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자만이 아닌 자연스러운 깨달음에 가까웠다. 인간은 율란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범이 태어나 자신이 그저 태어남으로 이 땅을 지배하게 됐다는 걸 당연히 아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저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수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만약 인간을 피식자로 인식했다면 적당한 크기의 영지 정도는 하룻밤 만에 지도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먹이 사슬의 최정점에 선 자들은 고독을 선천적으로 앓고는 했다. 율란은 그 고독을 나머지 짐승들에게서도 느껴 보았다.
권태, 무료, 쉽게 찢어지는 살점들에 대한 회의감, 이대로 내 인생의 이해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는 허무감. 그런 것들이 종합적으로 뭉쳐져 율란과 나머지 짐승들을 때때로 괴롭히고는 했다.
늘 힘든 것은 아니지만 문득, 마물의 시체 위에서 퍼석한 빵으로 끼니를 때울 때마다, 유한한 생을 가진 것은 저도 나도 마찬가지인데 무덤까지 재물을 싸 가지고 들어갈 것처럼 욕심을 부리는 인간 군상들을 마주할 때마다.
율란과 나머지 짐승들은 때때로 영혼이 마모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최근의 니키엘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다.
고독보다는 무료함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아니, 오히려 깊은 우주를 깨달은 자의 고요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을 통달한,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를 명확하게 알고 있는 듯한 두 눈이 율란을 응시할 때마다 뱃속에서 알 수 없는 것이 끓어올랐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율란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성적으로 끌려 본 적이 없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 범이 토끼와 접을 맺을 수 있겠는가. 이종 간의 교배밖에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검은 가시 기사단장과의 궁정 연애를 원하는 수많은 귀부인들, 율란의 청혼을 기다리는 고귀한 영애들, 더러는 영식들까지. 이테렌의 또 다른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율란이 제 몸무게보다 무거운 검을 들 수 있게 되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제 조부이자 친부인 도미닉 발트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를 암살하고 도미닉의 정부였던 남창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처형시켰다.
그 남창과 묘하게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니키엘이 처음부터 경멸스러웠다. 구원자의 운명을 타고난 주제에 남창의 얼굴을 하고 똑같이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이 한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 만난 니키엘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래, 오히려 신전에 평생을 바친 수도사처럼 깨끗하고 정갈한 얼굴이었다.
표정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말투는 우물에 솟아나는 물처럼 상쾌하고 맑기만 했다.
율란의 중얼거림을 들은 알레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각하, 무슨 말씀이라도 하셨습니까.”
“…….”
율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뚜렷한 눈썹뼈 밑으로 고랑이 패이듯 깊은 눈가가 음험하게 빛났다. 율란은 제가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위험한 눈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묘했는데.’
정말로 분위기가 묘했었다. 혹시나 싶어 몸에 닿지 않게끔 내내 접촉을 경계했지만, 율란은 짐승의 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진짜’였다.
언젠가 축언을 위해 방문한 왕자궁에서 본 허여멀건한 어린애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는 가짜가 아니라.
율란은 문득, 다른 짐승들도 그를 느꼈는지 궁금해졌다. 머저리들 가운데 새 새끼 정도가 가장 예민하니 벌써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놈들은 눈먼 뱀 하나, 광견병 걸린 사슴 새끼(레이먼은 순록이다.) 하나이니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지적 생명체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늑대의 청각을 갖고 있는 율란이 니키엘의 중얼거림을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지적 생명체의 존재에 대해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니키엘이 지적 생명체의 존재에 대해 말하다니.
마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서부 왕국민들을 위해 열린 자선 무도회에서 니키엘이 한 발언은 수도 사교계의 아직까지 한 줄기 빛으로 남아 있다.
‘마물은 인가를 공격하지 않잖아. 왕족과 귀족들이 저들 봉도 아니고 가뭄이다, 태풍이다, 핑계로 곡식을 털어 가더니 이젠 마물? 가지가지 하네.’
마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데다가 왕족 주제에 다스릴 백성들을 버러지로 여기는 발언이었다.
니키엘이 마물은 인가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물들은 왕궁을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있는 법황과 그 밑 추기경들이 하나하나 축언 기도를 해 준 대리석으로 지은 왕궁을 그 어떤 마물이 공격하겠는가.
왕궁으로 오지 못하는 마물들은 보통 오시니스 왕국의 외각을 떠돌며 화전민들을 공격하거나 나무를 떼러 인적이 드문 숲으로 향한 백성들을 공격하고는 했다.
아주 낮은 곳에 사는 이들만 마물에게 목숨을 빼앗길 기회를 얻는 셈이었다.
마물에 대해 어지간히 모르는 귀족들도 니키엘만큼은 아니었다. 법황과 비등한 신성력을 갖고 있는 이가 그런 말을 하다니.
