기 그지없었다.
감각이 갑자기 극대화되는 바람에 묘한 열기와 함께 가슴팍의 정점이 도드라졌던 흔적이 얇은 튜닉을 뚫고 나올 정도로 선명했다.
뒤늦게 알아챈 니키엘은 저도 모르게 팔을 엑스자로 모아 가렸다.
율란은 ‘네가 정말 새 때문에 놀라 넘어진 것이면, 대체 그 흔적은 뭘 뜻하는 거냐.’ 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 타이밍 한번 거지 같네. 왜 하필 그때 나타나서는…. 가뜩이나 사냥 대회 안 데려갈 거라고 난리 치는 놈인데 내가 가서 남자나 꼬실 거라 생각하면 어떡하냐고.’
마물 토벌 대회의 참가 인원은 정예 기사 부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사내새끼들만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니키엘이 욕정을 참지 못하고 아무 막사에나 뛰어들 거라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사냥부 장관은 레이먼이지만, 마물 토벌에 있어서 제1 결정권자는 율란인 만큼 잘 보이지는 않더라도 밉보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율란은 지난번 니키엘에게 토벌 대회에 참가하지 말라는 말도 했었다.
니키엘은 율란을 슬쩍 올려다보다가 말했다.
“정말이네. 덩치가 커다란 새였어. 원래는 덩치가 작았는데 갑자기 커졌다고.”
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진실만을 밝히는 편이 낫다는 걸, 니키엘은 잘 알고 있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 진실은 알려진다. 하지만 거짓말은 그보다 더 빠르게 뽀록나는 법이지.’
니키엘의 철학과도 같았다. 니키엘이 그렇게 생각하며, 제가 봐도 말이 안 되는 변명을 마친 채 가만히 서 있는데, 의외로 율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잔뜩 비꼴 줄 알았는데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니키엘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뭔가 생각에 잠겨 보였다. 율란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니키엘에게 다시 한번 물었다.
“…새가 갑자기 커졌다고.”
“공은 정말 존대를 제멋대로 하는군! 그렇다니까. 안 믿기겠지만 사실일세.”
니키엘은 이제 또 반말을 하고 있는 율란을 흘기며 제 머리에 붙어 있던 나뭇잎을 떼어 내고 튜닉을 툭툭 쳐 흙먼지를 지워냈다.
율란은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예의 그 서늘한 눈으로 니키엘에게 말했다.
“혹시 그 새의 종류가 어떻게 되었지?”
“검독수리였네.”
“검독수리가 어떻게 생긴 새인 줄은 알고?”
“무례하오!”
니키엘은 꽥 소리를 쳤다. 율란은 니키엘이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끔씩 니키엘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그때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시선이었다. 니키엘로서는 그런 눈빛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요, 시발. 야리세요. 누군 눈깔 없는 줄 아나.’
마주 야리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눈에 힘을 주느라 핏발이 조금 서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저도 성깔이 있다는 걸 이 무뢰배에게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니키엘은 또 한 번 내뱉듯이 말했다.
“볼트윅 공작을 찾아가는 길이었네.”
레이먼을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하자, 율란이 저 혼자만의 세계에서 깨어난 듯 아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린 채 니키엘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그 새끼한테는 왜? 쓰레기들끼리 모여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이제는 아예 야, 너, 하는구나. 그래. 맘대로 부르시오. 검술 선생을 초청해 달라고 할 예정이었소. 호신술 정도는 익히고 싶어서.”
그 말에 의외라는 듯 율란이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렸다.
“어느 귀부인 다리 사이에 있던 것이 들통나, 그 남편에게 흰 장갑으로 뺨을 맞기라도 했나 보지.”
“순, 수, 하, 게. 호신용이요.”
니키엘은 또박또박하게 말하며 짜증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