수도 사교계에서는 한동안 니키엘식 인사가 유행이었다.
‘왕국민의 봉, 백작 아무개가 인사 올리옵니다.’
와 같은 말이었다. 귀족들은 니키엘의 무식함을 흉보면서 동시에 크고 작은 자연재해 때마다 왕국민들에게 곡식 창고를 연다는 핑계로 귀족들을 털어 가는 왕을 아주 간단히 비난했다. 니키엘의 그 발언을 들먹이며 말이다.
그러나 니키엘은 그것이 저를 향한 조롱인지도 모르고, 정작 그런 인사가 유행이라는 것도 몰랐다.
침대 위에서 그를 보고 싶을 때는 수도의 모든 이들이 찾는 걸레이면서도 정작 중요한 얘기에는 그를 끼워주지 않는 것이었다.
귀족들이란. 율란은 가만히 미간을 찌푸렸다. 숱이 많은 검은색 눈썹이 인상을 찌푸릴 때마다 살짝씩 움직이고는 했다.
‘그렇게 백치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제에, 지적 생명체에 대해 언급한다고.’
그것은 오시니스어도 채 익히지 못한 어린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고대어인 산스브리어로 된 경전을 해석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율란은 니키엘에게 의심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돈 다음부터 니키엘의 행동이 부쩍 수상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란은 니키엘을 향한 관심 또한 커졌다는 것을 몰랐다.
전이라면 검은 가시 기사단의 좌장군이나 우장군 중 아무 새끼에게나 그 머리 빈 왕족 출신 걸레를 조사하라고 한 다음 보고서가 올라올 때까지 까맣게 잊고 마물 사냥에 떠났을 것이다.
직접 그에 대해 생각하고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는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니키엘에 대한 율란의 궁금증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싹이 움트고 있었다.
***
니키엘은 살짝 우울하기는 했다.
신체의 변화가 점점 남자를 좋아하는 쪽으로 굳어 가고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몸이 남자를 좋아한다니. 그것도 저에게 으르렁거리는 놈들에게. 자존심도 없는 신체였다.
그날 율란을 만난 다음 왕자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제가 겪은 이상한 변화에 대해서 정의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니키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남자에게 꼴린다는 게 말이 돼? 그것도 한 명도 아니고 얼굴 좀만 멀쩡하다 싶으면 전부 다!’
니키엘은 부정하고 싶었다. 달에서 막 내려온 어린 신의 미모 아래 숨겨져 있는 육군 병장의 자아가 외치고 있었다.
‘나를 향한 동성애 결사반대. 남들이야 뭐, 남자 여섯이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다!’
그렇다 니키엘은 편견이 있는 듯 없는 자연대 대학원생이었다. 그것도 박사 출신의.
니키엘이 동물 생태학을 배우면서 깨달은 것은 어느 하나 인간의 규범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다.
세계는 니키엘의 이해를 원하지 않았다. 니키엘이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지구는 자전하고 달의 중력은 약하며 물은 아래서 위로 떨어진다.
무릇 인간 외 다른 종들의 생활사도 그러했다. 그러니 동성애 정도야. 생태학을 전공한 니키엘은 모든 동물들을 공부한 만큼 너그러웠다.
단, 니키엘 그 자신만 아니면 되는 것이다. 그가 특별히 동성애를 혐오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상관없는 쪽에 가까웠다.
문제는 남자에게 흥분하지 않는 자신이 아니겠는가. 그래, 바로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취향은 여성이라고. 그것도 니키엘을 휘두를 수 있는 어른스럽고 멋진 여성들이 말이다.
그런데 이세계에 뚝 떨어진 다음부터는 심장이 뛰거나 몸이 흥분하거나 할 때마다 늘 남자들과 함께였다.
아침에 괜히 속옷 자락을 들춰 보게 되는 꿈을 꿀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말이 돼?! 난 전 여친들도 있다고!’
사는 게 바빠 연애를 오래 쉬어서 그렇지, 대학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니키엘은 쉬지 않고 연애를 했었다.
그게 건강한 성인 남성이라면 당연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니키엘은 단 한 번도 여성에 대한 그 어떠한 것도 떠올린 적이 없다.
생각해 보니 늘 성적으로 옅게나마 흥분할 때는 그의 주위에 반드시 한 명 이상의 남자들이 있었다.
니키엘은 괴로워졌다. 자신의 성향이 변한 것이 확실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머리를 싸매고 왕자궁에 도달한 니키엘은 그날부터 3일간 칩거했다.
아예, 앉아 있는 걸 보기만 해도 ‘3대 몇 치세요?’라는 질문이 줄줄 나오는 운동 기구들 앞에서 시간을 죽였다.
왕자궁의 조경을 망쳐 가면서까지 가져다준 운동 기구로 운동을 해도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